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코스트 생존자 후손은 왜 팔레스타인과 연대할까 [경계의 사람들]

가자지구는 휴전 이후로도 이스라엘의 공습에 시달리고 있다. 가자 정부 ‘미디어 오피스’에 따르면 휴전일인 10월10일부터 11월30일까지 이스라엘은 공습과 포격, 사격을 포함해 총 591회 휴전협정을 위반했다. 가자 보건부에 따르면 가자지구 사망자는 7만명이 넘었다. 기반시설과 식생이 대부분 파괴됐고 마실 물을 구하기도 어렵다. 전 세계는 그들의 고통을 지속적으로 보고 있다. 팔레스타인 출신 작가 사라 아지자(Sarah Aziza)는 〈목격자의 일(The Work of the Witness)〉에 이렇게 썼다. “집단학살 이후의 세계는 이전과 같을 수 없고, 같아서도 안 된다. 목격자는 현실의 선을 붙들고 있는 사람이며, 정상성이라는 거짓말을 식별해내고 거부하는 사람이다. 우리가 본 것에 의해 부서질 때, 우리는 인간의 몸을 한 파열이 된다(번역: 서제인).” 삶의 한 시점에 ‘가자’를 목격한 뒤, 기꺼이 그 ‘파열’이 되기로 한 세 사람의 이야기를 여기 엮었다. 이들은 홀로코스트 생존자 후손으로서, 식민지 지배의 과거가 있는 일본인으로서, 병든 어머니를 돌봐야 하는 한국인으로서 가자와 마주했다. 역사의 각기 다른 지점에서 가자가 겪은 오랜 폭력과 마주쳤지만, ‘가자’라는 하나의 좌표 아래 모여 오늘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 2023년 10월, 미국 시카고, 릴리
2023년 10월7일, 하마스의 이스라엘 기습 공격인 ‘알아크사 홍수’ 뉴스를 처음 본 순간 릴리는 일상이 산산이 부서질 거라고 이미 예감했다. 릴리가 다니는 직장은 유대인 비영리단체였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하마스의 공격에 어떻게 반응할지 뻔했다.
단체는 곧 “어떤 상황에서도 이스라엘과 함께한다”라며 공식 입장을 밝히고 친이스라엘 행사와 집회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이스라엘이 어떤 대응을 하든 정당하다는 식의 거친 말이 단체 안을 오갔다. 팔레스타인 사람에 대한 인종차별적 말을 서슴없이 늘어놓는 동료도, 바로 이튿날 이스라엘 방위군에 입대한 동료도 있었다. 릴리는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 못하고 울면서 가자지구에서 전해지는 소식을 보았다. 잠을 잘 수도, 밥을 먹을 수도 없었다. 기나긴 하루를 보내고 퇴근하는 길엔 결국 “나는 무엇에 동의하고 있나?”라는 질문 앞에 서게 되었다. 단체에 계속 남는 것이 도덕적 타협 같아서 급기야 공황발작까지 일으켰다.
같은 종교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이 대개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것처럼 느껴져 신을 부르는 게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릴리는 신을 떠올렸다. 오랫동안 자행된 폭력을 옹호하는 단체에 대해 어떤 입장에 설지는 신 앞에서 결단해야 할 문제였다. 한 달을 채 넘기기도 전에 그녀는 사표를 내고 무직자가 되었다. 릴리에게 앎이란, 믿고 있던 신념 체계와 거주하던 공동체를 제 손으로 허무는 일일 때가 많았다.
릴리의 할머니는 유대인이고 홀로코스트 생존자다. 아버지가 강제수용소에 끌려가자 어머니의 손을 잡고 고향인 독일을 탈출했다. 네 살 아이는 독일 동부 국경을 넘어 만주와 홍콩을 거쳐 배를 타고 미국 샌프란시스코까지 갔다. 인디애나폴리스에 정착해 생존했지만 가족과 친척 대부분을 잃었다. 트라우마는 나선형의 이야기가 되어 기억 안에서 되풀이되었다.
