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스토리] 지역시민을 무대위 주인공으로…안석환 배우의 아주 특별한 연기 수업

이세영 2025. 12. 24.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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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연합뉴스) 이세영 기자 = 이른 새벽, 아직 어둠이 채 걷히지 않은 시간에 배우 안석환(65)은 차에 올랐다.

"멀리 가는 날은 아직도 설렌다."

그는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한 얼굴이었다. 목적지는 서울이 아닌 지역이었다. 옥천과 무주를 지나, 바다의 도시 목포로 이어지는 길 위에서 안석환은 '시민 연극'이라는 이름의 여정을 이어가고 있었다. 제작진은 배우 안석환의 지역 순회 여정에 동행했다.

30여년간 무대를 지켜온 중견 배우지만, 그가 향하는 곳에는 조명도, 객석도, 박수도 미리 준비돼 있지 않았다. 대신 연극을 처음 접하는 아이들, 교실에서 무대를 꿈꿨던 학생들, 그리고 일상에서 연기를 배우는 시민이 기다린다. 그동안 해온 연극을 서울이 아닌 지역에서 나누고자 떠나는 여행길이다. 그는 연기 지도뿐 아니라 작품의 선정과 기획, 연출 역할까지 도맡아 하며 매주 지역으로 떠나고 있었다.

안석환은 "연극으로 먹고 살 수는 없어도, 연극을 누릴 수는 있다"며 "문화가 서울에만 몰린 현실에서 지역의 갈증을 조금이라도 채워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충북 옥천에서는 EBS '한글용사 아이야'의 할아버지로 아이들과 만났다. 방송 속 인물이 눈앞에 나타나자 아이들은 거리낌 없이 다가왔고, 안석환은 자연스럽게 연극과 이야기의 세계로 이끌었다. 그는 "어린 관객이 이렇게 많이 보고 있다는 사실이 배우로서 큰 책임이자 기쁨"이라고 말했다.

전북 무주에서는 학생들과 함께한 연극 수업이 이어졌다. 무주산골영화제를 계기로 시작된 연극 '우리 무주'는 3개월 동안 학생·교사·배우가 함께 만든 작품이다. '우리 무주'는 체호프의 연극 '우리 읍내'를 한국식으로 개작한 작품이다.

안석환은 특히 '말의 맛'을 연극에 담고자 했다. 그가 추구하는 스타일은 우리 지역 방언 그대로가 담겨있는 날 것의 생생한 연극이다. 일찍이 '뿌리깊은 나무'의 발행인 한창기가 전국 방방곡곡에 사는 평범한 사람들의 전기를 구술로 펴냈던 '민중어사전'의 연극판 프로젝트인 셈이다.

안석환은 "우리나라 문화가 너무 중앙집권제 같은 느낌이 있어서 지역 문화가 모두 서울을 따라가야 하느냐는 반대"라며 "지역의 문화는 지역 자체로 살아남아야 하고 그것의 기초는 언어일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언어가 사라지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좋지 않다고 생각하고 특히 제주도 경우에는 유네스코에도 등재됐는데 쓰질 않아 그렇게 됐다"며 "통용화되지 않기 때문에 사라지지 말라고 한 조치인데 그걸 자랑스러워하면 안 되고 계속 써야 한다"고 덧붙였다.

학생들을 인솔한 서정원 무주고 국어 교사는 "연극만큼 아이들의 표정이 살아나는 수업은 드물다"며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한 교육을 현장에서 직접 봤다"고 말했다. 안석환은 "연극은 성적을 매길 수 없는 수업"이라며 "삶을 연습하는 시간이 된다"고 덧붙였다. 참여한 학생들의 눈빛에서 예술적 체험 이상의 '앎'의 기쁨이 묻어났다.

무주에서는 연극 수업뿐 아니라 지역민과의 인연도 깊어졌다. 산책길에서, 포도밭에서, 주민들과 나눈 짧은 대화 속에서 그는 "경치도 좋지만, 사람이 더 좋은 곳"이라며 웃었다.

여러 주민은 "학생들을 위해 재능을 나눠줘 고맙다"고 했고, 안석환은 "관광 온 것"이라며 겸손하게 답했지만, 이 여정이 그저 관광성 방문이 아니라는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여정의 끝은 목포였다. 바다 냄새가 스며든 도시에서 그는 시민들과 가장 오랜 시간을 보냈다. 목포 KR갤러리에서 진행된 시민연극교실은 약 두 달간 이어졌고, 참여자 대부분은 연극 경험이 전혀 없는 일반 시민들이었다. 직업도, 나이도 달랐지만 '무대에 서보고 싶다'는 마음만은 같았다.

