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힐링속으로-경북을 걷다] 95. 청송 주왕산 용추협곡
백악기 암벽·구룡소·선녀탕 어우러진 정적의 풍경, 가족형 겨울 트레킹 명소 부상

백악기의 시간이 빚어낸 거대한 암벽 사이로 겨울의 정적이 내려앉는다.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 청송 주왕산의 핵심인 용추협곡은 이맘때면 화려함 대신 절제된 비경을 드러낸다. 누구나 걷기 좋은 무장애 탐방로를 따라, 얼음 결정이 수놓인 폭포와 고요한 협곡이 전하는 태고의 신비를 만나본다.

청송 주왕산의 용추협곡은 사계절 내내 아름답지만, 겨울이 시작되는 시기에는 이 길만의 고유한 분위기가 한층 선명해진다. 대전사에서부터 이어지는 평탄한 탐방로는 첫눈이 내리면 얕게 쌓인 눈 위로 사부작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고요한 산사의 공기와 어우러져 한층 더 깊은 정취를 만들어낸다. 기암괴석의 선이 뚜렷해지고, 찬 공기 사이로 새어 나오는 맑은 물소리마저 또렷이 들린다.

주왕산은 설악산, 월출산과 함께 국내 3대 암산으로 불리며, 청송군이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으로 지정된 배경 역시 이곳의 지질학적 가치에 기반한다. 주왕산 일대에만 9개의 지질 명소가 집중돼 있으며, 그 핵심이 바로 용추협곡이다. 백악기 동안 쌓여 굳어진 응회암이 오랜 풍화와 침식을 거쳐 완성한 이 협곡은 거대한 암릉과 층리, 단애가 이어져 마치 지질 교과서를 걷는 듯한 인상을 준다.

탐방객이 가장 먼저 마주하는 것은 누구나 걸을 수 있도록 조성된 2㎞ 내외의 무장애 탐방로(휠체어나 유모차 사용자를 위해 계단이나 턱 등의 장애물을 없앤 탐방로)다. 이 구간은 경사가 완만하고 길이 넓어 노약자도 편하게 걷기에 무리가 없다. 겨울철에는 눈이나 결빙에 대비해 제설 작업이 신속하게 이뤄져 가족 단위 여행객도 안전하게 이용할 수 있다. 길을 따라 병풍처럼 둘러선 암봉들은 겨울 햇살을 받으면 더욱 선명한 윤곽을 드러낸다.

무장애 탐방로가 끝나는 지점부터 용추협곡의 본격적인 비경이 이어진다. 용추협곡의 폭포는 총 3단으로 이뤄져 있다. 1단폭포 아래에는 구룡소, 2단폭포 아래에는 선녀탕, 3단폭포 아래에는 폭호가 자리한다. 용추(龍湫)는 용이 승천한 웅덩이라는 뜻도 있지만, 본래 폭포가 떨어져 아래 폭호(폭포 아래 깊게 파인 웅덩이)를 만드는 형상을 의미한다.
계곡을 따라가면 먼저 깊고 고요한 웅덩이, 구룡소가 모습을 드러낸다. 용이 아홉 마리 승천했다는 전설이 깃든 곳이지만, 실제로는 물살에 실린 자갈과 모래가 회전하며 암석을 깊게 파낸 '포트홀(돌개구멍)'이다. 겨울철에는 수면 위에 얇은 얼음 결정이 생기며 독특한 풍경을 만든다.
이어지는 선녀탕은 2단 폭포 아래 형성된 작은 폭호로, 수량이 줄어든 겨울철에 더욱 맑은 바닥을 들여다볼 수 있다. 물빛이 투명하게 드러나며 주변 암벽과 눈 덮인 가지들이 반사돼 정적인 아름다움을 더한다. 마지막 3단 폭포 아래 형성된 폭호는 겨울철 침식과 결빙 형태를 동시에 관찰할 수 있어 지질 탐방객들이 빼놓지 않고 찾는 지점이다.

용추폭포는 겨울이 되면 물이 가늘게 흐르거나 부분 결빙되며 또 다른 풍경을 만들어낸다. 폭포 옆 암벽에 맺힌 고드름이 층층이 내려앉아 흰빛과 회색빛이 뒤섞인 겨울 특유의 색감을 완성한다. 폭포 아래 고인 물웅덩이는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옅은 수증기를 머금으며 계곡의 고요함을 유지한다.
가족과 함께 주왕산을 자주 찾는다는 여행객 김용덕(59) 씨는 겨울의 용추협곡을 "사진보다 실제가 훨씬 깊은 분위기를 준다"고 표현했다. 그는 "힘든 산행이 아니라 누구나 천천히 걸으며 자연의 변화와 지질 구조를 직접 볼 수 있는 점이 좋았다"며 "특히 구룡소 주변의 얼음 결정이 아이들에게는 신기한 자연 수업이 됐다"고 말했다.

주왕산국립공원 관리사무소는 겨울철에도 안전한 탐방을 위해 주요 구간 제설 및 결빙 예방 작업을 강화하고 있다. 탐방로 곳곳에는 휴식 공간도 마련돼 있어 계절과 관계없이 이용 가능하다.
겨울 용추협곡은 화려함보다는 절제된 풍경이 주는 여운이 길다. 거대한 바위와 얼음, 그리고 계곡물이 만들어내는 서로 다른 속도의 시간은 여행객에게 조용한 사색을 제공한다. 걷기 좋은 길을 찾는 이들, 자연의 본모습과 천천히 흐르는 계곡의 겨울을 느끼고 싶은 이들에게 주왕산 용추협곡은 다시 찾고 싶은 '겨울 트레킹 명소'로 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