할머니는 손녀 릴리를 품에 안게 되었을 때도 끔찍했던 홀로코스트의 기억을 구전동화처럼 들려주었다. 릴리의 동그랗고 따뜻한 뺨에 얼굴을 비비며, 이스라엘의 건국을 오래오래 기뻐했다. “우리가 영원히 안전할 수 있는 국가가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할머니는 어린 릴리에게 말하곤 했다. “그 땅은 비어 있었어. 땅 없는 사람들을 위한, 사람 없는 땅이었어.”
할머니의 이야기가 완전히 거짓말이었다는 걸 릴리는 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하고야 알았다. ‘비어 있는 땅’은 없었다. 대대로 살아오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강제로 추방하고 학살하는 1948년의 나크바를 거쳐 이스라엘이 건국됐다. 유대교 신앙 어디에도 “민족국가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가르침은 없었다. 빼앗긴 고향에 대한 할머니의 진한 슬픔을 느낄 때면 릴리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겪고 있는 추방과 억압이 유럽의 유대인으로서 할머니가 겪은 홀로코스트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 2024년 10월, 대한민국 서울, 서제인
제인이 소셜미디어 타임라인에서 그 영상을 보게 된 건 우연이었다. 온통 주홍빛 불길이 가득한 영상이었다. 사람이 산 채로 불에 타고 있었다.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알아크사 병원 밖 대피용 임시 캠프 침대에 누워 정맥주사를 맞던 열아홉 살 청년 샤반 알달루. 그는 일주일 전 다른 폭격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아 병원 치료를 받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와 동생들도 같은 불에 타 죽었다. 이스라엘 방위군의 병원 폭격 결과였다.
제인은 건강이 자꾸만 악화되는 어머니를 걱정하며 간병 준비를 하던 차였다. 불에 타는 사람이 제인의 어머니와 다를 바 없이 아픈 몸에 주사를 맞고 있던 환자라는 사실을 견디기 어려웠다. 희미하게 알던 집단학살이 날것으로 다가왔다. 영상을 보기 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그 뒤로 매일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공유하는 소식을 소셜미디어에서 찾아 확인했다. 당장 돈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조금씩 소액 기부를 했다. 집회에 나갔다. 1인 시위를 했다. 뭔가 부족하게 느껴졌다.

무언가 할 수 있는 일이 더 있지 않을까? 문득 한국 사람들이 여전히 가자지구의 상황을 잘 모를 수 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가자 사람들의 글을 읽다 보면 공통적으로 되풀이되는 질문이 있었다. “세상은 어디에 있습니까? 인간다움은 어디에 있습니까?” 사람들이 가자 바깥에 있는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여전히 믿음과 기대를 걸어주는 마음을 저버리고 싶지 않았다. “학살을 멈출 수 없다면 우리의 목소리를 돌에 새겨달라. 우리가 이곳에 있었다는 걸 기억해달라”는 가자 사람들의 목소리를, 시급히 옮겨 적고 널리 퍼뜨릴 수 있지 않을까?
번역은 본래 제인의 본업이기도 했다. 한국에서 새벽녘이면 가자지구는 자정으로 접어들 무렵이라, 하루 사상자 수와 공격받은 장소들의 상황이 집계되었다. 사람들이 자는 시간에 참혹한 공격이 일어나곤 해 밤늦도록 지켜보며 가자 소식을 번역해 공유했다. 잠깐 눈을 붙이곤 아침에 일어나 새로 번역할 글을 찾았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일상을 살아가고 있던, 우리와 다를 바 없는 보통의 인간이라는 사실을 전달해서 거리를 좁혀보고 싶었다. 현장에 있는 평범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뒤졌다. ‘WANN(We Are Not Numbers, wearenotnumbers.org)’ 같은 사이트에 올라오는 젊은 팔레스타인 작가들의 글이 그랬다.
