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보영의 정상에서 쓴 편지] 32. 원주 치악산둘레길-한 달에 한 번 모여서 즐겁게 산을 달린다

장보영 2025. 12. 26. 00:08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치악산 해발 1288m 둘레길 길이 140㎞
매달 셋째주 일요일 20여명 함께 달려
등산 전 산 아래서 한달의 노고 다독여
“달리는 것은 끊임없이 멈추는 일” 성찰
11개 코스 중 2코스 구룡계곡길 산행
돌아가야 할 각자의 삶 생각하며 하산

산을 닮은 사람들과 함께 되찾은 투명한 마음

고적한 산책에 가까운 평일 늦은 오후의 산과 다른 분위기의 산이 있습니다. 바로 함께 오르는 주말 아침의 산입니다. 지난해 여름부터 저는 매달 한 달에 한 번씩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같이 산을 달리고 있습니다. 보통 셋째 주 일요일 이른 오전에 만나 달립니다. 어느덧 그날은 서로에게 어엿한 약속처럼 되어버려 이제는 부러 날짜를 정하지 않아도 으레 ‘그때쯤 모일 때가 되겠구나’ 하고 시간을 비워둡니다. 셋째 주 일요일로 정한 이유는 그쯤이 세상의 일로부터 비교적 한산하기 때문입니다.

 함께 달리는 치악산둘레길 2코스 구룡길. 지난해 여름부터 매달 한 달에 한 번씩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같이 산을 달리고 있다

사람들과 함께 달리는 산은 제가 사는 원주의 치악산입니다. 치악산은 해발 1288m의 주봉 비로봉을 비롯해 향로봉과 남대봉과 같은 ‘악’ 소리 나는 천고지 봉우리와 그 산을 에워싸고 있는 총연장 140㎞의 치악산둘레길 등 오르고 달릴 수 있는 길이 정말 많습니다. 어느 달은 향로봉을 오르기도, 또 어느 달은 그 옆 곧은재까지 다녀오기도, 또 어느 달은 치악산둘레길 한두 코스를 달리기도 합니다. 1년 가까이 모여서 달렸는데도 아직 가보지 못한 길이 더 많습니다.

그래도 누구 하나 서두르지 않습니다. 더 많이 달리자고, 더 빨리 달리자고 하는 바람 하나 없이 가보지 않은 길은 가보지 않은 대로, 익숙한 길은 또 반가운 대로 즐겁게 함께 달립니다. 함께 달리는 사람들은 원주 사람이 반, 타지 사람이 반입니다. 다 모여서 스무 명가량 되는 사람들은 20대부터 60대 이상까지 나이대도 다양합니다. 어떠한 성별인지도 이날만큼은 딱히 중요하지 않습니다. 산을 오른 구력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이 되어 달립니다.

지금으로부터 18년 전, 난생처음 제대로 등산이라는 것을 해보기 위해 처음 산악회를 찾은 시절이 떠오릅니다. 75년생부터 85년생까지 가입할 수 있는 인터넷산악회였습니다. 그전까지 산을 오른 경험이 미천해서 신입 회원으로 저를 받아주는 곳이 있다면 감개무량했습니다. 처음 보는 사람들과 호기롭게 무리 지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시절, 오직 지리산이라는 큰 산을 오르기 위해서였습니다. 함께 오르는 사람들이 저마다 그동안 산에서 쌓아온 시간은 저에게 커다란 믿음이었습니다.
여름의 치악산. 이날은 향로봉을 함께 올랐다. 

그리고 18년 후, 저는 그 믿음이 한 번 더 재생되기를 바랐습니다. 함께 산을 오르는 즐거움을 되찾고 싶었습니다. 서로의 시간이 서로에게 힘이 되고 용기가 되는 시간을 찾고 싶었습니다. 함께 달리는 사람들의 소망도 그러하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사람 인(人)’ 자가 산처럼 생긴 것은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사람이 산이고 산이 사람인 것입니다. 편견 없이, 그 어떤 선망이나 책무도 없이 그저 좋아서 하는 투명한 마음이 그리웠습니다. 그 마음은 대체로 기한이 있어 언젠가 흐릿해지고 희미해질 마음이기에 기억하고 싶었습니다.

