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사태 대비하라”…클린턴, 1994년 1차 북핵 위기 때 일본에 경고

“김일성 주석이 자연사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1994년 7월10일. 고노 요헤이 일본 부총리 겸 외무상의 물음에 안드레이 코지레프 러시아 외무장관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주요 7개국(G7) 정상들이 모여 회의가 한창이던 이틀 전 김일성 북한 주석이 돌연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각국 정상들은 정상회의를 일단 물리치고 기밀 정보 파악에 분주했다.
하루 전 정오 북한 관영 중앙방송과 평양방송은 특별방송을 통해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총비서이시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석이신 김일성 동지께서 8일 새벽 2시 급병으로 서거하셨다”고 공식 발표했다. 당시 북한이 발표한 사인은 동맥경화증으로 치료를 받다가 7월7일 심근경색 쇼크를 받은 게 악화됐다는 것이었다. 부검이 실시됐고, 질병 진단도 완전히 확인됐다. 보름여 뒤 당시 김영삼 대통령과 남북정상회담이 에정됐고, 한반도 전역에는 1차 북핵위기의 어두운 기운이 드려져 있던 시기였다.
당시 영국은 북한 동태와 관련해 “새로운 정부가 있는지”를 물었고, 미국이 “(북한에) 새로운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다”며 “(지난 6월)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방북했을 때 김 주석은 건강해 보였다”고 언급했다. 일본과 프랑스 대표는 각각 “(김 주석) 장례위원회 명부에 있는 서열(아들 김정일 서기가 장례위원장)은 기존 (북한 내) 서열과 일치하며 변화는 보이지 않는다”, “김일성 주석을 단 한번 만난 적이 있는데 그때 아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당시에는 한국 정부도 카터 대통령 면담 때만 해도 건강했던 김 주석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군부 쿠데타’ 등의 정변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하지 않던 상황이었다. 김 주석 사망 직후였던 9일 나폴리에 모여있던 정상들 가운데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호소카와 모리히로 총리를 대신해 회의에 참석한 고노 부총리에게 “(아들인) 김정일 비서가 장례위원장이 돼 북측 내부가 일단 안정된 것으로 보인다”고 언질을 줬다.
유난히 뜨거웠던 그해 전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던 김 주석 사망에 대한 주요국 정상들의 반응은 24일 일본 외무성이 누리집에 공개한 6800쪽 분량 1994년 외교 문서에서 고스란히 확인할 수 있다. 이날 공개된 문서에서는 같은 해 1차 북핵위기 당시 미·일 정상들의 태도도 드러난다.
그해 2월 미국 백악관에서 열린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 호소카와 모리히로 일본 총리의 정상회담에서 북핵 위기 관련 의제가 다뤄졌다. 클린턴 대통령이 긴박한 북한 상황을 호소카와 총리에게 설명해 달라고 요청하자 워런 크리스토퍼 미 국무장관이 이렇게 말한다.
“국제원자력기구(IAEA) 이사회가 (독일) 빈에서 열리면 국제원자력기구(IAEA)와 북한의 협상이 검토될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현재의 신호는 좋지 않다. 북한은 완고한 태도를 바꾸지 않고 국제원자력기구의 보장 조처에 동의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 아직 희망은 있다. 그러나 2월21일 국제원자력기구가 북한에 대한 보장조치의 지속성이 단절되었다고 결정할 가능성도 있으며, 그 경우에 대비해 비상대응책을 마련해 둘 필요가 있다.”
크리스토퍼 장관은 호소카와 총리에게 상황의 심각성을 알리면서 유사시 일본 정부의 협조도 요청한다. 그는 “협상을 통해 이런상황을 고려하지 않아도 되기를 바라지만, 국제원자력기구가 이 문제를 유엔(UN) 안보리에 회부할 경우에 대비해 제재에 이르기까지의 중간적 조치에 대해 논의해 두는 것이 유익하다”며 “제재를 부과하면 일본의 협력이 매우 중요한 만큼 공동의 입장을 마련해 두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아울러 그는 “이런 사태에 이르게 될 가능성은 상당히 있다”고도 언급했다.
1차 북핵위기는 1994년 여름 미국이 북한 영변 핵시설 선제공격 일보 직전까지 갔던 일이다. 앞서 1992년 북한은 국제원자력기구의 임시사찰을 6차례 받았다. 1993년 1월 국제원자력기구는 북한의 보고 내용 중 ‘중대한 불일치’를 지적하며 특별사찰을 요구했다. 하지만 북한이 여기에 거세게 반발해 1993년 3월12일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했다. 미국이 이 상황에 물리적 대응까지 고려하며 1차 북핵 위기가 시작 됐다.
당시 긴박했던 상황에 클린턴 대통령이 호소카와 총리와 정상회담 때 일본까지 국가 비상사태(컨틴전시)에 대비하라는 경고를 건넨 것이다.