글을 읽다가 이런 걸 알게 됐다. 가스가 없어서 매일같이 오랜 시간 고생해 불을 피워야 간신히 커피 한 잔을 끓일 수 있다는 것, 고리대금업자들이 중간 수수료를 50%나 가져가서 현금 1만원을 인출하려 해도 5000원밖에 뽑을 수 없다는 것, 아기들이 기저귀조차 없어서 비닐봉지를 차고 있다는 것.
또 이런 걸 깨닫게 됐다. 세상 사람들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지만, 다른 시각으로 본다면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진실을 바라보고 실체를 말한다는 측면에서 유일하게 자유로운 사람들이었다. 그 자유롭고도 고통스러운 목소리를 한 글자, 한 글자 한국어로 옮기다 보면 요동치던 감정도 잠시나마 잦아들었다.
# 1983년 1월, 일본 도쿄, 오카 마리
그해 도쿄에는 레바논 베이루트의 사브라 샤틸라 난민캠프 학살 현장에 진입했던 일본인 보도사진가가 수거해온 유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불도저가 팔레스타인 난민 학살 흔적을 땅속으로 말끔히 밀어 넣는 와중에 긴박하게 주워 담은 물건들이었다. 마리는 피해자들의 마지막 순간을 증언하는 유품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충격을 느꼈다. 학살의 끔찍함보다도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죄책감에 압도되었다.
학살이 일어난 1982년 9월16일, 아랍 문학 전공자인 마리는 학살 장소에서 600㎞ 떨어진 이집트 카이로에서 고대하던 유학 생활을 만끽하고 있었다. 문학의 힘을 깨닫게 해준 팔레스타인 난민 출신 작가 가산 카나파니를 연구하려 했으면서도 지척에서 벌어진 학살을 몰랐다. 그 가책이 그 뒤 40년 넘도록 이어간 팔레스타인 연대 활동의 출발점이 됐다.
일단 마리는 일본에서 시작된 ‘팔레스타인 어린이 후원운동’에 초창기부터 참여했다. 아랍어를 할 줄 알기에 아이들의 편지를 번역하고 현지 활동가들의 통역을 맡았다. 난민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육필 편지와 그들의 삶에 직접 맞닿은 목소리를 번역하고 있노라면,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이야기가 마리의 마음 안쪽에 깊고 끈끈하게 자리 잡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팔레스타인에 대한 관심은 자신의 조국인 일본이 식민지 지배와 함께 침략·점령을 했던 전범국가라는 깊은 자각과도 이어져 있었다. 둘 다 유럽식 식민주의적 침략과 제국주의 역사의 산물이었다. 일본이 이스라엘이라면, 팔레스타인은 조선이며, 만주이며, 아이누의 땅이며, 류큐(오키나와)였다.
마리의 아버지는 군인의 아들로 태어나 육군학교를 졸업한 순수한 ‘황국 소년’이었다. 그러나 일본이 다른 나라에 저지른 침략과 잔혹 행위를 알게 되며 사상적 전환점을 맞았다. 장교였던 자신의 아버지에게 “전범 수용소로 가라”고 내뱉고 의절 당했을 정도다. 마리는 아주 어릴 적부터 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일본군의 잔인무도한 행위가 담긴 슬라이드에 대해 듣고 자랐다. 조국의 식민지배에 대한 조숙한 직면은 오카 마리라는 인간의 밑바탕을 이루는 뼈대가 되어주었다.
그 토대에 ‘국민의 특권’ 바깥에서 난민적 삶을 사유하는 재일 조선인 작가 서경식 선생 등과의 교류가 더해지자 인식이 더욱 확장되었다. 일본 식민지 지배에 맞선 한국인들, 그리고 군사정권에 맞서 싸운 한국의 민주화 투쟁에서 인간이 자유롭고 존엄한 삶을 끝내 갈망하는 존재라는 걸 배웠다. 마리에게 팔레스타인이 평화를 되찾는 일은, 동아시아에서 역사적 불의 속에서 스러져간 이들에게 정의를 돌려주는 일과도 맞닿아 있었다.
