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환의 과학세상] 전기요금 폭탄에 무너지는 제조업과 AI

중국발 공급 과잉, 미국산 셰일 가스, 탄소중립의 삼중고에 시달리던 석유화학 16개 사가 자율적으로 343만톤의 에틸렌 생산을 감축하겠다는 사업 재편안을 정부에 제출한 모양이다.
이제 공은 산업부로 넘어갔다. 산업부가 승인 여부를 심의해서 금융·세제·연구개발·규제완화 등의 지원패키지를 마련해서 사업재편안의 이행을 뒷받침할 계획이다.
한편 석유화학 업계는 과도한 전기요금 부담을 줄여달라는 절박한 요구도 계속하고 있다. 지난 3년 동안의 살인적인 산업용 전기요금 인상으로 원가의 2.5%에서 5% 이상을 차지하는 전기요금으로는 남겨진 시설의 경쟁력을 확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실 과중한 전기요금은 석유화학 업계만의 문제가 아니다.
● 제조업을 위협하는 전기요금 폭탄
실제로 지난 3년 동안 73%나 치솟은 산업용 전기요금이 모든 제조업을 고사(枯死) 위기로 내몰고 있다. 산업용 전기요금이 kWh당 179.23원으로 공급 비용이 훨씬 더 많이 들고 소비량도 적은 주택용 155.52원보다 15%나 더 비싸다. 전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해괴망측한 비정상이다. 심지어 미국의 산업용 전기요금보다 절반이나 더 높은 수준이다.
전적으로 전기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철강업계의 사정이 가장 심각하다. 24시간 연속 가동하던 철강공장의 가동률이 50% 수준으로 줄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공장을 돌릴수록 적자가 늘어나는 형편이라고 한다.
심지어 고효율의 아크 전기로를 도입한 공장도 살인적인 수준으로 치솟아버린 전기요금을 견뎌내지 못하고 있다. 철강 생산량을 줄이는데도 전기요금을 더 많이 내야하는 상황까지 벌어지고 있다.
실제로 동국제강 인천공장의 경우 생산량은 2021년 216만톤에서 지난해 150만톤으로 30.5%나 줄였지만 전기요금은 1251억원에서 1579억원으로 오히려 26.2%나 늘어났다. 제조원가에서 전기요금이 차지하는 비중도 7%에서 14%로 높아졌다.
제조업의 허리에 해당하는 ‘뿌리 산업’도 휘청이고 있다. 1995년에 출범한 시화염색단지에 입주한 염색업체들은 원가에서 전기요금을 비롯한 공과금의 비중이 40%까지 치솟으면서 상당한 물량을 중국에 빼앗기고 있는 형편이다.
전기요금 부담을 감당하지 못하고 생산설비를 우즈베키스탄·말레이시아·폴란드로 옮기는 기업도 있고 능률 저하·안전사고 위험·야간수당의 부담을 감수하더라도 심야 조업을 강행하는 기업도 늘어나고 있다.
인공지능(AI) 3대 강국을 위해 100조원을 투자하고 반도체 2대 강국을 위해 700조원을 투입하겠다는 단군 이래 최대의 국정과제도 비싼 전기요금에 흔들리고 있다.
네이버·카카오·KT 등 빅3 IT기업의 데이터센터 가동에 사용한 전력은 지난 5년 사이에 75%가 증가했는데 전기요금은 156%나 폭등했다.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와 앞으로 들어서게 될 데이터센터가 과연 살인적인 전기요금을 견뎌낼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심지어 대학의 연구실도 전기요금 폭탄에 무너지고 있다. AI대학원을 운영하는 서울대는 지난 4년 동안 전기 사용량은 13% 늘어났는데 전기요금은 62%나 늘어났다. 교육용 전기요금이 38%나 오른 탓이다.
지난 17년 동안의 등록금 동결로 재정 상태가 극도로 악화한 사립대의 경우에는 상황이 더욱 나쁠 수밖에 없다. 결국 교수가 개인 연구비로 전기요금을 내는 대신 연구의 규모를 줄여야 하는 황당한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다.
● 진퇴양난의 틀에 갇혀버린 정부
정부가 내년도 1분기 전기요금이 현재 수준으로 동결하기로 결정했다. 다만 연료비 조정단가는 현재와 같은 kWh(킬로와트시)당 5원으로 유지한다. 총부채가 205조원에 이르는 한전의 재무 상황과 연료비 조정요금 미조정액을 고려한 결정이라고 한다.
가정용 전기요금은 2022년 3분기 이후 15분기 연속 동결한다. 한전의 부채를 개선하려면 전기요금 인상이 필요하지만 내년 6월 지방선거를 앞둔 상황에서 정부·여당이 정치적으로 꼼짝할 수 없는 진퇴양난의 틀에 갇혀버린 것이다.
지난 3년 동안 산업용 전기요금의 급격하고 과도한 인상은 문재인 정부의 정책 실패 비용을 떠안았기 때문이다. 발전단가가 가장 낮은 원전과 석탄 화력은 무작정 퇴출시켰던 문재인 정부의 망국적인 탈원전이 문제였다.
