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건희 홍보 사진 찍은 ‘노란집’…쫓겨난 주민 절반 죽거나 생사 몰라

서울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의 동네 중 한곳인 동자동(용산구)은 ‘시간이 고인 공간’이다. 2015년 한 쪽방 건물에서 주민 45명이 한꺼번에 강제퇴거를 당했다. 한겨레는 쫓겨난 그들의 경로를 따라가며 1년(2015년 4월~2016년 5월 추적연재)과 5년(2020년 5월30일 토요판 커버스토리)을 기록했다. 세계가 초고속으로 질주하며 떨군 그들의 ‘10년 뒤 지금’(5부작)을 다시 좇았다. 강산이 열번은 변했을 시간의 속도 앞에서 가난은 독야청청 그대로였다.

10년 사이 3.4명 중 1명꼴로 사망
소리·소문 없이 사라진 취약한 삶들
의혹 수사 몰린 김건희 홍보에 ‘이용’
지난해 8월23일 “폭염주의보가 발령된 한낮의 서울역 쪽방촌”에 한 사람이 “자원봉사를 위해 방문”(ㅎ봉사회 블로그 후기)했다.
“오후 1시” 그는 “봉사자들과 좁은 골목길을 누비며 쓰레기를 줍고 바닥을 쓸며 땀이 이마를 적시는 와중에도 표정은 밝았”다. “오후 3시~4시 도배 작업이 이어졌고 서툴지만 성실히 벽지를 붙이는” 그의 모습에 “주민들이 미소 지었”다.
“화려한 언사나 과도한 찬사 없이도 우리 사회에 작지만 의미 있는 울림을 주었고….”
“4시간의 봉사가 마무리될 무렵” 그는 도배를 도운 건물 앞에서 봉사자들과 사진을 찍었다. 평소 배척되던 가난도 쓸모를 인정받는 순간이 있었다. 이날 검찰총장은 그의 ‘명품 가방 수수’를 검찰수사심의위원회에 직권 회부했다. 촬영에 쓰인 배경은 ‘노란집’이었다.

현재 0명
“김건희 여사님의 쪽방촌 방문” 1년 뒤 그 앞을 지나가며 박철관(가명·87)은 노란집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깜빵 사는” 최중호(가명·69)가 출소했다면 그를 “찾아오지 않을 리 없었”다. 10년 전 노란집 201호에 살았던 박철관은 210호였던 최중호를 “인생이 불쌍해서” 끝까지 챙겼다. 방금(지난 10월20일) 들은 최중호의 ‘소식’이 박철관은 믿기지 않았다. “그럴 리 없다”를 반복하며 수감 전 최중호가 지냈던 방으로 뛰어갔다. 노란집을 지나쳐 아랫골목 최중호의 방 앞에 도착했을 때 방이 있던 자리(리모델링)에 방이 없었다.
“싹 바뀌었네.”
방도 사라지고 사람도 사라졌다. 박철관에게도 익숙한 일이었다.
2015년 3월 중순의 묽은 새벽. 층마다 하나뿐인 공동화장실을 다녀오던 박철관은 비계를 잔뜩 싣고 건물 앞에 도착한 트럭을 보자마자 소리를 질렀다. 그의 고함에 잠을 깬 주민들이 방마다 달려 나와 비계를 설치하려는 인부들과 대치했다. 쪽방 건물(지하 1층에 지상 4층)을 외국인 관광객 게스트하우스로 리모델링하려는 건물주가 주민 45명(60대 이상 71.1%, 11년 이상 거주 20%, 노숙 경험 68.8%)에게 ‘한달 안에 모두 나가라’며 일방 통보 시한으로 정한 다음날이었다.