# 2025년 11월, 미국 샌프란시스코, 릴리
전설적인 재즈 뮤지션 찰리 파커의 별명 ‘버드’와 20세기 부조리극의 대가 새뮤얼 베케트의 이름을 딴 동네 서점 ‘버드 앤드 베케트’. 서점 이름이 적힌 낡은 나무 간판이 눈에 띄었다. 평소라면 재즈 밴드의 라이브 연주가 흘러나왔을 비좁은 문으로, 사람들이 끊임없이 밀려 들어왔다. 릴리는 꽤 긴장한 채로 안쪽에서 사람들을 맞이했다.
가자지구의 일곱 가족을 위한 이 모금 행사를 돕겠다고 자원한 건 릴리였다. 동네 음식점에서 기꺼이 기부해준 따끈한 피자와 갓 구운 빵에서 피어오르는 향이 서점 가득 퍼졌다. 샌프란시스코 진보 진영 행사라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거리의 밴드’ 브라스 리버레이션 오케스트라의 힘찬 합주가 공기를 달궜다. 서점 주인은 공간을 대가 없이 빌려주고 의자를 넉넉히 내어놓았다. 릴리는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누어주고, 기부받은 이런저런 상품을 분주히 경매에 부쳤다.
모금함을 든든히 채워주는 낯선 사람들의 호의와 지지에 둘러싸여 있으니 문득 긴장이 탁 풀렸다. 가자지구 사람들을 돕는다는 공통의 목적 아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두 시간 남짓 행사에선 2000달러(약 300만원) 가까이 모금되었고, 모금액은 가자로 보내졌다.

2년 전 일을 그만둔 뒤부터 릴리는 팔레스타인 해방 시위와 행진에 참여해왔다. 그러다 손에 잡히는 도움을 주고 싶어서 모금에 뛰어들었다. 물가가 말도 안 되게 올라 있고 손에 현금을 쥐는 게 귀한 상황이라는 소식이 계속 들려왔다. 릴리에게 가자에서 들려오는 폭력과 굶주림의 소식은 홀로코스트와 얽힌 가족사에서 대대로 익숙하게 들어온 이야기와 겹쳤다. 사람들이 음식을 먹고, 텐트를 사고, 물을 마시고, 약을 구할 수 있도록 돈을 모아야 했다. 가자지구에서 도움을 요청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 그들을 도우려 모금에 나선 활동가들은 하나둘 연결되기 시작했다. 현지와 닿을 수 있는 통로는 소셜미디어뿐이었다. 이미지 역검색으로 사진의 진위를 확인하거나, 화상통화로 얼굴을 마주하며 사람들을 알아갔다.
가자지구의 의대생 알라와도 그렇게 알게 됐다. 폭격 아래에서도 학업을 포기하지 않는 알라를 도왔다. 자주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친구가 되었다. 상황은 빠르게 나빠졌다. 처음엔 연락이 원활했지만 피신해 있던 아파트에서마저 쫓겨난 뒤론 긴 침묵이 이어지다가, 이젠 와이파이가 되는 곳에 갈 때나 겨우 생존 소식이 날아오곤 한다.
미국 내 관련 시위에 참여했다 체포되는 사람들에 대해 듣다 보면 모금과 송금 활동을 하는 것이 안전하지 않게 느껴질 때도 있다. 하지만 유대계 미국인 시민권자로서 특권과 안전을 누리고 있으니 릴리는 그것을 위험을 떠안는 데 쓰고 싶다. 무엇보다 지금 릴리에게 소중한 건 국경과 경계를 넘어 서로 연결되고, 인간으로서 서로 만나는 일이다. 그저 저녁을 준비하다가도 가자에 있는 친구들에게 직접 음식을 나눠주고 싶다는 충동이 치민다.
