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루즈 – 현재진행중인 고전

줄거리는 잘 알려져 있다. 괴팍하고 인색한 노인 에비니저 스크루지가 크리스마스 이브 밤, 유령들과의 기이한 여행을 통해 자신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목격한 뒤 변화된 삶을 선택하게 되는 이야기다. 흔히 이 작품은 '수전노의 개과천선'이라는 도덕극으로 요약되곤 한다. 그러나 '스크루지'가 오랜 세월 동안 반복적으로 호출되는 이유는, 단순한 개인의 성격 변화 서사를 넘어 당대 사회를 지배하던 사상과 가치관을 정면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자주 언급되는 인물이 바로 '인구론'으로 유명한 19세기 영국의 경제학자 토머스 맬서스다. 스크루즈가 맬서스 개인을 직접적인 모델로 삼아 창작된 인물이라는 명확한 근거는 없지만, 작품 속 스크루즈가 보여주는 세계관에는 당시 유행하던 맬서스주의적 사고가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 디킨스는 이 사상을 비판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스크루즈라는 인물을 창조했다고 보는 편이 보다 타당하다.
극중 스크루즈는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금융업에 종사하는 인물에 가깝다. 그는 돈을 관리하고, 빌려주고, 이자를 통해 이익을 축적하는 상업·금융 자본가다. 그의 이름 또한 상징적으로 읽힐 여지가 있다. '에비니저(Ebenezer)'는 히브리어에서 '도움의 돌'을 뜻하는 이름이며, '스크루지(Scrooge)'는 이후 영어권에서 인색함의 대명사로 사용될 만큼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 이름의 결합은, 도움을 의미하는 이름을 가졌으나 타인의 고통에 무감한 인물을 통해 당시 사회의 도덕적 모순을 드러내는 장치로 해석할 수 있다.
맬서스의 '인구론'은 "식량 생산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하는 반면,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는 주장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빈곤을 사회 구조의 문제라기보다 자연 질서의 결과로 보았으며, 무분별한 구휼과 복지 정책은 오히려 빈곤을 고착화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관점은 당시 영국 사회에서 가난한 이들에 대한 냉담한 태도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작동했다.
그러나 찰스 디킨스의 시선은 달랐다. 그는 가난을 개인의 나태나 도덕적 결함이 아니라, 사회 시스템과 구조적 불평등에서 비롯된 문제로 인식했다. 산업혁명 이후 급격히 도시 인구가 증가한 영국 사회에서 노동력은 넘쳐났고, 그 결과 노동자의 처우는 악화된 반면 자본가는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디킨스는 이러한 불균형한 구조 속에서 빈곤이 재생산된다고 보았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극중 스크루즈의 변화는 단순히 '착해지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유령들이 보여주는 과거·현재·미래의 장면을 통해 그는 인간을 비용이나 부담이 아닌, 존엄한 존재로 인식하게 된다. 이는 타인뿐 아니라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관점의 변화이기도 하다. 스크루즈는 가난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던 시선에서 벗어나, 사회적 선택과 구조가 만들어낸 결과로 이해하게 된다.
넷플릭스 뮤지컬 애니메이션 '스크루지'는 이러한 고전의 문제의식을 유지한 채,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여전히 효율과 숫자를 앞세워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가. 삶이 각박한 시대일수록,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고 연대하려는 태도는 더욱 중요해진다. '스크루지'가 현재진행형의 고전으로 남아 있는 이유는, 바로 이 질문이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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