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울 때마다 늘 챙겨주시던… 그 따뜻함이 아직도 가슴에 있네[사랑합니다]

■ 사랑합니다 - 어머님 같은 누님 (하)

요양원에서 만난 누님(왼쪽). 어린 시절 나를 업고 걸어갔던 그분이 이제는 빈 바가지처럼 가벼워 눈물이 난다.

초등학교 6학년 1학기를 마치고 여름방학이 시작될 무렵 객지에서 생활하시던 형님이 예고 없이 집으로 왔다. 그리고 단박에 경상북도 포항 송라초등학교로 전학을 가자고 했다. 날벼락 같은 소식이었다. 어떤 결정권도 없던 나는 형님의 말 한마디에 낯선 곳으로 끌려가야 할 처지에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고향, 부모님, 친척들, 친구들…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멀어지는 것 같았다.

다음 날, 형님이 화양초등학교에 전학 절차를 밟으러 간 사이 나는 마음속으로 단 한 사람을 떠올렸다. 고향을 떠나기 전에 누님을 만나고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무에게 얘기하지 않고 안정마을로 달려갔다. 점심때가 조금 지난 시간이었는데 누님이 집에 없었다. 마당을 돌아 하천 다리로 나갔더니 개울가에서 빨래하고 있었다. 흐르는 물소리에 누가 온 줄도 모르고 빨래를 하다가 내가 가까이 다가가 “누님” 하고 부르자 “뭔 일이냐?” 하며 손을 잡아끌었다. 내가 내일 아침 형님을 따라 포항으로 간다고 하자 물 묻은 손으로 나를 가슴에 안고 한참 동안 눈물을 흘렸다. 그때 한없이 크고 포근하던 누님의 품이 지금은 나이가 들어 빈 바가지처럼 가볍게 느껴진다.

중·고등학교를 거쳐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좋은 일보다는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살뜰하게 챙겨주시던 누님이었다. 누구나 늙고 병들고 결국 떠나는 것이 자연스러운 섭리라지만, 누님에게는 유난히 잔혹하게 느껴진다. 세상에서 가장 예쁘고 당당하던 누님이 이제는 좁은 침대에서 남의 손을 빌려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상태가 나아질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지난번보다 더 좋아진 것 같다”고 하얀 거짓말을 건넨 나의 속마음은 복잡했다. 누님이 천용이 형님 목소리가 듣고 싶다고 하여 전화를 연결하자, 어린 시절 작은집에서 놀던 이야기를 하면서 웃고 울다가 30분이 훌쩍 지났다.

어느덧 헤어질 시간이 다가오자 서운한 눈치였다. 분위기를 바꾸려고 여기서 지내면서 가장 재밌는 것이 뭐냐고 물어보고,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다음에 가져오겠다고 했더니 한참을 머뭇거리던 누님은 “그냥” 하고는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약간의 침묵이 흐른 뒤 일어서려는데 “이제 갈래”라고 하면서 손을 꼭 잡았다.

오래전 외갓집 가던 날, 나의 손을 꼭 잡아주던 그 따뜻한 손이 이제 힘이 빠져 가늘고 거칠었다. 누님의 손을 살며시 놓고 나는 현관으로, 누님은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하며 몇 걸음마다 뒤를 돌아본다. 그 뒷모습에 발길이 쉽게 떨어지질 않았다.

정문을 나서는데 문득 장사익의 ‘꽃구경’이 귓전에 들리는 듯 가슴이 저며왔다. 김형영 시인의 ‘따뜻한 봄날’에 곡을 붙인 ‘꽃구경’은 어머니가 아들을 걱정하며 솔잎을 한 움큼씩 뿌려주는 대목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마을을 지나고 산길을 지나고 산자락에 휘감겨 숲길이 짙어지자, 어머니는 한 움큼씩 한 움큼씩 솔잎을 따서 가는 길 뒤에다 뿌리며 가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먼 산을 바라보며 ‘정점과 종점의 규칙’을 떠올렸다. 굽이가 많은 길을 묵묵히 걸어온 누님이 행복한 순간들과 말하지 못한 일을 홀로 견딘 날들이 있었겠지만, 그 긴 여정의 마지막은 따뜻한 봄날처럼 좋은 기억만 쌓이면 좋겠다.

이창규(전 여수시 해양관광수산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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