가자에선 식사 초대가 중요한 환대의 문화다. 그들이 음식을 구할 수 있도록 돈을 모아 보내는 건, 릴리 나름의 초대인 셈이다. 뉴스 안에서 ‘끔찍한 테러리스트’나 ‘무력하고 굶주린 피해자’로만 대상화되기 십상인 팔레스타인 사람들이지만, 실제로 연결되고 알아가다 보면 그들이 그저 엄청나게 복잡한 일상을 처리하고 있는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스무 번 넘게 강제 이주를 당한 친구 알라는 최근 6년간의 의대 생활을 마치고 졸업했다. 알라가 보내온 졸업사진 속 배경은 기적처럼 파괴되지 않은 가자지구 어느 거리의 한 부분이었다. 그 앞에 서서 학사모를 쓰고 환하게 웃는 알라는, 근사해 보였다.
# 2025년 11월, 한국 서울, 서제인
제인은 가자지구의 작가이자 번역가인 알라 알카이시가 굶주림에 대해 쓴 글을 옮긴다. “그럼에도, 이 무너진 일상 한복판에서도, 나는 여전히 우리의 굴하지 않는 인간다움을 상기시켜주는 순간들과 마주친다. 한 여인이 마지막으로 남은 납작한 빵을 반으로 갈라 이웃에게 내준다. 한 아이가 불길과 검댕으로 시커매진 벽에 환한 색 꽃들을 그려 넣는다. 어느 할머니는 물이 끓고 있는 냄비 위로 쿠란의 첫 장인 알 파티하를 읊는다. 냄비에 더 넣을 재료가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한다. 이런 몸짓들은 헛된 것이 아니다. 이것들은 저항의 행위다. 제도와 체계가 무너져내린 곳에서 신성함을 유지하는 건 대가를 바라지 않고 건네지는 인간의 몸짓이다.” 굶주림의 증언인 동시에 인간성의 증언인 알카이시의 문장을 보면 무엇이든 하고 싶어진다.
초반엔 팔레스타인 연대 활동을 하며 “세상은 안 변해. 너만 다쳐. 이건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라는 말을 들었다. 동시에 그 말을 듣지 않았다. 자율 기부 형식 메일링 서비스를 열고 기부금을 모아 가자로 보냈다. 그리고 직접 경험하며 알게 됐다. 세상이 변한다는 걸. 움직여서 그릴 수 있는 궤적은 아주 작았지만 적어도 그만큼 세상이 변했다.
멀리서 보면 별일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제인의 삶도 변했다. 사람들을 다시 사랑하게 됐고 연결의 힘을 믿게 됐다. 개인 기부를 이어가다 한계에 다다라 더 이상은 어렵다고 힘겹게 털어놓았을 때마저 “그동안 당신이 해준 일을 잊지 않겠다. 정말로 고마웠다. 우리도 중요하지만, 당신 역시 행복한 삶을 사는 게 우리에게는 중요하다”라고 말해주던 가자의 친구들을 자주 떠올린다.

# 2025년 11월, 일본 교토, 오카 마리
2023년 10월 이후로 일본의 대표적 팔레스타인 연구자로서 강연을 이어가고 있는 마리는 “가자 사람들은 하마스를 어떻게 생각하나?”라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마리는 질문을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자 사람들은 우리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
마리는 2년간 계속된 집단학살을 방관하는 국제사회의 침묵을 공범으로 받아들이며, 그것을 인종주의로 간주한다. 이스라엘에 대한 하마스의 기습공격은 점령 폭력에 대한 ‘대항 폭력’이다. ‘10월7일’의 공격을 낳은 건 이스라엘이 국제법을 위반해 저지른 봉쇄와 점령의 폭력이었다는 사실을 직시하는 비판적 사고가 필요하다고 마리는 말한다. 가자가 16년 이상 이스라엘에 의해 완전 봉쇄돼 있었고, 60년 가까이 점령당해왔으며, 80년 가까이 ‘귀환권’이 부정되어왔다는 사실을 하마스의 공격과 함께 말해야 한다고.
