[그 영화 어때] 우리는 모두 우주를 품고 있기에, 영화 ‘척의 일생’
안녕하세요, 조선일보 문화부 신정선 기자입니다. ‘그 영화 어때’ 175번째 레터는 24일 개봉해 독립·예술영화 박스오피스 1위에 오른 영화 ‘척의 일생’입니다. 연말에 혼자서 혹은 친구나 연인과 함께 극장을 가신다면, 올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맞을 의미가 깃든 영화를 찾으신다면, 이 영화 ‘척의 일생’을 권해드립니다. 미스터리와 수수께끼의 포장이 서서히 풀리면서 놀랍고도 따뜻한 발견이 여러분을 맞이할 거랍니다. ‘척의 일생’ 개봉일이 24일로 정해지는 데에 제가 아주아주 조금의 기여(?)를 했는데 그 뒷얘기부터 들려드릴게요.

제가 첫 문단에 말씀드린 ‘기여’는 사실 별건 아니에요. 관객 여러분이 이 영화 ‘척의 일생’을 빨리 만나보시는 데에 과감하게 한 표를 던졌을 뿐입니다. 무슨 말씀인가하면, 배급사 대표님이 개봉일을 31일로 할까 어쩔까 고심하고 계실 때에 “망설이지 말고 당기세요, 성탄절에는 관객들이 보면 좋아할 것 같아요”라고 적극 밀었습니다. 이번 달은 ‘아바타’ 때문에 많은 영화가 개봉을 미뤘거든요. 12월 ‘아바타’ 강점기에 제가 모든 영화를 무작정 민 건 아니고요, 다른 독립영화 쪽엔 “그렇다면 1월도 괜찮지 않을까요”라고 좀 더 조심스럽게 말씀드렸습니다. (결과적으로 그 영화는 1월로) 물론 제 의견 하나 때문에 24일이 개봉일로 잡힌 건 아니지만 저처럼 이 영화의 의미와 가치에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는 말씀, 드려보았습니다.
그리하여. ‘척의 일생’은 24일과 25일 독립·예술영화 박스오피스에서는 1위, 전체로는 10위에 올랐습니다(누적 관객 7684명). ‘아바타’는 말할 것도 없고 ‘주토피아’(크리스마스에 700만 돌파)까지 건재한 이 12월에. 대견하기까지 하네요. 제가 뭘 미리 알고 그래서는 아니고요, 원작을 읽었거든요. 연말연시에 관객이 보면 좋아할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척의 일생’은 스티븐 킹의 단편소설이 원작입니다. 황금가지에서 펴낸 소설집 ‘피가 흐르는 곳에’에 들어가 있어요. 스티븐 킹하면 ‘미저리’나 ‘그것’이 먼저 떠오르실텐데, ‘척의 일생’은 전혀 다른 분위기의 작품입니다. 배경이 그의 다른 많은 작품처럼 메인주라는 점만 공통이고, 공포나 스릴러와는 거리가 있어요. 아, 힘들다, 왜 살아야하지, 어떻게 살아야하지라는 질문에 대한 스티븐 킹의 답이 들어있어요. 그 답은? 여러분이 첫 스틸에서 보신 모습, 바로 춤입니다. 댄스댄스.
춤이라니 기자 양반, 주인공이 음주가무로 시간을 보내는 영화라는 말씀이오, 하실텐데, 물론 아닙니다. ‘척의 일생’의 주인공 찰스 크란츠(톰 히들스턴)는 나이 서른 아홉에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나는 ‘평범한’ 회계사거든요. 으악, 나 오늘 기자한테 스포당했네 하실텐데, 아닙니다. 이 영화는 거꾸로 시작해요. 저는 첨에 책 펼쳤을 때 인쇄가 잘못됐나 했어요. 시작 첫 페이지에 ‘3막 고마웠어요, 척!’이라고 돼있어서요. 알고보니 3막, 즉 결말부터 보여주고 2막과 1막으로 거슬러 가는데, 영화도 같은 방식으로 보여줍니다. 소설과 영화를 다 보고 나니 이 서술 방식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결과를 먼저 보여주고, 그 이유를 되짚게 하면서 독자 혹은 관객에게 물어보거든요. “척의 춤, 정말 황홀하지 않았나요. 왜 그렇게 춤을 췄을까요. 사실은 이러저러했거든요. 자, 이제 당신의 선택은 무엇인가요.”

