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 옷도, 여자 옷도 아니다"…제이홉·제니가 사랑한 패션 [박연미의 럭셔리 오디세이]

박연미 2025. 12. 23.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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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넬·구찌·루이비통 등
명품들의 '젠더리스' 패션
정체성 표현의 문화적 현상
산업 전체 구조 뒤흔들어
젠더리스룩을 입은 아이돌 BTS 멤버들과 영국 가수 해리 스타일스. 사진=보그

패션은 시대정신을 반영해 왔다. 옷을 입는 행위를 넘어 사회의 가치와 문화적 전환을 상징하는 언어가 됐다.

젠더리스(Genderless) 패션은 역사 속에서 꾸준히 성장해 왔다. 이제는 하나의 트렌드를 넘어 전 세계 패션계를 지배하는 규범이 됐다.

젠더리스 패션은 옷의 기능과 미학을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분법적 기준에 옭아매지 않고, 개인의 정체성과 표현의 자유를 존중한다. '경계를 넘어선 자유'라는 다양성에 시대정신을 담아, 사회가 진화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이자 새로운 문화적 언어다.

젠더리스 패션은 옷차림의 변화를 넘어 패션 산업의 구조 전체를 뒤흔들고 있다. 온라인 스토어에는 ‘올 젠더(GENDER)’ ‘젠더 뉴트럴(GENDER-NEUTRAL)’ 카테고리가 생겨났다. 오프라인 매장은 “남녀 모두를 위한”, “성별에 구애받지 않는 디자인”, “모든 타입에 어울림” 같은 문구 사용하여 옷을 전시하는 공간으로 변모하고 있다.

사이즈 체계 또한 다양해졌다. S·M·L 같은 전통적 구분 대신 다양한 체형을 포용하는 범용적 체형 기준(XS–XL, 0–5 등)으로 표기된다. 소비자는 성별의 경계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에게 맞는 옷을 선택할 수 있게 됐다.

젠더리스 패션의 기원

젠더리스 패션은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개념이 아니다. 성별 규범에 도전하고 자유를 갈망했던 과거의 움직임들이 쌓여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시작은 192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여성이 바지를 입는 행위 자체가 사회적 저항이었던 시대에 패션 디자이너 코코 샤넬은 여성들을 코르셋의 속박에서 해방하고, 남성들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저지 소재와 직선적 실루엣의 의상을 선보였다.

(왼쪽부터) 가브리엘 샤넬과 그녀의 연인 아서 카펠, 생로랑 르스모킹 룩, 장폴고티에 1985년 컬렉션.


1966년 이브 생로랑은 여성용 턱시도 ‘르 스모킹(Le Smoking)’을 내놓아 패션의 금기를 깼다. 이 옷은 단순한 스타일이 아니라 억압된 규범에 맞선 저항이었다. 르 스모킹은 여성에게 남성적 권위를 부여해 성별의 경계를 흔든 상징적 사건이었다. 패션이 성(性) 역할을 재정의하는 힘을 지녔음을 보여줬다.

1980년대 장 폴 고티에는 남성 스커트를 선보였다. “옷에는 성별이 없다”는 메시지를 런웨이에 던졌다. 젠더리스 패션은 옷이 더는 성별을 규정하는 도구가 아니라, 개인의 개성과 가치관을 표현하는 가장 창의적인 수단이자 자유를 담은 선언이다.

철학에서 태어난 패션 언어

오늘날 명품 패션업계의 심장을 뛰게 하는 키워드 젠더리스는 단순한 스타일의 변주가 아니다. 그 뿌리에는 반세기를 사이에 두고 성별 규범을 해체한 두 사상가, 시몬 드 보부아르와 주디스 버틀러가 있다.

1949년 드 보부아르는 '제2의 성'에서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라는 선언으로 사회가 규정한 여성성의 허구를 드러냈다. 그녀의 통찰은 옷이 단순히 신체를 덮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역할을 각인시키는 도구임을 일깨웠다.

1990년 주디스 버틀러는 '젠더 트러블'을 통해 한발 더 나아간다. 그에게 젠더는 본질이 아니라 매일 반복되는 행위와 퍼포먼스, 즉 옷 입기와 몸짓을 통해 수행되는 연극에 불과하다. 젠더리스 패션은 사회적 규범을 거부하는 저항이자, 새로운 자기 정체성을 창조하는 언어로 자리 잡았다. 지금 우리가 입는 옷의 자유는, 반세기를 건너온 사유의 혁명에서 비롯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젠더리스 패션의 미학적 특징

(왼쪽부터) 루이비통과 미우미우 2025년 F/W 컬렉션. 사진=각 사 홈페이지


젠더리스 패션의 첫 번째 특징은 실루엣의 해체다. 전통적으로 남성복은 직선적이고 여성복은 곡선적이라는 이분법이 존재했다. 이제는 누구나 오버사이즈 재킷과 와이드 팬츠를 입고, 셔츠와 코트를 자유롭게 겹쳐 입는다. 체형과 성별을 지워버리는 이러한 스타일링은 그 자체로 ‘자유의 선언’이다.