하마스의 전쟁범죄를 ‘테러’라고 비난하려면 그보다 앞서 이스라엘이 수십 년에 걸쳐 반복해온 국제법 위반, 전쟁범죄, 반인도적 죄를 ‘국가 테러’로 가장 강하게 규탄해야 공정하지 않을까? 2018년만 해도 가자지구의 사람들이 대규모 비폭력 행진 시위를 벌였지만 이스라엘은 실탄으로 대응했다. 200명 이상이 죽고 1만명이 다쳤다.
마리가 사는 교토에서는 매주 팔레스타인의 평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열린다. 이미 100번 넘게 시위가 열렸다. 폭염에도, 한겨울에도, 매주 시민 100여 명이 모여서 교토의 붐비는 거리를 행진한다. 마리가 2009년 교토의 시민들과 함께 결성한 낭독 집단 ‘국경없는 낭독자들’은 가자 사람들의 이야기를 일본어로 전하는 공연을 일본 각지에서 열고 있다. 지금까지 교토·히로시마·도쿄에서 일본인들의 목소리를 빌려 가자 사람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도록 했다.
일본인인 마리에게 팔레스타인 연대는 각별하다. 일본은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과거 식민지 지배와 침략을 하고, 점령을 행했다. 일본 국민이 점령으로부터 해방을 요구하는 사람들의 무장투쟁을 단지 폭력이라는 이유로 테러라고 부르는 건, 역사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태도라고 마리는 단호하게 말하곤 한다.
마리는 팔레스타인 문제에서 식민주의의 구조를 본다. 근대 500년에 걸친 유럽의 식민주의적 침략과 제국주의 맥락 안에 근대 일본이 있고, 이어 이스라엘이 있다. 그러니 가자는 동시대 인간의 보편적 사상 과제다. 윤리적 응답 책임은 모든 인간에게 있다.

20대부터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함께해온 마리에게 그들은 ‘피해의 역사’ 들려주기를 넘어 깊은 환대를 보냈다. 팔레스타인과 관계를 맺는 일은 마리에겐 살아간다는 것과 동의어다. 삶의 축복이다. 이를테면 이런 희망에 대해 배울 기회다. 10월 말, 수평선까지 폐허로 뒤덮인 가자지구에서는 ‘제1회 가자 국제 여성영화제’가 열렸다. 공터에 스크린을 세우고 플라스틱 의자를 놓은 소박한 영화제였다. 230만명 인구의 10명 중 9명꼴로 집을 잃고, 매일 굶어죽는 사람들이 생기는 와중에도 세계 20여 개국 작품을 모아 상영회를 열었다.
마리에겐 이 장면이 이스라엘에 대한 도전과 선언으로 보였다.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꺾이지 않는다. 폐허 속에서도 다시 일어난다.” 세계에 개입한다는 건 오늘과 다른 세계를 상상하고 창조하며, 세계의 지배 방식을 거스르고 저항하면서 다른 세계를 구상하는 일이다.
10여 년 전 마리가 레바논을 방문했을 때 베이루트 난민캠프에서 만난 한 소녀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반드시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갈 거예요. 설령 100년이 걸리더라도.” 자기가 살아 있을 땐 불가능하다는 걸 전제하고 말하는 듯한 10대 소녀의 말에 마리는 무심코 이렇게 대답하고 말았다. “100년이나 걸리지 않아. 베를린 장벽도 무너질 때는 한순간이었어. 네가 살아 있는 동안 팔레스타인은 반드시 해방될 거야.”
입에 발린 위로가 아니라, 마리는 그 순간 그 말을 믿었다. 그리고 소녀에게 그렇게 말한 이상 지금껏 그 말에 책임을 지고 있다.
샌프란시스코·김인정 (논픽션 작가) editor@sisain.co.kr
▶좋은 뉴스는 독자가 만듭니다 [시사IN 후원]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