줄거리 궁금하시죠. 3막의 진짜 의미가 드러나는 1막은 빼고, 2막까지만 말씀드릴게요. 영화는 세상의 종말로 시작합니다. 한 교실에서 월트 휘트먼의 시를 읽으며 수업을 하고 있는데 지진이 납니다. 인터넷이 끊겨요. 의사, 파일럿, 경찰은 탈주 중이라고 하고, 학부모는 탄식합니다. “종말이래도 정도가 있지, 이건 대재앙이잖아요.” 혼돈의 한가운데 뜬금없는 광고판이 거리 곳곳에 나붙습니다. TV와 라디오에도 나와요. ‘근사했던 39년, 고마웠어요, 척!’ 하도 여러 군데 나오니까 주민 모두가 궁금해합니다. “도대체 척이 누구야?” 관객도 물론 궁금해지고요. 그러면서 병상에 누워있는 척을 보여주고, 1막의 세상이 암전되면서 2막으로, 앞서 보여드렸던 춤 장면으로 넘어갑니다.
2막은 척이 몸져 눕기 수 개월 전, 출장 간 도시에서 거리를 걷다 즉흥적으로 어느 여성과 춤을 추게 된 모습을 보여줍니다. 아마 가장 기억에 남을 장면일 거에요. 지극한 즐거움, 열정적 흥분, 모두의 환호 후에 “오늘은 마법 같은 날이었다”는 드럼 연주자의 말을 뒤로 하고 척은 귀가합니다. 그의 뒷모습으로 내레이션이 흘러요.
“왜 멈춰서 들었는가, 왜 춤을 시작했는가. 척은 모릅니다. 훗날 척은 걷는 능력을 잃습니다. 거리에서 아가씨와 춤추는 것은 고사하고요. 씹는 능력을 잃고, 아내의 이름도 잊습니다. 깨어있는 것과 잠들어 있는 것을 구분하지 못하게 되고, 너무나 거대한 고통의 땅으로 들어가, 신이 세상을 만든 이유를 궁금해 합니다. 그 와중에 이따금 떠올릴 것은, 길을 멈춰서 가방을 내려놓고 드럼 비트에 맞춰 엉덩이를 흔들던 모습이었습니다. 그때 생각하게 되죠. 그것이 신이 세상을 만든 이유라고. 바로 그래서였다고.”

척의 즐거움은 그저 주어진 것이 아니었어요. 그가 순간으로 뛰어들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그가 그렇게 살기를 선택했기에 누릴 수 있었습니다. 왜 그랬느냐, 그 설명이 척의 어린 시절을 보여주는 1막에서 나옵니다. 1막 ‘나는 수많은 것을 품고 있다’는 7살 척이 양친의 교통사고 소식을 들었다고 알려줍니다. 그래서 척은 할아버지 할머니와 살았어요. 할아버지는 루크 스카이워커, 아니 마크 해밀이고, 수학을 경배하는 회계사입니다.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척도 회계사가 됐죠. 할머니의 영향으로 척이 2막에서 춤을 췄고요. 조부모와 척이 사는 집은 빅토리아 양식의 주택인데, 1막에 등장한 집과 같아요. 그 집엔 다락방이 있는데 할아버지가 절대 못 들어가게 합니다. 절대절대. 1막에는 척이 어린 시절 만나는 동네 사람이 많이 나오는데, 어라, 3막에서 이미 다 본 사람들인데 어째 다들 그대로네? 보다보면 의문이 드실거에요. 무슨 비밀이 있기에? 궁금하시죠. 영화를 보시고 확인을. 1막이 끝나면 그제야, 아, 3막이 그래서 그렇구나, 그러니까 이러저러한 말을 하고 싶어서 이렇게 굳이 거꾸로 보여줬구나 아시게 될 건데, 그 순간 마음 한 구석이 찡해지면서 “이거 한 번 더 봐야겠는걸” 싶어지실지도 몰라요.
혹시 “나 영화 봤는데도 모르겠는걸” 하시는 분 계신가요. 그렇다면 3막 리차즈 선생님의 말씀을 떠올려보세요. 3막과 1막에 나오는 월트 휘트먼의 시 ‘나의 노래(Song of Myself)’를 낭독하고 척이 리차즈 선생님께 물어요. “‘나는 거대하며 수많은 것을 품고 있다(I am large, I contain multitudes)’가 무슨 뜻인가요?”
리차즈 선생님이 척의 얼굴을 감싸쥐고 답합니다. “내 손 사이에 뭐가 있지? 네가 보는 모든 것, 네가 아는 모든 것. 세상이야, 척. 하늘의 비행기. 거리의 맨홀 뚜껑. 살아가는 매년 네 머릿속 세상은 더 커지고, 더 밝아지고, 더 세밀해지고, 더 복잡해질거야. 넌 그곳에 도시와 나라와 대륙을 짓고 그곳을 사람들과 얼굴들로 채울 거야. 진짜 얼굴들과 상상한 얼굴들. 알겠니? 거기서 멈추지마. 네가 만난 모두로 그 세상을 채워. 네가 아는 모두로. 네가 상상한 모두로. 그곳은 우주가 될 거야. 내 손 사이에 우주가 있는 거지. 넌 수많은 것을 품고 있어.”
우리 모두는 각자 수많은 것을 품고 있는 우주이며, 그 우주를 즐거움과 행복으로 채우는 것은 각자의 우주인 여러분, 그러니 죽음이 피할 수 없는 사실일지라도, 기다리지 말고, 나가서 춤추라, 즐기라, 대면하라, 삶이 다할 때까지 너의 삶을 살아라. ‘척의 일생’은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직설적으로 쓰니까 재미없죠. 영화는 그래서 대단한 것 같습니다. 직설적인 문장을 은유와 의미와 재미로 풀어주니까요. 올 한해 나는 어떻게 살았나, 내년엔 어떻게 살까, 이런 생각이 드실 요즈음, ‘척의 일생’과 함께 여러분만의 답을 음미해보시길. 저는 다음 레터에서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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