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야 산다, 시코쿠 순례길 전초전 [독자산행기]

"여보, 짐이 너무 무겁잖아, 용봉사까지 태워 줄까?"
"괜찮아, 제대로 걸어야 하잖아요. 반나절만 걸으면 익숙해지 니 걱정하지 마세요."
12월 24일부터 일본 시코쿠 순례길을 걸으려 한다. 총 1,200km 되는 거리를 매일 야영하며 걸을 생각이다. 도전에 대 한 전초전으로 동서트레일 9~12구간을 걸어보기로 했다. 약 53km 의 장거리 훈련이다.
'내포문화숲길 내포역사인물길' 1코스이자 동서 트레일 9구간 시작점인 충의사 앞에서 아내는 내 짐의 무게를 염려하며 무거운 표정으로 한마디 한다. 65리터 배낭엔 꽉 찬 짐들로 옆구리가 터 질 듯하다. 배낭 무게가 18kg 에 카메라까지 합치니 20kg. 왜소한 체구에 비해 큼지막한 돌덩이 하나 얹힌 형국이다. 아내 표정이 어두울 수밖에.
하지만 내가 누군가. 2021 년 미국 태평양 연안을 따라 이어진 PCTPacificCrest Trail 를 완주하지 않았던가. 무거운 짐을 지더 라도 걷다 보면 어느 순간 몸이 가벼워지고 발걸음은 경쾌해진다. 그 경험을 되살리면 이번 코스를 운행하는 데 나를 막을 큰 벽은 없으리라 자신만만해 했다.
하지만 웬걸, 수암산 자락 임도를 걸으면서 내 강한 다짐은 슬 그머니 꼬리를 말았다. 뫼넘이 고개를 오를 때부턴 그나마 남은 꼬리조차 감추어버렸다. 배낭은 어깨를 인정사정없이 짓눌렀다. 산길 경사는 제법 탄탄한 내 허벅지와 종아리를 모래사막 개미귀 신이 잡아끌 듯 아래로 당겨 내렸다. 반나절은커녕 2시간도 채 되 지 않아 그만 기력을 잃고 말았다.

그래도 반드시 해내겠다는 의지와 끈기가 더 강했는지 불씨만 남았던 기력에 불을 지필 수 있었다. 그 화력의 힘으로 용봉산 전 망대까지 올랐고, 내리막을 거쳐 용봉사에 닿았다. 절 주변엔, 단 풍나무가 마지막인 양 제 몸을 불사르듯 진한 색감들을 맘껏 발 산하고 있었다. 만추의 계절에 보는 황홀한 붉은 향연이었다.
10구간인 홍북문화마을에서 백월산을 오르는 길과 살포쟁이 고개까지의 내리막길은 난이도 '상'의 험한 길이다. 무거운 짐으로 발걸음은 몹시 더뎠다. 심한 경사는 산행을 이중으로 고되게 만 들었다. 자칫 넘어지기라도 한다면 크게 다칠 수 있다. 내리막 구 간은 특히 경사가 가파르고 안전장치가 없어 신중하게 발을 옮겨 야 한다.
동양의 산티아고, 시코쿠 순례길
시코쿠 순례길은 '동양의 산티아고길'이라 불린다. 1,000km 가 넘는 긴 여정이다. 꼼꼼하고 촘촘하게 준비를 하지 않으면 낭패를 당할 수 있다. 이번 트레일 목적은 장거리를 걸으며 꼭 필요한 장 비가 뭔지, 뺄 수 있는 물건이 있을지 최종 점검을 하는 것이다. 걸 으며 생길 수 있는 문제를 미리 파악하고 이에 대처하기 위한 실 전 연습이라고나 할까.
순례길을 따라 88개의 절이 이어진다. 일본 불교의 초석을 다 진 코보 대사의 숨결이 남아 있다고 믿는 이들이 이 절들을 따라 순례를 한다. 나 또한 이 길을 따라 발걸음을 옮긴다. 비록 불교도 는 아니지만 평범한 60대 한 사람으로서 코보 대사의 흔적을 좆 아 그의 행적을 둘러보려 한다. 그가 이 순례길을 걸으며 찾으려 한 구도 求道는 과연 무엇이었을지 생각하며.
11구간을 걷다 보니 체력이 거의 소진됐다. 짓눌린 어깨는 거의 1인치쯤 내려앉았다. 넙다리네갈래근과 넙다리두갈래근이 힘을 다했는지 피로가 쌓인다. 무게를 줄이고자 물 1리터를 버렸지만 효과가 없다. 종아리도 자꾸 떼를 쓴다.
'이제 그만 멈추라'고, '에너지가 고갈됐으니 여기서 쉬어야 한 다'고, '그러니 주인이지만 네 마음대로 가지 말라'고.
척괴마을과 매현마을 사이 한적한 논둑길 옆에 텐트를 치고는 누워 다리를 뻗으며 스트레칭을 한다.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온다. 29km 를 걸었으니 오죽했으랴. 등짝과 배가 맞붙어 꼬르륵 소리 조차 나질 않는다. 얼른 먹고 눕는 수밖에. 일찍 잠에 드니 생각보 다 밤이 길다.
11구간은 홍성센터에서 오서산 상담마을까지 가는 15,5km 거 리. 이 길 역시 내포역사인물길 3코스와 겹친다. 길은 오서산 허 리쯤을 에둘러 간다. 상담마을에서 시작해 대현 1구 마을회관까지 가는 이 길은 내포문화숲길 백제부흥군길 1코스와 겹친다. 구불 구불 울퉁불퉁하다.
코앞에서 소년쯤 되는 고라니가 계곡 아래로 쏜살같이 튄다.
아프리카 초원에서 사자를 피해 도망가는 가젤처럼 녀석은 혼신 의 힘으로 달아난다. 3초가 채 지나기도 전에 고라니는 가뭇없이 사라졌다. 괜히 안쓰러워 혼잣말을 한다.
"나는 사자가 아니고 표범도 아니며 하이에나는 더더욱 아니니 고라니야, 가던 대로 길을 잡고 천천히 움직여도 돼."