막대한 비용을 들여 멀쩡하게 정비한 월성 1호기의 경제성을 조작해서 영구 정지시켜 버리는 일도 서슴치 않았다. 그 대신 단가가 원전보다 2~3배나 더 비싼 LNG와 재생에너지를 무작정 확대해 버렸다. 탄소중립을 앞세운 탈원전·탈석탄이 한전을 부채의 늪으로 밀어 넣어 버린 직접적인 원인이었던 것이다.
지난 정부의 포퓰리즘도 한몫했다. 문재인 정부로부터 떠안은 탈원전 비용을 몽땅 산업용 전기요금에 떠넘겨 버렸다. 가정용 전기요금 인상에 대한 국민적 반발을 회피하기 위한 꼼수가 뒤늦게 제조업과 인공지능을 위협하는 원인으로 작용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산업용 전기요금을 기업주가 개인적으로 부담하지 않는다. 오히려 기업의 전기요금은 고스란히 제품의 원가에 반영되어 소비자의 부담으로 돌아가고 결과적으로는 기업의 경쟁력을 깎아 먹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기업이 전기를 물 쓰듯 펑펑 ‘낭비’하고 있다는 일부 언론의 지적도 비현실적인 억지다. 제품 원가의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전기를 함부로 낭비하는 기업은 절대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일부 기업이 시도하고 있는 한전으로부터의 ‘독립’도 합리적인 대안이 될 수 없다. 전력 생산에 대한 전문성이 떨어지는 기업이 스스로 전기를 생산해서 쓰겠다는 시도는 낭비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맹목적인 탈원전과 무책임한 포퓰리즘이 국가적 낭비로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자칫하면 한전을 중심으로 구축해 놓은 전력산업이 통째로 무너질 수도 있다.
● 태양광·풍력의 과속을 경계해야
기후환경에너지부가 현재 34GW인 재생에너지 설비를 2030년까지 100GW로 늘이겠다고 밝혔다. 앞으로 5년 동안 매년 13GW의 태양광·풍력 설비를 설치하겠다는 뜻이다. 현재 0.35GW에 지나지 않은 해상 풍력을 2035년까지 25GW로 확대하겠다는 계획도 밝혔다.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 들어있던 신규원전과 소형모듈원자로(SMR)는 어물쩍 미뤄버렸다.
태양광·풍력의 저효율에 대한 깊은 고민이 필요하다. 실제로 100GW의 태양광·풍력 설비로 생산할 수 있는 전력은 최대 20GW에도 미치지 못하는 현실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태양광·풍력의 고비용도 무시할 수 없다.
지난 17일 기후부의 대통령 업무보고에서 “세월이 지나도 비싸다는 건데 왜 해상 풍력에 매달려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는 이재명 대통령의 지적은 일반 상식이다.
모든 것이 기후부의 계획대로 이루어지더라도 “2030년 해상 풍력의 발전단가는 kWh당 250원이고 태양광은 100원이 된다”는 사실을 국민에게 정확하게 알려줘야 한다. 아무리 좋은 떡이라도 경제적으로 감당할 수 없으면 포기할 수밖에 없다.
태양광·풍력 설비만 갖추면 전기가 펑펑 쏟아지는 것도 아니다. 오지(奧地)나 바다의 재생에너지 설비를 국가송전망에 연결하려면 거미줄 같은 송전망이 필요하다. ‘서해안 에너지 고속도로’로 연결되는 거미줄 같은 ‘국도’와 ‘지방도’도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미 2만 개를 넘어선 재생에너지 설비의 실시간 관리도 현재의 기술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실제로 태양광·풍력에서 생산되는 전기는 한전의 통계에도 잡히지 않는 형편이다. 지난 5월 스페인에서 발생한 것과 같은 블랙아웃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뜻이다.
온실가스 배출량 감축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가장 확실한 ‘무탄소 전원’인 원전은 “국민의 공론화 결과를 보고 결정하겠다”는 기후부의 어설픈 ‘탈원전 시즌 2’를 서둘러 정리를 해야 한다.
오늘날 가장 안정적이고 경제적인 전력 생산 기술이 원전이라는 사실은 아무도 거부할 수 없는 진실이다. 우리가 위험해서 포기하는 원전을 다른 나라에 수출하겠다는 시도는 비현실적일 뿐만 아니라 윤리적으로도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다.
※필자 소개
이덕환 서강대 명예교수(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 2012년 대한화학회 회장을 역임하고 과학기술, 교육, 에너지, 환경, 보건위생 등 사회 문제에 관한 칼럼과 논문 3200여 편을 발표했다. 《같기도 하고, 아니 같기도 하고》 《거의 모든 것의 역사》《우리 몸을 만드는 원자의 역사》《질병의 연금술》《지금 과학》을 번역했고 주요 저서로 《이덕환의 과학세상》이 있다.
[이덕환 서강대학교 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 명예교수 duckhwan@sogang.ac.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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