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증적 증거 없는 ‘상상속 역사’ …오히려 일제 역사관과 맥 닿기도[Who, What, Why]

신재우 기자 2025. 12. 24.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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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hat - ‘환단고기’와 ‘환빠’ 논쟁
1979년 이유립에 의해 첫 출간
“1911년 도인이 전수해줘” 주장
기원전 7000년 ‘환국’ 고대문명
광활한 영토 다스린 ‘환인’ 서사
16세기 이후에 쓴 지명 등장해
‘고대사료 없는 가짜역사’ 판단
유신정권, 민족주의 고취에 악용
이후 일부 정치가들 물의 빚기도
서울 시내의 한 대형서점에 진열된 ‘환단고기’. 책은 기원전 7000년 남북 5만 리, 동서 2만 리에 달하는 대제국 ‘환국’이 고조선 이전에 한반도에 존재했던 최초의 문명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주류학계에서는 이를 터무니없다고 판단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12일 세종시 정부세종컨벤센터에서 열린 교육부 업무보고에서 난데없이 ‘환단고기’(桓檀古記)라는 표현이 등장했다. 이날 열린 교육부 업무보고에 참석한 이재명 대통령이 박지향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에게 질문을 던지면서다. 이 대통령은 “역사 교육 관련해서, 무슨 ‘환빠’ 논쟁이 있지 않으냐. 단군, 환단고기를 주장하고 연구하는 사람들을 비하해 ‘환빠’라고 부르는데, 동북아역사재단은 특별한 관심이 없는 모양이군요?”라고 물었다. 발언의 취지를 둘러싸고 해석이 엇갈렸지만, 재야 사학자들 사이에서만 논의되던 위서(僞書) 환단고기는 순식간에 공론의 장으로 올라왔다.

◇환단고기란 무엇인가= 환단고기가 처음 대중에게 소개된 것은 1979년 9월 10일이다. 광오이해사라는 출판사에서 발간됐고, 저자로 등록된 이유립(1907~1986)은 자신이 책을 집필한 것이 아니라 1911년 만난 계연수라는 독립운동가 겸 도인이 전수한 다섯 권의 고대 문헌을 종합했다고 주장했다.

책의 핵심 서사는 이렇다. 기원전 7000년, 바이칼호 인근에 ‘환국’이라는 고대 문명이 있었고 전성기에는 1억8000만 명, 영토는 한반도와 일본, 메소포타미아는 물론 북극부터 인도까지 확장했다는 주장이다. 책에 따르면 총면적은 “남북 5만 리, 동서 2만 리”에 달했다. 이 땅을 다스린 ‘환인’은 신적인 존재로, 거대한 제국을 큰 갈등 없이 통치했지만 쇠락 이후 요임금, 순임금이 등장하는 시기를 거쳐 한반도로 밀려났다는 이야기다.

재야 사학자들이 특히 강조하는 대목은 ‘영토 상실’이 아닌 ‘역사의 망각’이다. 이들은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과 현대 주류 역사학계가 외세를 추종해 우리 민족의 진짜 역사를 의도적으로 삭제했다고 주장한다.

◇반복되는 환단고기 논란과 인기= 환단고기의 서술은 고대 사료로 보기 어려운 요소들로 가득하다. 실증적 증거가 전혀 없는 ‘환국’의 존재, ‘국가’ ‘인류’ ‘전 세계’ ‘남녀평권’과 같은 근대 개념의 등장과 16세기 이후에야 쓰이기 시작한 지명들이 고대 문헌에 등장하는 점이 대표적이다. 학계가 환단고기를 가짜 역사로 규정해온 이유다.

그럼에도 환단고기는 시대마다 되살아났다. 1970년대 유신 체제하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체제 강화를 위해 민족주의를 강조하면서 환단고기는 힘을 얻었다. 박 전 대통령은 김부식과 정도전이 민족자주적인 사료를 삭제했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유사역사학자들의 논리와 맞닿아 있다. 환단고기는 1980년대 ‘한단고기’라는 이름으로 베스트셀러에 오르며 대중적 영향력을 확보했다.

이후에도 정치권에서는 여야를 막론하고 환단고기 논란이 불거졌다. 역사연구가 이문영의 ‘유사역사학 비판’에 따르면 2013년 8·15 경축사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이 인용한 이암의 발언 역시 환단고기 서문에 등장하는 문구다. 도종환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후보자 시절 ‘환빠’ 논란에 휩싸였고, 정세균 전 국회의장 등이 유사역사학 단체로 지목된 모임 행사에 참석하고 축사를 하는 등 물의를 빚은 사례도 있었다.

◇주류 학계의 단호한 결론…“‘사이비 역사’와 선 그어야”= 2025년 현재, 학계의 입장은 명확하다. 한국고대사학회, 한국고고학회 등 국내 역사·고고학 관련 학회 48곳은 공동성명을 내고 “역사학계와 사이비 역사 사이에는 어떠한 학문적 논쟁도 존재하지 않는다. 일방적 비방과 터무니없는 주장이 존재할 뿐이다”라며 “이재명 정부와 여야 정치권은 ‘사이비 역사’의 위험성을 직시하고 명확하게 선을 그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논란이 확산되자 정부 문화정책의 핵심 인사로 꼽히는 유홍준 국립중앙박물관장은 환단고기에 대해 “상상력이 투영된 자기만족적 사관”이라고 선을 그었다. 대통령실 역시 “이 대통령의 환단고기 관련 발언은 이 주장에 동의한 게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을 지낸 정재정 서울시립대 명예교수는 “이미 학계에서 검증이 끝난 사안을 반복적으로 소환하는 것은 국민의 역사관 형성에 분란만 일으킨다”고 지적했다. 지난 18일 문화일보에서 만난 정 교수는 “환단고기에 단군 얘기가 나오니까 마치 우리나라의 유구한 역사, 광대한 영토, 뭐 이런 것에 대한 환상에 쉽게 빠져드는 것 같은데 그것은 팩트가 아니기 때문에 매우 위험하다”며 “이러한 이야기가 등장하는 건 사실 재야사학자들이 ‘강단사학’이라고 하는 기존 역사학계를 비판하기 위한 하나의 안티테제”라고 했다. 이어 그는 “재야에서는 강단사학을 ‘식민사학’이라고 비판하지만 심층적으로 들어가 보면 환단고기야말로 일제 말기에 일본이 주장한 대동아공영권과 같은 역사론하고 맥이 닿아있다. 상당히 팽창주의적, 제국주의적인 사상과 맞닿아 있는 만큼 이 시대에 적합한 논리가 아니다”고 전했다.

신재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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