프로그램을 운영한 전대상 KR갤러리 부관장은 "시민이 직접 문화예술의 주체가 되는 과정 자체가 문화도시 목포가 지향하는 핵심 가치"라며 "앞으로도 생활문화와 전문예술이 조화를 이루는 프로그램을 이어가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제작진이 도착한 날은 그동안 연습한 작품의 발표회를 앞둔 시간이었다. 목포시 지원으로 시작된 시민연극교실은 안석환이 2개월 동안 직접 연기 지도를 맡아온 프로그램이다. 매주 연습실에서 시민 배우들과 호흡을 맞추며, 그는 '어떻게 하면 목포의 언어로, 목포스럽게 연극을 만들 수 있을까'를 가장 많이 고민했다고 했다.

발표회 날, 시민 배우들은 새벽부터 긴장 속에 대사를 되뇌었다.

안석환은 무대에 오르기 전 "잘 놀면 좋겠다"고 말했다. 결과보다 경험을 중시해온 그의 연극 철학을 보여줬다. 무대에 오른 작품은 이오네스코의 '대머리 여가수'다. 시민 배우들은 대사를 스스로 다듬으며, 자신의 일상과 언어를 무대 위에 올렸다.

안석환은 관객 앞에서 "이 작품은 시민 배우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연극"이라며 "저보다도 이분들이 목포의 언어를 더 잘 안다"고 말했다.

객석을 가득 채운 관객의 웃음과 박수 속에서, 시민 배우들은 잠시나마 인생의 주인공이 됐다. 연습실에는 긴장과 설렘이 교차했다. 시민 배우 곽병희 씨는 "처음엔 대사 한 줄 말하는 것도 너무 떨렸다"며 "이 나이에 무대에 설 수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고 말했다. 나지애 씨는 "연극을 하면서 제 안에 이런 감정이 있었나 싶었다"며 "집에 가서도 계속 대사를 중얼거릴 정도로 몰입했다"고 웃었다.

안석환은 연습 과정에서 '가르친다'기보다 '같이 만든다'는 방식을 택했다. 그는 "제가 정답을 주는 순간 시민 연극은 힘을 잃는다"며 "이분들이 살아온 언어와 몸짓이 곧 연극의 재료"라고 강조했다. 실제로 대본은 연습 과정에서 시민들의 말투와 리듬에 맞게 자연스럽게 바뀌었다.

무안에서 참여한 기상돈 씨는 "연극을 하며 일상의 대화가 얼마나 무의미하게 흘러가는지 처음 느꼈다"며 "끝나고 나니 사람을 대하는 태도부터 달라졌다"고 말했다.

무대가 끝난 뒤, 시민 배우 임사랑 양은 눈시울을 붉히며 "무대에 서는 순간 '내가 살아 있구나'라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조연수 씨는 "연극이 끝나니 허전하면서도 이상하게 용기가 생겼다"며 "이제는 무슨 일이든 한 번 해볼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안석환은 무대 인사를 마치며 시민 배우들에게 "잘하려고 애쓰지 말고, 잘 놀아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그는 "연극은 잘하는 사람이 하는 게 아니라, 용기 내는 사람이 하는 것"이라며 "오늘 이 무대는 제가 아니라 여러분의 무대"라고 강조했다.

행사를 마친 뒤 그는 조용히 객석을 바라보며 "지난 두 달이 한꺼번에 떠올랐다"며 "연극이 사람을 이렇게 바꿀 수 있다는 걸 다시 확인한 시간"이라고 말했다. 시민 배우들은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가지만, 무대에 섰던 경험은 오래 남을 흔적이 된다.

제작진은 안석환의 여정에서 그가 화려한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대신 분명한 장면은 남겼다. 연극은 무대 위의 예술이기 전에, 사람을 만나는 일이라는 것이다. 또한, 서울이 아닌 곳에서도, 전문 배우가 아닌 시민과 함께, 충분히 깊고 진한 연극이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다시 길 위에 오른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다들 자기 역할을 한 번쯤은 제대로 해봤으면 좋겠어요."

*자세한 내용은 영상을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진행·내레이션 : 유세진, 구성 : 민지애, 영상 : 박소라, 취재협조 : KR갤러리, 무주군청, 옥천군청, 연출 : 김현주> sev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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