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버전 '로미오와 줄리엣'…상실을 극복하는 한 가족의 이야기

김효정 2025. 12. 23.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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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켈리 오설리번, 알렉스 탐슨 감독
영화 <고스트라이트>

상실을 극복하는 한 가족의 이야기를
담담한 어조로 그려내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동이 트는 새벽, 창밖을 응시하고 있는 댄. 그의 시선이 당도하는 곳은 집 앞 한쪽의 잔디밭이다. 무언가 오랜 시간 동안 놓여있다가 치워진 듯한 빈 공간. 듬성듬성 잔디가 벗겨지고 긁힌 흔적이 있는 흉물스러운 공터. 한참을 바라보던 댄의 미간이 구겨진다. 떠오르는 것들을 떨쳐내지 못하는 듯, 혹은 그 참혹한 기억이 행여 잊힐까 두려운 그 표정, 그리고 그 악몽.

영화 <고스트라이트> 스틸컷 / 사진제공. 필름다빈

지난 17일 개봉한 신작, <고스트라이트> (Ghostlight, 켈리 오설리번, 알렉스 탐슨)는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중년의 남자, ‘댄’ (키스 커퓌러) 의 평범한 일상으로부터 시작된다. 새벽에 눈을 뜨고, 소음이 가득한 거리의 한복판에서 주어진 분량의 일을 하고, 집에서 싸 온 샌드위치로 점심을 해결하는. 잔인할 정도로 반복적인 그의 일상이 깨지는 순간은 그의 문제아 딸, ‘데이지’ (캐서린 커퓌러) 가 학교에서 문제를 일으킬 때뿐이다. 정학, 혹은 퇴학을 놓고 지리멸렬한 협상을 반복하는 이 고통스러운 과정조차도 이제 일상의 한 부분이 되어버렸지만 말이다. 그렇게 대강의 평안을 찾은 그 순간, 댄은 공사 현장 건너편에 버려진 한 극장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 극장 안에서 격렬하게 몸을 움직이고 있는 한 무리의 사람들. 그들 중 한 명과 댄의 시선이 마주친다. 그리고 그 순간은 결국 댄과 그 가족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는다.

영화 <고스트라이트> 스틸컷 / 사진제공. 필름다빈

<고스트라이트>는 평범해 보이는 한 중년의 남자가 아마추어 배우들이 모여 하는 셰익스피어의 연극 ‘로미오와 줄리엣’에 참여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들을 그리는 영화다. 마치 1996년에 개봉한 <쉘 위 댄스> (수오 마사유키, 1996) 의 스기야마가 우연히 퇴근길 전철에서 라틴 댄스를 추고 있는 커플을 보고 춤을 시작하며 새로운 인생을 발견했던 것처럼 말이다. 다만 <고스트라이트>의 댄에게는 평범한 회사원, 스기야마와는 완전히 다른 레이어의 인생이 있다. 그 역시 지극히 평범한 노동자로 보이지만 그는 사실상 몇 해 전 아들을 잃은 아버지이다. 그의 아들 ‘브라이언’과 그의 여자친구 ‘크리스틴’은 ‘로미오와 줄리엣’의 그들처럼 약을 먹고 동반자살을 한 것이다. 다만 크리스틴은 약을 먹고도 깨어났지만, 브라이언은 그러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버렸다.

영화 <고스트라이트> 스틸컷 / 사진제공. 필름다빈

한 남자의 일상으로 시작되는 영화는 이토록 놀랍고도 복합적인 플롯을 지녔다. 영화는 셰익스피어의 가장 잘 알려진 비극 '로미오와 줄리엣'의 재해석이며, 상실을 극복하는 한 가족의 이야기이자, 중년 이후의 또 다른 삶을 발견하는 남자의 드라마다. 흥미로운 것은 가족의 엄청난 트라우마를 그리는 이 영화가 러닝타임의 반이 지나는 시점까지도 브라이언의 이름조차 언급하지 않을 정도로 아들의 자살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영화의 전반은 댄이 연기를 배우고, 괴짜 동료들과 가까워지는 과정을 그리는 유쾌한 에피소드들로 채워진다. 영화가 댄의 상처, 즉 가족이 품고 있는 비극을 드러내는 방법 역시 뉴스 속보와도 같은 거대한 설정이 아닌, 댄의 애잔한 독백을 통해서다. 영화의 후반쯤에서 댄은 그가 왜 그렇게도 ‘로미오와 줄리엣’의 결말을 싫어했는지, 왜 단원들에게 그의 상처를 이야기하지 않았는지 담담하고도 강한 어조로 마음을 쏟아낸다.

영화 <고스트라이트> 스틸컷 / 사진제공. 필름다빈

영화의 공동 연출자이자 실제 커플인 켈리 오설리번과 알렉스 탐슨의 데뷔작 <고스트라이트>는 작고도 ‘우렁찬’ 영화다. 영화의 힘은 순전히 ‘로미오의 줄리엣’의 완벽한 시대적 재해석과 ‘댄’을 연기한 키스 커퓌러의 엄청난 호연이 빚어낸 것이다. 이름이 알려진 대스타는 아니지만 오랜 시간 동안 연극 무대에서 매우 잘 알려진 커퓌러를 처음부터 염두하고 이야기를 썼다는 그들은 이미 주연 배우의 선택만으로 그들의 충만한 재능을 증명한 셈이 아닌가 싶다. 2024년 <고스트라이트>를 통해 선댄스 영화제에서 주목받았던 이 두 신인 감독들의 두 번째 작품인 <마우스> (Mouse) 역시 2026년 베를린 국제영화제의 ‘파노라마’ 부문에 초청받았다. 이들이 <고스트라이트>로 보여준 작은 영화의 거대함이 어떻게 다시 실현될지 기대가 된다.

김효정 영화평론가•아르떼 객원기자

[영화 <고스트라이트> 메인 예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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