두 번째는 소재와 컬러의 중립성이다. 한때 파스텔이나 레이스, 실크 소재는 여성적, 가죽이나 네이비 톤은 남성적 코드로 분류됐다. 젠더리스 패션은 이러한 선입견을 무너뜨린다. 검정·흰색·회색 같은 무채색에서부터 비비드한 컬러까지 성별 구분 없이 활용된다.

세 번째는 스타일링의 해방이다. 남성 모델이 드레스를 입고, 여성 모델이 클래식 슈트를 입는 장면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이는 성별이 아닌 개인의 취향과 정체성이 우선시 되는 시대적 흐름을 반영하고 있다.

"규범을 다시 쓰다"

지금 패션의 최전선은 성별 고정관념을 흔드는 도발적 실험으로 빛난다. 런웨이는 단순히 옷을 보여주는 자리가 아니라, 사회적 관념을 재구성하는 무대가 됐다.

알레산드로 미켈레 시절의 구찌는 코르셋과 시스루 톱, 리본, 레이스 셔츠와 진주 액세서리로 ‘젠더리스 아이콘’의 이미지를 확립했다. 미우미우는 여성성의 상징 브라톱과 남성복의 테일러링 등을 적절하게 혼합하여 여성성·남성성으로 구분되는 디테일의 경계를 무너뜨리며 자유로운 실루엣을 표현했다.

(왼쪽부터) 구찌의 2020 F/W 컬렉션과 장 폴 고티에의 사카이의 협업 컬렉션, 루이비통 남성복 컬렉션. 사진=각 사 홈페이지


발렌티노는 진주 장식과 레이스 소재 의상을 남성 모델에게 입히며, 여성성으로만 읽히던 장식을 누구나 누릴 수 있는 보편적 미학으로 확장했다. 보테가 베네타는 유년기의 드레스업 놀이를 연상시키는 과장된 오버사이즈와 비대칭 실루엣으로 성별 구분 이전의 자유를 런웨이에 선보였다.

톰 브라운은 남성 모델에게 플리츠 스커트를, 여성 모델에게 과장된 파워 슈트를 입히며 성별 고정관념이 패션의 중심에서 사라졌음을 입증했다. 아베 치토세가 이끄는 사카이(Sacai)는 남성복과 여성복을 하나의 옷 안에 결합해 테일러드 재킷과 튤 스커트를 절개하고 연결해 ‘성별의 혼합’을 디자인 언어로 표현했다.

글로벌 스타들의 젠더리스 스타일

2025년 멧 갈라에서 제니가 입은 샤넬의 맞춤 의상은 1987년 샤넬의 가을 컬렉션 의상을 커스텀 한 디자인이다. 남성 슈트의 구조와 레이어링을 결합해 젠더 구분을 없앴다. 여성스러움과 중성적 의상미, 클래식함을 모두 아우르는 스타일을 선보였다.

로제는 멧 갈라에서 생로랑 블랙 테일러드 슈트를 선택했다. 이 의상은 고전적인 남성복 테일러링의 정제된 구조 위에 현대적인 우아함을 더하며, 클래식한 품격과 댄디즘적 세련미를 동시에 드러냈다.

제니의 멧갈라 패션과 치마와 퍼부츠를 신은 BTS 지민. 사진=SNS


영국 가수 해리 스타일스는 보그(Vogue) 표지에서 드레스를 입은 최초의 남성 스타로 기록됐다. 무대에서는 진주 목걸이와 블라우스로 로맨틱한 감각을 표현했다. BTS의 제이홉과 지민은 스커트와 레이스 셔츠를 무대 의상으로 소화하며 젠더 규범을 거부했다.

젠더리스 패션은 오늘의 시대가 추구하는 다양성과 포용, 자기 정체성 존중을 가장 세련되게 드러내는 언어이자 스타일이다. 이제 옷은 남자다움’과 ‘여자다움’의 상징성을 가르는 도구가 아니라 개성과 자기표현의 권리, 즉 ‘나’를 표현하는 문화적 언어가 되고 있다.

박연미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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