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지만 오늘도 달립니다 [플랫][퇴근 후, 만나요]

플랫팀 기자 2025. 12. 24.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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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 후는 온전히 나를 위한 회복의 시간입니다. 일상에 지쳐 쉬는 방법을 잊은 당신에게, 경향신문 여성 기자들이 퇴근 후 시간과 주말의 일상을 공유하는 [퇴근 후, 만나요]를 연재합니다. 누군가의 사소한 일상이 영감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퇴근 후, 만나요] 느리지만 오늘도 달립니다

달리기를 왜 하냐는 질문을 받으면 떠오르는 감정과 장면들이 있다. 공기를 가를 때 느껴지는 바람, 갑자기 가벼워진 다리가 배경음악과 딱 맞아들 때의 느낌, 반대로 숨이 턱끝까지 차오르고 내 몸에 폐와 심장과 다리만 남아있는 것 같을 때의 기분, 그래서 달리고 있는 순간만큼은 불안도 걱정도 잠시나마 잊혀진다는 것, 차가운 겨울밤 땀에 흠뻑 젖은 채 스마트워치 종료 버튼을 누를 때, 난생 처음 하프마라톤 출발선에 섰을 때의 벅차오름, 달리다가 마주했던 무수한 일출들, 반환점에서 돌아섰는데 보름달이 구름에서 빠져나오고 첫눈이 흩날리기 시작했던 어느 날 밤, 아무도 일어나지 않은 아침 여행지에서 낯선 길을 달리던 시간들, 회사도 가족도 친구도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 토요일 새벽을 온전히 혼자서 달리면서 보낸다는 것.

좋아하는 러닝코스 중 하나인 남산 북측순환로.

달리기를 시작한 건 살을 빼기 위해서였다. 코로나와 신생아 육아로 오갈 데 없었던 2021년 여름, 아기가 매일 오전 5시면 깨워주었고 마침 뛸 만한 천변이 집 근처에 있었다. 러닝이 유행을 타기 전의 새벽 주로는 정말 한적했다. 30분 정도 걷고 뛰고를 반복하다 돌아오면 하루를 보낼 힘이 생겼다. 그 해 겨울쯤 5㎞를 쉬지 않게 뛸 수 있게 됐고 이듬해 가을에는 10㎞ 대회에 처음으로 나갔다.

무엇보다도 달리기는 정직해서 좋았다. 여전히 보잘 것 없는 실력이지만 달릴수록 조금씩 늘어나는 것이 체감됐다. 처음에는 고작 1㎞도 뛸 수 없었는데 지금은 20㎞ 넘게 쉬지 않고 달릴 수 있다. 아직도 10㎞를 간신히 1시간 안에 들어오는 느림보 러너지만 어제의 나를 오늘의 내가 이기는 경험을 쌓아가는 일이 좋다. 이제는 살 빼려고 달리는 게 아니라 잘 달리려고 체중을 줄이고, 건강하려고 뛰는 게 아니라 대회에 나가야 해서 건강을 챙긴다. 뭔가 조금 잘못된 것 같긴 하다.

러닝 기록을 인스타그램에 올리기 시작하자 고등학교 동창들이 기겁했다. 나는 체육을 정말 못하고 싫어하는 아이였다. 수많은 ‘모범생 여자아이’들 처럼 나는 운동하기를 권유받거나 요구받지 않은 채 사회화되었다. 자연스럽게 고등학교 졸업 후 운동과는 담을 쌓고 살았다. 운동은 ‘다이어트 목적’이라고만 여겼고, 어떤 종목을 취미로 삼는 것은 남의 일이라고만 생각했다. 삼십대 후반이 되어 주말 아침에 늦잠 대신 달리기를 자발적으로 선택하게 될 줄은, 옷장이 운동복으로 꽉 차게 될 줄은, 훈련할 시간이 부족하다며 퇴근을 뛰어서 하는 사람이 될 줄은(회사에 제가 매일 뛰어다닌다고 소문이 났던데 그 정도는 아닙니다…), 콘서트 티켓팅 대신 마라톤 대회 티켓팅을 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첫 하프마라톤을 준비하던 지난 3월의 어느 날 밤.

그리고 종종 아쉽다. 지금 달리면서 느끼는 기분과 감각을 미리 알았으면 더 좋았을 텐데. 그럼 지금 좀 더 빨랐을 텐데. 하지만 원래 달리기는 중장년 운동으로 알려져 있었던 종목이니 아직 시간은 많다고 생각한다. 어제는 내년 4월 열리는 서울하프마라톤 접수에 성공했다. 남들보다 느리지만 괜찮다. 지난 가을의 나보다는 내년 봄의 내가 더 빠르겠지 뭐.

거북이.

플랫팀 기자. 러닝크루 거부형 ISTP

플랫팀 기자 flat@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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