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 낚시’ 대처법 [박권일의 다이내믹 도넛]

한겨레 2025. 12. 25.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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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노옥희 울산시교육감이 2022년 3월 아프가니스탄 특별기여자 자녀들의 등굣길을 함께하는 모습은 깊은 인상을 심어줬다. 고 노옥희 교육감 페이스북 갈무리

박권일 | 미디어사회학자

옥스퍼드 사전이 2025년 올해의 단어로 ‘분노 낚시’(rage bait)를 선정했다. 분노 낚시란 ‘도발하거나 불쾌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분노를 의도적으로 유발하는 온라인 콘텐츠’를 가리킨다. ‘클릭 낚시’(click bait)가 수용자의 기대에 못 미친 내용으로 실망을 낳는다면, 분노 낚시는 갈등·분열·무력감을 낳는다는 점에서 사회적으로 훨씬 더 해롭다. 올해의 단어로 분노 낚시가 꼽혔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사람이 디지털 미디어 환경에 극심한 피로감을 느끼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 분노 낚시만이 아니라 ‘혐오 낚시’ ‘연민 낚시’ 등을 포함한 ‘감정 낚시’(emotion bait)가 오늘날 공론장 전체에 과도하다는 걸 부정하는 이는 없다. 즉, 현상 인식은 비슷하다. 관건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다.

이 질문에 나름의 명징한 답변을 제시한 이 중 하나가 정치학자 제이슨 브레넌이다. 그에 따르면 유권자의 절대다수는 무지하고 감정적이다(‘호빗’ ‘훌리건’). 반면 이성적 유권자(‘벌컨’)는 극소수다. 브레넌은 이 상황이 사회를 너무 큰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면서, 대안으로 ‘에피스토크라시’(지식인 통치)를 제안한다. 즉, 식견 높은 시민에게 더 많은 참정권을 주자는 것이다. 문제는 이 방안이 대부분의 나라에서 실현은커녕 공론화조차 불가능해 보인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런 극단 처방을 제시하지 않더라도 여전히 많은 사람은 이성적이기 위해 최대한 감정을 배제해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 이는 브레넌보다는 현실적으로 보이지만, 이성으로 감정을 통제해야 하고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사실상 유사한 관점이다.

철학자 스피노자는 이런 관점이 애당초 무망하다는 걸 17세기에 이미 알고 있었다. 그에게 감정은 인간의 근원적 존재 조건이다. 또한 감정은 이성을 통해 몰아낼 수 없고 오직 감정을 통해서만 극복될 수 있다. 그는 인간이 감정에 예속되어 있지만 그럼에도 이성의 빛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고 믿었다. 어떻게? 감정을 없애는 게 아니라 승화시키는 방식을 통해서다. ‘에티카’에 따르면, 인간은 슬픔·기쁨 같은 수동적 감정을 ‘굳건함’과 ‘관대함’ 같은 능동적 감정으로 변환함으로써 이성에 다가설 수 있다. 비록 “어렵고 드문” 일이지만 말이다.

몇해 전 일이다. 한국에 들어온 아프가니스탄 난민들이 울산에 정착하기로 결정되자 지역 여론은 흉흉해졌다. 우려를 넘어 노골적인 혐오가 소용돌이쳤다. 당시 노옥희 울산시교육감은 여론에 굴복하는 대신 불안해하는 학부모를 일상적으로 만나는 협의체를 만들었다. 현대중공업 노동자와 일부 시민도 아프간 난민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프간 어린이 84명이 울산 서부초등학교로 등교하는 첫날, 노 교육감은 아이들의 손을 잡고 함께 학교로 향했다. 그 사진이 공개되자 놀랍게도 분위기가 극적으로 반전한다. 혐오와 공포에 맞선 포용과 환대의 정서가 사람들을 감동시킨 것이다. 수동적 감정을 능동적 감정으로 극복했다는 점에서, 그야말로 스피노자적인 사건이었다.

감정 낚시가 꼭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다. 권력자의 비밀, 부정, 위선을 밝혀내는 폭로 저널리즘 역시 감정 낚시의 일종이다. 사람들이 크게 관심 가지지 않는 의제, 예컨대 노동자 산재 같은 문제에서 뜻있는 언론인은 보도원칙을 지키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 감정 낚시를 시도하기도 한다.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여러 관점을 대조해보는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태도는 분명 필요하지만, 인간을 결단하게 하고 행동하게 하고 서로 돌보게 만드는 건 결국 감정이다. 게다가 마땅히 공감하거나 공분해야 할 일에 무감각하거나 비용·편익 계산에 골몰한다면 그게 오히려 문제일 것이다.

근대 저널리즘에는 ‘팩트’에 천착하는 좁은 의미의 객관주의 저널리즘만 있지 않았다. 잘 드러나지 않는 약자의 삶에 주목하고 공동체의 상처를 회복하기 위한 감정적 참여의 장을 여는 것도 언론의 중요한 역할이었다. 다시 말해 ‘사실확인자’(fact checker)로서의 저널리즘만이 아니라, ‘감정조정자’(emotion moderator)로서의 저널리즘도 필요하다. 감정 낚시 시대이기에 더더욱, 이런 질문을 던지고 함께 고민해보면 어떨까 한다. ‘감정적 참여는 어떻게 해방과 이성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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