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가로 포장된 ‘신종 검은머리 외국인’의 등장 [한겨레 프리즘]


김경락 | 사회정책팀장
검은 머리 외국인. 이 표현은 1997년 외환위기 즈음 처음 등장했다. 재벌그룹의 문어발식 경영, 정치권력과의 유착 등 한국식 성장 시스템이 한순간 무너진 여파로 헐값 된 국내 자산을 ‘줍줍’한 외국인 투자자들이, 알고 보니 외국에서 활동 중인 한국인이어서 생겨난 말이다.
검은 머리 외국인은 2003년 미국 사모펀드 론스타의 외환은행 매입 때도, 17대 대선판을 뒤흔든 ‘비비케이(BBK) 사건’에도 등장한다. 2008년 금융위기 당시에 우리은행에 대규모 손실을 안겼던 파생상품(CDO·CDS) 구매를 권유한 이나, 위기 전에 금융당국 최고 책임자를 만나 파생상품을 선진 금융이라고 소개한 이 역시 검은 머리 외국인이었다. 이들을 소재로 한 영화·드라마도 적잖다. 올해 5월 개봉한 영화 ‘소주전쟁’도 그들의 활동상을 잘 그리고 있다.
이들은 금융시장이나 기업 인수합병(M&A) 시장 등 자본시장에서 주로 뛰었다. ‘선진 금융기법’으로 포장된 기술과 글로벌 투자은행(IB) 임직원 등과의 학연 등 인맥이 그들 무기였다. 그들은 이를 토대로 국내 시장을 헤집으며 큰돈을 벌어 갔다. 개방의 경험이 일천한 국내 금융시장은 그들에겐 수준 낮은 놀이터였기 때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규제는 느슨했고 감시망은 성겼다. 감독자도 연줄이 닿거나 어리숙해 구슬리기 쉬웠다. ‘글로벌 스탠더드가 아니다’란 말 한마디에 감독자는 무너졌다. 1990년대 후반과 그 뒤 10여년 동안 우리 자본시장의 숨기고 싶은 풍경이다.
‘쿠팡 사건’은 새로운 형태의 검은 머리 외국인의 출현을 알렸다. 우선 그 외국인의 주무대는 자본시장이 아닌 아이티·유통 시장이다. 사지 않고 창업한 점이나 오랜 기간 적자를 감수하며 몸집을 불려간 점도 금융판의 검은 머리 외국인과 달랐다. 이런 점은 유력 정치인들이나 언론들이 그를 한때 ‘혁신가’로 추어올린 배경이 됐다.
하지만 속살은 옛 검은 머리 외국인과 다르지 않다는 점이 최근에야 속속 드러나고 있다. 그 검은 머리 외국인이 국내 언론에 처음 등장한 건 2010년 7월이다. 현직 경제부처 장관의 딸이 동문들과 스타트업(훗날 쿠팡)의 창업에 나선다는 얘기를 소개한 기사에서다. 해사한 얼굴을 한 32살의 그 검은 머리 외국인은, 장관 딸과 하버드 동문이며, 동업자로 소개됐다. 그 기사를 읽은 시장의 ‘선수’들은 하버드 출신 야심가의 탄탄한 인맥에 주목했을 것이다.
규제 사각을 집요하게 파고든 점도 옛 검은 머리 외국인과 같다. 오죽하면 성난 국회의 부름에도 ‘한국 법인의 일’이라며 출석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2018년부터 ‘완전 자회사’(모회사가 100% 지배) 체제로 지배구조를 재편해 나간 건 신의 한 수였으며 2020년 나스닥 상장은 화룡점정이었다. 경제적 실질은 한 몸통이나 여러 회사로 쪼개고, 국외 시장에 상장한 것만으로 그는 ‘책임 없는 권한’을 얻었다. 노동법·공정거래법·대규모유통업법·개인정보보호법 등 중대 위반 행위가 발생해도 행정·사법 당국의 손은 그에게 닿기 어렵다. 이러한 지배구조 구축을 ‘선진 기법’으로 그는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한가지 더. 규제 사각 파고들기의 충실한 협력자는 김앤장 법률사무소다. 이곳은 단순한 법률 자문을 넘어 경영에도 깊이 침투하고 있다. 쿠팡 국내 계열사 16곳의 등기임원 47명 중 10명이 김앤장 출신이다. 더구나 그중 4명은 계열사 4곳의 대표다. 누군가는 준법 경영(컴플라이언스)의 증좌라고 주장할지 모르겠으나 그 주장에 공감할 이는 별로 없을 듯하다.
검은 머리 외국인과 김앤장이 함께 쌓아 올린 철옹성을 뚫기 위해 정부가 뛰기 시작했다. 중요한 건 ‘엄포’가 아니라 법원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구체적이고 탄탄한 성과일 것이다. 그 첫 단추로 쿠팡을 둘러싼 각종 민사·형사·행정 소송 사례 분석을 제안해본다. 개별 사건의 정당성을 얻으려 펼친 그(들)의 변론이 집합적으로는 상호모순일 공산이 높다. 거기에 허점이 있다.
sp96@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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