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증샷’ 없이, 몸을 써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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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공동어시장에서 고등어 선별 작업을 하는 박영희(62·가명)씨의 걸음걸이는 언뜻 사뿐사뿐 경쾌해 보인다.
하지만 그가 발끝으로 종종거리며 걷는 것은 무릎이 아파서다.
박영희씨는 쪼그려 앉는 자세가 체중의 9배에 달하는 압력을 무릎에 준다는 걸 몰랐다.
쪼그려 앉아 있던 다리와 구부정하게 숙였던 허리를 펴고, 달아오른 몸을 식히고, 끝없이 반복하던 동작을 잠시 쉬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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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땡큐!]

부산공동어시장에서 고등어 선별 작업을 하는 박영희(62·가명)씨의 걸음걸이는 언뜻 사뿐사뿐 경쾌해 보인다. 하지만 그가 발끝으로 종종거리며 걷는 것은 무릎이 아파서다. 저녁마다 배가 들어와 시장 바닥에 고등어 수만 마리를 쏟아놓고 가면 여성 노동자 500여 명이 바닥에 앉아 고등어를 크기별로 나눠 담는다. 주어진 시간은 밤 9시부터 다음날 새벽 5시. 큰 것은 반찬용으로 납품하고 작은 것은 사료용으로 보내야 하기에 매일 아침 6시 경매가 이뤄지기 전에 선별을 마쳐야 한다. 지금은 작은 목욕탕용 의자에 앉아 작업하지만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모두가 쪼그려 앉아 일했다. 박영희씨는 쪼그려 앉는 자세가 체중의 9배에 달하는 압력을 무릎에 준다는 걸 몰랐다. 매일 밤 450㎏의 무게를 받치고 살아온 무릎은 연골이 닳고 물이 차기도 했다. 5년 전 무릎에서 물 빼는 수술을 한 후로 박영희씨는 발끝으로 걷는 습관이 생겼다.
“안 아프세요?” 물음에 돌아온 대답
배달라이더 안영희(39·가명)씨는 서 있을 때마다 종아리 스트레칭을 한다. 라이더에게 가장 힘든 것은 ‘대기’ 시간. 가게 밖에 서서 음식이 다 될 때까지 기다리는 ‘조리 대기’, 도로 위에서 수시로 찾아오는 ‘신호 대기’. 여름이면 뜨거운 열기가, 겨울이면 살을 에는 한기가 발끝을 타고 온몸으로 퍼지는 시간. 빨간불이 바뀌기만을 애타게 기다리며, 130㎏의 오토바이 무게를 다리로 지탱하고 서 있으면 종아리 근육에 신호가 온다. 오토바이에서 내려 배달 음식을 들고 뛰기 시작하는 순간 종아리가 불타는 것처럼 화끈거린다.
방송사 노동자 김영희가 카메라 뒤에서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안 아프세요?”라는 질문이다. 김영희는 다양한 사람들의 일터에 찾아가 일주일쯤 함께 지내는 생활을 2년째 반복하고 있다. 카메라를 들고 주인공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면 그와 똑같은 자세로 온종일 있게 된다. 한 가지 노동에 익숙한 몸들에 비해 모든 일에 초심자인 김영희의 몸은 조금만 지나도 금방 어딘가 쑤시고 아프다. 아휴, 잠깐만 이렇게 있어도 아픈데, 안 아프세요?
그 질문에 영희씨들은, 한 번도 다른 대답을 한 적이 없다.
아파도 해야죠. 일하면서 안 아픈 사람이 어딨어요.
많은 사람이 일하다 몸이 아픈 걸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일하다 죽은 사람들도 그랬을지 모른다. 몸으로 하는 노동 대부분이 인간의 몸에 부자연스러운 동작의 연속이자 반복이다. 그러니 ‘멈춤’의 시간이 필요하다. 쪼그려 앉아 있던 다리와 구부정하게 숙였던 허리를 펴고, 달아오른 몸을 식히고, 끝없이 반복하던 동작을 잠시 쉬는 시간. 기계도 과열되면 멈추는데, 사람의 몸이 멈추지 못했던 이유는 그래도 된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은 아닐까. 몸이 아파보면, 상상력이 풍부해진다.
‘인증샷’ 없는 노동이 가르쳐줄 것들
아픈 몸들이 훑고 지나간 김영희의 몸은 이제 고등어를 보면 무릎이 아프고 배달 오토바이를 보면 종아리가 시큰거린다. 고작 며칠 자세만 따라 해봤을 뿐인데, 통증은 감정이나 이야기보다 쉽게 잊히지 않는다. 일하다 아프고 다치고 죽은 사람을 위한 법과 제도를 새로 쓰겠다는 사람들이, 말보다 몸을 먼저 써본다면 어떨까. 단, 아무도 모르게 정체를 숨긴 채. 제가 한번 해봤습니다, 하는 ‘인증샷’ 없이.
김영희(필명) 방송작가
□ 칼럼 연재: 노 땡큐!
https://h21.hani.co.kr/arti/COLUMN/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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