그날 본격 시작된 ‘강제퇴거 사태’는 쫓아내면 쫓겨나는 것이 일상이던 동네에서 전에 본 적 없는 장면들을 만들어냈다. 주민들이 모여 퇴거에 저항했고, 철거와 공사를 막으며 충돌했으며, 서울시장을 만나 억울함을 호소했다. 주민들의 공사중지 가처분을 받아들여 법원이 퇴거에 제동(2015년 9월)을 걸었으나 이주는 돌이킬 수 없었다. 단전·단수를 견디지 못하고 한명 두명 떠난 방들이 해머를 맞고 벽을 잃었다. 용도변경을 노린 리모델링이 법원 결정 뒤 ‘쪽방 땜빵’ 공사로 끝(2015년 10월)났을 때 잿빛 건물은 원색 페인트를 뒤집어쓰고 노란집이 돼 있었다. 쪽방에서 쫓겨난 주민들이 옮겨갈 수 있는 곳은 직선거리 100m 이내의 쪽방이란 사실(30명 66.6%)과 정치가 불의할수록 가장 약한 사람들부터 가난해진다는 사실, 그들에게 강제퇴거는 일회성 사건이 아니라 ‘인생 자체’란 사실이 이탈한 적 없는 ‘가난의 경로’에서 확인됐다.
45명→8명→2명→0명.
2015년 퇴거당한 주민 중 그해 말 노란집 거주자는 8명(퇴거 불응 4명+재입주 4명)이었다. 5년이 흐른 2020년엔 2명만 남았다.
게스트하우스를 포기한 건물주는 2016년 1월 서울시와 ‘저렴쪽방’ 계약(서울역쪽방상담소에 위탁)을 맺었다. 방값 상승과 강제퇴거 억제를 조건으로 시가 리모델링을 지원했다. 4년 계약 만료 뒤 주민들이 사태 재발을 우려하며 대응 모임을 갖던 2020년 3월 재계약했다. 이 계약을 끝(지난해 3월)으로 서울시의 저렴쪽방 정책이 종료됐다. 14만(지하)~18만원이던 월세는 그사이 18만~38만원(에어컨 설치)으로 배(주거급여만큼 상승)가 됐다. 건물주는 노란집을 다시 관리인에게 맡겨 운영했다. 주민들을 내보내고 보수공사를 한 다음 작년 여름부터 세입자를 새로 받았다. 당시 대통령 부인이 노란집 도배에 참여한 것도 그때였다.
그리고 0명. 10년 전 강제퇴거 주민 중 지금 그 건물에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동안 동네 사람들 싹 죽고 싹 바뀌었어.”(박철관)
1명→2명→9명→13명.
쫓겨난 사람들이 이생으로부터도 쫓겨나고 있었다. 퇴거가 시작될 때 1명(통보 열흘 뒤)이었던 사망자(209호)는 그해 11월 노란집으로 ‘귀가’한 주민(304호)이 재입주 10일 만에 계단에서 실족사하면서 2명이 됐다. 2020년까지 7명(지하1호, 지하4호, 307호, 208호, 지하5호, 205호, 106호)의 죽음이 보태졌다. 그리고 다시 5년. 최소 4명(☞ 2회 ‘아무도 모르는 죽음’)이 더 사망했다.
최중호(지난 2월21일)는 박철관에게 출소 소식도 전하지 않고 죽었다. 노란집 옆방(202호)에 살던 권영진(가명·사망 당시 86살)이 2년 전 세상을 떴다(2023년 5월10일)는 사실도 박철관은 모르고 있었다. 10년간 노란집 주민 13명(28.8%)이 불타 재가 됐다. 3.4명 중 1명꼴로 소멸했다. 그들 죽음에 강제퇴거가 끼친 영향은 어떤 과학도 진단해주지 않았다.

노랑도 덮지 못한 잿빛
“아, 그 영감님.”
301호 김대광(가명)은 노란집 출신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발명가 할아버지’이자, ‘김가나다’(직접 지은 한글 이름)이자, ‘백도라지’(자칭 별명)이자, ‘쪽방 돈키호테’(스스로의 정체성)였다. 이사를 거부하며 끝까지 방을 지킨 4명 중 1명이었던 그가 사태 종료 즈음부터 보이지 않았다. 그를 기억에서 꺼낸 사람들 모두 “죽었다고 들었다”거나 “지금까지 살아 있을 리 없다”(생존해 있다면 93살)고 확신했지만 정확한 사실은 아무도 몰랐다. 김대광 옆방에서 뼈만 남은 몸으로 종일 누워 지내며 “제발 죽고 싶다”던 차성천(가명·생존 시 69살)도 흔적이 없었다.