이에 대해 호소카와 총리는 북핵 개발 문제에 대해 “북한이 1500km 사거리를 가진 미사일 개발과 발사 실험을 하고 있어 (일본은) 위기감을 갖고 있다”며 “유엔 안보리에서 경제 제재를 실시하는 사태가 발생할 경우, 일본은 당연히 국내법상 가능한 범위 내에서 최대한 책임있는 대응을 할 의사가 있다”고 답했다. 또 그는 한국을 언급하며 “미국, 한국, 중국과 협력해 대처해 나가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때 크리스토퍼 장관은 “우리(미국과 일본)는 공통의 이익을 갖고 있다”며 “한국, 중국과도 협력해 나가고 싶다”며 북한을 둘러싼 주변국 가운데 특히 중국의 태도에 관한 분위기도 전달했다. “중국 쪽은 북한에 대한 압박이나 제재에는 다소 우려를 표했지만 한반도에 핵 존재를 허용하는 것은 단호히 반대한다는 입장이었다. (중국이) 스스로 당장 압박이나 제재를 가해 달라고 요청한 것은 아니지만 현상을 방치하면 북한이 핵 게임을 벌여 지역 전체가 불안정해질 수 있음을 강조했다.” 다만 당시 상황은 다행히 1994년 10월 북-미 제네바 기본합의로 누그러졌다.
또 이번 문서에는 최근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정부가 논란을 일으켰던 핵 보유 관련 움직임과 대만 문제에 대한 역대 일본 정부의 입장을 재확인할 수 있다. 25일 마니이치신문을 보면 1994년 2월 당시 호소카와 일본 총리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 “생각할 수 있는 미래에 일본의 핵보유는 있을 수 없다”고 미국 상원 중진에게 말한 대목이 외교 문서에 기록돼 있다. 그는 일본의 ‘비핵 3원칙’(핵무기를 보유하지도, 만들지도, 반입하지도 않는다)에 대한 질문을 받고 “일본은 세계 유일의 피폭국으로서 반핵 감정과 핵에 대한 거부감이 극히 강하다”면서 “정부가 비핵 3원칙을 고수하고 있다”고 강조한 것으로 나타난다.
반면 다카이치 정부는 출범 직후부터 ‘비핵 3원칙’ 재검토 뜻을 드러내고 있고, 최근 총리 관저 안보 담당자가 “북한 등 일본 주변국이 핵무기를 여럿 보유했는데, 결국 우리 나라를 지키는 것은 우리 나라”라며 “핵무기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한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면 파문이 일었다.
다카이치 총리의 ‘대만 유사시 자위대 개입 가능성’ 취지의 발언과 관련해서도 되돌아볼 만한 기록이 있다.
호소카와 총리는 같은해 3월 취임 뒤 첫 중국 방문을 앞두고, 중·일 협력에 각별한 공을 들여왔다. 일본 외무성은 호소카와 총리 방중에 대비한 문서에서 리펑 총리와 면담 때 ①대만 문제 ②과거사 ③오키나와현 센카쿠 열도 등 세 가지 문제를 유념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 세가지는 “대응 여하에 따라 일·중 관계를 정치적으로 불안정하게 만들 수 있는 잠재적 요인”으로 특별히 강조했다. 특히 대만 문제는 “한 걸음만 잘못 나가도 일·중 관계 근간을 흔들 수 있는 민감한 문제”로 규정한 뒤 ‘지속적으로 신중한 대응’을 당부했다. 실제 당시 정상급 회담에서 리펑 중국 총리는 “대만과 관계는 어디까지나 중·일 국교정상화 때 표명한 기본적 입장에 기초해 처리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호소카와 총리도 “일·중 공동성명을 준수하는 일본 정부 입장은 불변”이라며 “일·중 관계를 우리 나라 외교의 가장 중요한 기둥 중 하나로 중시하고 있다”고 답했다. 일본 정부는 지난 1972년 중국과 국교를 정상화하며 ‘중국을 유일한 합법 정부로 인정하고, 대만이 중국 영토의 일부임을 공식적으로 이해·존중한다’는 공동성명에 서명한 바 있다. 하지만 현직인 다카이치 총리는 지난달 7일 국회 대정부 질문 과정에 대만 유사시와 관련해 “중국이 전함을 동원한 무력행사를 수반하면 어떻게 보더라도 일본의 ‘존립 위기 사태’”라고 말해 한달 넘게 중국과 심각한 갈등을 빚고 있다. 중국은 대만 문제를 ‘핵심 이익 중의 핵심’인 영토문제로 보는데, 다카이치 총리의 발언이 대만 관련된 문제로 자위대의 개입 가능성을 언급한 것이기 때문이다.
도쿄/홍석재 특파원
forchi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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