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대통령이 내 상사라면 [노원명 에세이]

2025. 12. 21.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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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하는 이재명 대통령. [언햡뉴스]
지난 11일 시작된 이재명 대통령 주재 생중계 업무보고는 엄청난 뉴스를 생산했다. 매일 대통령이 쏟아낸 말로 지면이 채워졌고 그 와중에 참혹하게 깨진 사람들, 드물게 칭찬받은 사람들이 화제가 됐다. 어떤 이들은 “대통령이 동네 이장처럼 말한다”고 혀를 찼다. 반면 “이것이 박정희식 디테일”이라며 이 대통령의 업무 스타일을 박정희에 비견하는 보수 유튜버도 있었다.

평생 월급쟁이로, 누군가의 부하로 살아온 나는 ‘이 대통령이 내 상사라면’ 하고 상상해 보았다. 누구에게나 최고의 상사는 자신을 인정해주는 상사다. 운이 좋아서 내가 이 대통령 눈에 들었다면 나는 그를 ‘엄청난 욕심과 학습 능력에 탱크같은 추진력까지 겸비한 상일꾼’으로 칭송했을 것이다. 불행히도 눈 밖에 났다면(이학재 인천공항공사 사장처럼) 우울증에 걸렸거나 그전에 사표를 집어 던졌을 걸로 확신한다. 소위 ‘케미’가 맞지 않는다는 가정하에 이 대통령은 ‘기피 상사’가 될만한 여러 자질을 보여주었다.

첫째 위계를 앞세운 억지형. 오래전 일이다. 사회부에서 부처를 출입하다 정책 특종을 하나 건졌다. 부처 발표에 앞서 쓴 것인데 국회로 넘어간 뒤 입법 단계에서 다른 언론사 정치부가 다시 다뤘다. 데스크가 전화를 걸어 “왜 국회 통과를 몰랐느냐”고 다그친다. 언론사의 낙종 책임은 출입처가 기준이다. 정치부 낙종을 사회부 특종 기자에게 따지면 대개는 ‘뭐지?’ 할 것이다. 부당함을 따지자 데스크가 ‘출입처가 뭐가 중요하냐’고 한다. 억지였다. 피차 목소리가 올라가면서 욕을 하지 않고 성량을 어디까지 올릴 수 있는지 흥미진진한 실험을 했다. 그 후로 상사는 내게 억지를 부리지 않았지만 손해를 본 것은 아랫사람인 나였다.

이학재 인천공항 사장의 업무보고는 그때 기억을 소환했다. 책갈피에 숨긴 달러는 관세청에 질의할 문제다. 이학재 사장이 딱 부러지게 ‘그건 내 소관 아니다. 잘 모른다’고 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는 좀 어버버했다. 세상의 부하들은 보통은 이학재 사장 같고 아주 드물게만 ‘그게 왜 내 책임이냐’고 항변한다. 이 대통령은 쥐잡듯 몰아붙였다. 윗사람이 정확하지 않은 팩트로 아랫사람을 질책할 수는 있다. 거기에 경멸과 신경질이 더해지면 억지가 된다. 그날 이 대통령은 화를 크게 냈는데 견문발검으로 보였다.

이 대통령은 보고자의 답변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모르면 모른다고 말하라’고 발분했다. 그걸 통쾌하다고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나는 꽤 불편했다. 아랫사람은 무슨 질문에도 아는 만큼 최선을 다해 답변하려 한다. 그건 아는 척이 아니라 애를 쓰는 것이다. 모른다 한다고 그냥 넘어가지도 않았다. 대통령이 ‘에휴, 됐습니다.’ 하는 장면이 여러 번 있었다. 누구는 카타르시스를 느꼈겠지만 나는 헛웃음이 나왔다.

둘째 편파. 이 대통령이 창피와 당혹감을 안긴 사람 중에는 유독 지난 정부 때 임명된 기관장들이 많았다. 이학재 사장, 박지향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 함진규 한국도로공사 사장 등이 그런 경우다. 박 이사장에는 임명 시기를 묻기도 했는데 그 뜻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전 정권 인사 중에 이재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만이 농담을 주고받는 등 화기애애했다. 대조적 분위기를 감지한 사람이라면 이 대통령과 이 이사장이 대학 동문이라는 사실에 주목했을 것이다. 과연 한국 사회에서 학연은 진영도 초월한다.

셋째 자기과시. 우리는 각자 모두가 우주의 중심인 존재들이다. 자기 현시는 실존의 공통 숙명 같은 것이지만 너무 강하면 빈축을 산다. 세상의 많은 상사가 자기 존재감 과시라는 욕망의 포로로 살아간다. 일이 되게 하는 것보다 자기 흔적을 남기는 게 우선인 사람도 있다. 기존의 아이디어를 일단 흠집 내고 뜯어고친다. 이 과정을 현란하게 가져가는 기술자들은 유능하다는 소리를 듣는다. 알고 보면 똑같은 얘기를 돌려서 할 뿐이다. 개선과 상관없는 그냥 ‘소꿉장난’이다. 조직의 시간과 정력이 그렇게 낭비된다.

이 대통령의 ‘환단고기’ 발언에 무슨 깊은 뜻이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나는 그 질의를 ‘당신들 이거 알아?’ 로 해석했다. ‘역사학 소꿉장난’. 탈모 치료를 건강 보험으로 커버하는 방안을 검토해 보라는 지시는 좀 의외였다. 이 대통령은 현란한 디테일을 자랑하다가 가끔 엉뚱한 데서 펑크를 낸다. 탈모치료 급여 주장은 탈모치료도 모르고 건강보험도 모를 때 할 수 있는 얘기다. 소꿉장난이다.

상사가 하는 말은 반박되는 경우가 드물다. 틀린 지시도 실행에 옮겨진다. 조직의 ‘삽질’이 시작되는 것이다. 삽질이 많은 조직은 본질적인 일을 못 한다. 따라서 상사는 잔소리하더라도 본질에 관계된 얘기를 해야 한다. 무불통지 만물박사처럼 이것저것 아는척하는 건 디테일이 아니라 자기과시고 조직을 헛일하게 만든다.

세상 모든 상사는 장단점이 교차하는 복합적 존재다. 진선진미한 상사는 없다. 누구에게는 장점으로 보이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단점이 될 수도 있다.내가 개인적으로 베스트로 꼽는 상사는 장6단4, 최악은 장4단6쯤 됐던 것 같다. 프로야구에서 4할을 치는 타자는 불가능에 가깝고 2할 밑으로는 버티기 어렵다. 이 대통령은 업무에 대한 열정만큼은 톱클래스에 속한다. 그가 덜 화내고, 더 공정해지고, 자기과시 욕망을 억제해 장점이 단점보다 많은 대통령으로 기억되었으면 좋겠다.

[노원명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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