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운석의 우리술 이야기)술은 그 시대의 문화를 빚는다

한국전통주를 만드는 일은 '빚는다'고 표현한다. 전통주는 담는 것도 아니고, 만드는 것도 아니다. 맥주나 와인은 한국전통주와 똑같은 알코올발효 과정을 거쳐 술이 되지만 양조한다는 표현을 쓰지 빚는다고는 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해답은 한국전통주의 특징에 있다. 한국전통주는 기록의 문화이자 풍류의 문화였다. 한국전통주는 수백년동안이나 기록으로 남아 이어져온 고유의 문화이다. 술을 빚는 방법 뿐 아니라 술과 관련된 여러 가지 상황들을 상세하고 기록한 고문헌이 많다. 400년 전인 1613년에 허준(許浚, 1539∼1615) 등이 지은 한의학서인 『동의보감』을 보자.
『동의보감』이 나올 당시만 해도 술은 하나의 의약품이었다. 술은 혈액순환을 도울 뿐 아니라 한약과 함께 복용하면 빠르게 약효를 볼 수도 있었다. 그래서일까. 『동의보감』에는 감초라는 단어보다 술이라는 단어가 더 많이 나올 정도다. 물론 술의 해로운 점도 함께 지적하면서 술의 양면성을 알려주고 있다.
술에 관한 고서적은 『동의보감』 뿐만이 아니다. 『음식디미방』이나 『수운잡방』 같은 고조리서에도 술에 관한 내용이 많다. 한글로 쓴 최초의 조리서로 잘 알려진 『음식디미방』에는 146종의 음식 조리법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 책 후반부에는 삼해주, 이화주, 소곡주, 두강주 등 54개 항목의 술 이야기가 실려 있다. 단순한 술 이야기가 아니라 술을 빚는 상세한 주방문과 함께 술을 빚을 때 주의해야 할 내용들까지 수록하고 있을 정도다.
이외에도 주방문이 실린 고서적은 많다. 술빚는 방법이 포함된 이들 고문헌에 수록된 술만 해도 500종이 넘을 정도다.
이런 기록에 따르면 한국전통주는 풍류의 문화이기도 했다. 조선시대의 선비들은 술을 마시는 데도 엄격한 주도가 있어 이를 불문율처럼 지켰다.
대표적인 것이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이었다. 굽이굽이 수로를 내고 여기에 술잔을 띄워보내고 자기 앞에 술잔이 돌아올 때까지 시 한 수를 지어 낭송했다. 시를 짓지 못하면 벌주로 석 잔을 마시게 했다. 경주의 포석정이 곡수연을 즐겼던 대표적인 곳이고 전남 강진의 백운동 원림에도 곡수연의 흔적이 남아있다.
이런 선비들의 풍류는 피서음(避暑飮)으로 이어졌다. 선비들이 여름 더위를 잊기 위해 연꽃을 바라보며 술을 마셨는데 이를 피서음이라고 한다.
풍류로 즐기는 선비들의 술문화에는 벽통음(碧筩飮)을 빼놓을 수 없다. 벽통음은 연잎 술잔으로 술을 마시는 풍류놀이다. 고두밥과 누룩을 섞어 두세겹 연잎으로 싸고 발효를 시킨다. 연잎을 따와 처마밑에 매달아 두기도 했지만 연밭에서 연잎을 따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기도 했다. 3일 후 술이 익으면 연의 줄기를 자른 후 술을 담은 잎과 연결된 줄기를 비녀로 찔러 뚫어주면 술이 연 줄기의 구멍을 타고 흘러내리게 된다. 이때 줄기 끝에 입을 대고 술을 마시는데 이게 벽통주(碧筩酒)였고 또 이런 풍류를 통틀어 벽통음(碧筩飮)이라고 했다.
조선시대부터 이어져온 풍류는 술이 중심이었다. 술과 함께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고, 노래를 불렀다. 술과 함께 풍류를 즐겼다.
9월9일 중양절의 황화음(黃花飮)이 대표적이다. 중양절이 되면 문인과 시인들이 큰 술동이에 국화(황국)를 띄우고 높은 곳에 올라 시를 지었다. 1241년 이규보가 지은 『동국이상국집』에도 이런 내용이 나온다. '젊었을 때는 중양절 만나면/ 부지런히 황국을 찾았었네/ 좋은 술 나쁜 술 따지지 않고/ 이것 띄우니 향내 풍기더라'
풍류는 격조 높은 음주문화였지 단지 잘 노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시서금주(詩書琴酒)를 함께 할 정도의 인문과 예술적 소양까지 갖춰야 풍류였다. 나아가 음악과 그림이라는 문화를 생산해내는 기본 바탕이 술고 함께 한 풍류였던 것이다.
때문에 전통주 복원은 예전의 술 제조법을 현대에 맞게 재현하거나 단순히 재창조하는 것만은 아니다. 한국전통주는 문화를 빚는 일이어서다.
박운석(한국발효술교육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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