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우습게 보는 쿠팡…‘국민 피해 주면 망한다’ 규율 각인시켜야 [전문가 리포트]

쿠팡에서 발생한 3370만 건의 개인정보 유출 사태는 우리 사회에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유출 사실을 인지하는 데만 5개월이 걸린 기업의 대응을 두고 이재명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참으로 놀랍다”며 질타했다. 이 대통령은 “잘못하면 회사가 망할 수 있다는 인식을 심어줘야 한다”며 과징금 산정 기준 강화와 집단소송제 도입 등 실효적인 징벌적 제재를 주문했다.

이번 사태의 교훈은 ‘코스피 5000시대’를 위한 자본시장 활성화 과제가 상법 개정 같은 사전적 규율에만 머물러선 안 된다는 점이다. 사전적 규율이 사고 전 의사결정의 공정성을 법으로 규정하는 ‘예방책’이라면, 시장 선진화를 위해서는 “국민에게 피해를 주면 회사가 망한다”는 사실을 각인시키는 강력한 사후적 규율이 병행되어야 한다. 결국 잘못이 벌어진 뒤 기업에 가해지는 ‘엄중한 사후 책임’을 어떻게 현실화할 것이냐는 질문에 답하는 것이 자본시장 선진화의 다음 과제다.
플랫폼 ‘록인’ 효과에 사라져버린 시장 자발적 제재

이러한 시장 실패는 쿠팡 같은 플랫폼 기업에서 더 두드러진다. 플랫폼 특유의 ‘양면 시장’ 구조와 강력한 록인(Lock-in, 가두기) 효과 때문이다. 공급자와 수요자를 연결해 일상을 장악한 플랫폼은 소비자에게 편리함이라는 족쇄를 채운다. 카카오 데이터센터 화재로 서비스가 중단됐을 때도 이용자 이탈이 불가능했던 이유는 메신저를 넘어 택시, 결제, 인증 등 생활 인프라가 그 안에 묶여 있었기 때문이다. 쿠팡 역시 로켓배송과 멤버십 생태계가 제공하는 편리함으로 소비자를 붙들어 맬 것이다. 대체재를 찾기 힘든 록인 구조에서 불매운동 같은 시장의 자정 작용은 작동하기 어렵다. 결과적으로 기업의 위법 행위는 실질적인 재무적 손실로 이어지지 않는다.
정부가 공정한 심판이자 규율 설계자 나서야
무엇보다 위법 행위 증명 책임을 피해자가 떠안아야 하는 것이 가장 큰 장벽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실제 손해액을 훨씬 상회하는 배상을 부과하는 징벌적 손해배상, 기업이 스스로 결백함을 증명하게 하는 증명책임의 전환, 재판 전 상대방의 증거를 강제로 공개하게 하는 디스커버리(증거개시) 제도 도입이 시급하다. 19년간 12건에 불과한 실적이 증명하듯, 까다로운 소송 허가 요건과 증거 확보의 어려움은 시장의 징벌 기능을 마비시키고 있다. 주주대표소송 역시 구조적 한계가 뚜렷하다. 승소하더라도 배상금은 주주 개인이 아닌 회사로 귀속된다. 주주는 주가 상승이라는 간접적 이익만 얻을 뿐이다. 반면 소송을 이끈 주주는 패소 시 상대방의 변호사 비용까지 전액 부담해야 하는 리스크를 안고 있으며, 승소하더라도 자신의 노력과 비용을 충분히 보상받기 어렵다. 이러한 구조를 타파하기 위해서는 국민연금의 주주대표소송이 활성화되어야 한다. 공공성을 갖춘 국민연금이 경영진의 부정을 감시하고 책임을 물을 때, 일반 주주들의 권익 보호와 기업 가치 제고라는 선순환이 가능해진다.
과징금, 집단소송, 형사처벌이라는 미국의 사후 책임 체계
미국에서 사후 책임은 민사적 배상에만 머물지 않는다. 기업의 위법 행위가 고의적이거나 기만적일 경우 강력한 형사처벌이 병행된다. 미국이 기업 범죄를 민사로만 해결한다는 일각의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2016년 발생한 우버(Uber)의 개인정보 유출 은폐 사건이 대표적이다. 당시 우버는 약 5700만명의 고객과 기사 정보 유출 사고를 겪었으나, 최고보안책임자(CISO) 조 설리번은 규제 당국에 알리는 대신 해커들에게 10만달러 상당의 비트코인을 지급하며 사건을 무마하려 했다. 그는 이 비용을 해킹 사고 대응이 아닌 ‘버그 바운티(보안 취약점 신고 포상금)’로 위장해 회계 처리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미 연방검찰은 이를 단순한 실수가 아닌 연방기관의 조사를 방해한 사법 방해(Obstruction of Justice)와 중대 범죄 은닉(Misprision of a Felony) 혐의로 기소했다. 2023년 미 연방법원은 그에게 유죄를 선고하고 보호관찰 3년과 사회봉사 200시간을 명령했다. 재판부는 보안 책임자에게 형사 책임을 물은 최초의 사례임을 고려해 실형은 면해주면서도, “다음 보안 책임자가 똑같은 짓을 한다면 그때는 감옥에 가게 될 것”이라는 강력한 경고를 남겼다. 기업의 보안 실패가 경영진 개인의 인신 구속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엄중한 선례를 남긴 것이다.
‘톱니바퀴 책임 체계’ 구축이 ‘코스피5000’ 위한 과제
결국 자본시장의 진정한 힘은 규율 당국의 징벌적 과징금, 사법부의 단호한 형사처벌, 그리고 주주들의 징벌적 손해배상제가 적용된 집단소송과 주주제안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는 데서 나온다. 이 대통령이 강조한 “회사가 망할 정도의 책임”이 수사에 그치지 않으려면 행정적 제재를 넘어, 시장 참여자들이 직접 기업의 책임을 현실화할 수 있는 다각적인 사후 규율 체계가 구축되어야 한다. 위법한 기업이 시장에서 도태되거나 뼈를 깎는 쇄신을 강요받는 구조가 정착될 때, 비로소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핵심인 불투명한 경영 관행도 뿌리 뽑힐 수 있다. 주주의 권리가 구호가 아닌 소송과 제안이라는 무기로 작동하는 것, 이것이 코스피 5000시대를 향한 자본시장 선진화의 다음 라운드이다.
이창민 한양대 교수(경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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