이번 달은 치악산둘레길 2코스 구룡길을 달립니다. 구룡길은 소초면 흥양리에서 학곡리 치악산국립공원사무소까지 이어지는 약 7㎞ 계곡 숲길입니다. 과거 왼골, 무너미, 새재 등의 이름으로 두루 불린 고갯길이지요. 치악산둘레길 열한 개 코스 중 치악산의 품에 가장 깊이 안기는 길입니다. 옛길인 만큼 이 길은 눈 내리는 겨울이면 대설주의보와 함께 수시로 통제되기 일쑤입니다. 가을철 산불조심기간을 포함해 몇 번을 허탕 친 끝에 이번 겨울에는 비로소 구룡길에 들어섭니다. 산을 오르기 전, 산 아래 호젓한 카페에서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시는 시간은 지난 한 달의 노고를 돌아보며 다독이는 시간입니다. 어쩌면 산을 달리기보다 이 시간을 함께 보내기 위해 이렇게 모이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빠르게 돌아가는 일상을 잠시 붙잡은 자리에서 당신이 어떠한 생활을 하며 살아가는지 듣고, 또 나 자신의 궤적도 돌아봅니다. 때로는 그 일이 달리는 것보다도 중요한 것 같기도 합니다. 우리는 너무 모르는 것이 많은 채로 앞만 보며 살아왔습니다. 달리는 것이 실은 끊임없이 멈추는 일이라는 것을 이제 간신히 알게 됐습니다.
구룡길은 치악산둘레길 중 유일하게 치악산국립공원 관할이다. 

산길이 가파를수록 호흡도 가팔라집니다. 고도가 올라갈수록 심박도 올라갑니다. 조금 전의 여유나 평화는 오간 곳 없이 사라지고 또 한 번 앞만 보고 달립니다. 지칠 때 지치더라도, 그래서 걷거나 멈추더라도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멈췄을 때도 아쉬움이 없을 것입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이만하면 됐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까지 달립니다. 그것은 언제까지 달릴 것이냐는 세간의 물음에 대한 모종의 답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끝도 없고 한계도 없는 도전입니다. 그저 다른 방향의 희망이 있을 뿐입니다.

 치악산둘레길 2코스 구룡길은 소초면 흥양리에서 학곡리 치악산국립공원사무소까지 이어지는 약 7㎞ 계곡 숲길이다

3.5㎞쯤 달리자 높은 언덕 하나가 나오고 이후 이어지는 길은 내리막입니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다는 인생의 영락없는 진실을 산은 우리 눈앞에 보란 듯이 보여줍니다. 지금까지 힘들게 올랐으니 당분간은 그 힘 빼고 가볍게 나아가라고, 엉켜버린 숨도 다시 원하는 대로 쉬고 주변도 돌아보라고. 하지만 달려 내려가는 그 길에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결국에는 이 길을 다시 올라가야 한다는 것을. 내리막이 있다면 언젠가 다시 오르막이 있을 것이라는 진실을 잊지 않는다면 나만의 산에 오래 머물 수 있을 것입니다.

 움츠러들기 쉬운 겨울일수록 함께 달리는 시간이 소중하다.

치악산둘레길 2코스가 끝나는 구룡계곡 부근에서 다시 왔던 길로 되돌아갑니다. 계속 앞으로 가면 3코스가 나타날 테고 어쩌면 구룡사를 거쳐 비로봉까지도 올라갈 수도 있을 테지만 오늘의 길은 여기까지입니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사랑하는 가족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후에는 오후의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잠시 쉬었다가 다시 한 줄로 이어 달리는 저들의 뒷모습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는 한 사람의 미덕을 봅니다. 작가·에디터

#치악산둘레길 #장보영 #사람들 #치악산 #구룡길

Copyright © 강원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