버려야 산다, 줄여야 걸을 수 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잎들이 속절없이 흐느적거리며 대지에 내려앉 는다. 한 해 잘 살았다며 이제 내년에 나올 새싹을 위해 자기 자리 를 물려줘야 함을 숙명으로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낙엽들. 이즈음 나무와 잎은 해마다 이별과 새로운 만남을 순환한다. 잎을 다 떨 군 나무들은 나목이 되지만, 다가올 따뜻한 봄을 지혜롭게 준비 한다. 월리엄 칼로스 윌리암스가 노래한 '겨울나무들'이란 시가 떠 오른다.
차려입고 벗어던지는 /그 모든 복잡하고 세세한 //일들이 이제 끝났다! //일렁이는 달이 //긴 가지들 사이로
//부드럽게 움직인다. //슬기로운 나무들은 //늘 그렇듯 꽃눈을 준비해 //반드시 오는 겨울에 대비하고 //
추위 속에 선 채 잠들어 있다.
드디어 장곡면 대현 1구 마을회관에 닿았다. 12월 1일 오후 3시 27분. 총 52.8km 를 걸었다. 1박2일간 총 17시간 28분이 걸렸다. 몸은 천근만근 깊이 까라졌지만 마음만은 해냈다는 성취감으로 가득하다. 트레일과 숲길을 동시에 걸었다. 국토의 소중함, 자연 의 넉넉함과 그 한없는 포용력, 나아가 인간과 숲길의 불가분성을 어렴풋하게나마 알게 된 시간이었다.
한편, 과하게 짐을 지고 걷다 보니 나를 옥죄는 욕심들이 똬리 를 틀 듯 몸뚱이에 여전히 끈질기게 달라붙어 있음을 느꼈다. 불 필요한 옷가지, 먹지 않아도 될 음식들, 소용이 닿지 않을 산행 장 비, 게다가 내 가슴에 뒤섞인 변덕스럽고도 들쭉날쭉한 마음가 짐. '버려야 산다', '줄여야 걸을 수 있다'. 이참에 내가 얻은 소득이 자 이번 운행에서 거둔 알찬 열매다. 다시 한 번 되뇐다. '버려야 내가 산다.'
월간산 1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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