추가 사망자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들까지 더하면 모두 25명(55.5%)이 세상을 떠났거나 세상에 있는지 파악되지 않았다. 좁고 열악한 방에서마저 쫓겨 다녀야 하는 취약한 삶들이 죽음과 얼마나 바짝 붙어 있는지 ‘55.5’는 차갑게 증명하고 있었다.
“7~8년은 되려나.”
12년간 308호에 주소를 뒀던 장광준(가명·72)이 찜질방을 집 삼아 산 시간을 계산(11월3일)했다. 퇴거 통보 직후 그는 가방 하나밖에 안 되는 짐을 빼 천호동(강동구)으로 건너갔다. 건설 현장 일을 얻던 소개소 근처 찜질방에 가방을 두고 오래 의탁했다. “나이 먹고 써주는 데가 없어 일이 끊긴 2~3년 전” 그는 “몸까지 아파 아는 사람 집에 방 하나를 빌려 들어갔”다. 노란집에서 “쫓겨나며 미련까지 가방에 넣어 나온” 그날 이후 동자동엔 한번도 가지 않았다. 서대문구 매입임대주택으로 ‘집단 이사’한 5명(☞ 4회 ‘파편이 되어’)도 동자동을 고향처럼 찾아오다 발길을 끊었다.
동자동을 떠난 주민들 중에선 10명(22.2%)이 살아 있었다. 그 동네를 벗어났다고 가난까지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이주한 도시에서도 그들은 가장 가난한 방으로 숨어들었다.
301호 김중용(가명·68)은 방이 아니라 병실에 있었다. 건강이 악화돼 장기 입원(1명, 2.2%) 중이었지만 병원 위치나 안부를 궁금해하는 사람은 없었다.
노란집에서 쫓겨난 사람들 가운데 현재 동자동 거주자는 9명(20%)이었다. 강제퇴거 전 지하6호 이필숙(가명·73)은 옆방 서혜자(가명·2018년 5월 사망)와 “달랑 2명”뿐인 여성 주민이었다. 10년 사이 대장암과 심장 수술을 받고 체중이 크게 줄었다. 동자동 안에서만 2차례 더 이사했다. ‘이사’라면 누구보다 105호 민태진(가명·57)이었다. 퇴거 딱지가 붙자 가장 먼저 방을 뺐던 그는 공사 뒤 노란집으로 가장 먼저 돌아왔다. 9개월 동안 같은 골목 건물들을 오가며 4차례의 ‘자발적 이사’를 했다. 노란집에서도 다시 나온 그는 자신도 세지 못할 만큼 ‘강박적 이사’를 되풀이했다.
101호 고정국(가명·68)과 206호 백대진(가명·67)은 매일 점심을 같이 먹었다. 퇴거 6년 뒤 ‘동자동 반세기의 최대 이슈’(☞ 5회 ‘AI 시대 박제된 가난’)가 터졌을 때 두 사람은 주민들 맨 앞에 섰다.
지난해 8월 ㅎ봉사회 단장이자 노란집 관리인 ‘최반장’에게 “그분 비서관한테서 연락이 왔”다. “며칠 전 찍은 (노란집 도배·청소) 장면을 언론 홍보에 쓰고 싶다며 사진을 요청”했다. 부인 명품백 사건을 수사하는 검찰의 방문조사가 특혜가 아니라고 주장한 대통령 국정브리핑(8월29일) 직후 일제히 뉴스를 탔다.
“뭐 그 양반만 오나. 서울시장도 오고, 당대표 출마자도 오고, 여야 국회의원들도 오고. 사진 필요한 사람들은 다 오지. 다들 툭하면 오고 그걸로 끝이지.”
백대진은 시큰둥했다. 10년 전 45명을 쫓아내느라 얼굴 노래진 건물이 사진 속에서 마른버짐을 피워 올렸다. 떨어져 나간 페인트 조각 아래로 노랑도 덮지 못한 잿빛 가난이 삐져나왔다.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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