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문인들의 순수와 사랑…뮤지컬 ‘팬레터’

구정근 기자(koo.junggeun@mk.co.kr) 2025. 12. 18.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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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준한 인기 속 10주년 맞아
순수문학동인‘구인회’ 모티브
편지와 함께 오해 사랑 피어나
내년 2월 22일까지 예술의전당
뮤지컬 ‘팬레터’의 한 장면. 천재 작가 김해진과 히카루가 함께 소설을 집필하는 과정을 표현했다. [라이브(주)]
국내 창작뮤지컬의 대표 레퍼토리 ‘팬레터’가 10주년 공연으로 예술의전당에 돌아왔다. 2016년 초연 이후 재연·삼연·사연을 거쳐 맞이한 다섯 번째 시즌은, 뮤지컬 ‘팬레터’가 지닌 클래식한 매력을 여실히 보여준다.

‘팬레터’는 1930년대 일제강점기 경성을 배경으로 이상·이효석·김유정 등이 활동했던 문인 동인 ‘구인회’를 모티브로 만든 작품이다. 문학을 향한 열정과 순수한 사랑을 품은 문인들의 이야기를 중심에 둔다.

폐병을 앓고 있는 천재 작가 김해진과 그를 동경하는 작가 지망생 정세훈, 그리고 정세훈의 필명에서 태어난 가상의 인물 히카루. 세 인물이 편지를 매개로 관계를 맺으며 이야기가 전개된다.

뮤지컬 ‘팬레터’에는 1930년대 실존했던 순수 문학 동인 ‘구인회’를 모티브로 한 ‘7인회’가 등장한다. [라이브㈜]
김해진은 ‘히카루’를 여성이라고 오해한 채 편지로 사랑을 고백하며 만남을 재촉하고, 세훈은 진실을 밝히는 대신 함께 편지를 주고받으며 소설을 쓰자고 제안한다. 해진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던 세훈의 거짓말은 점차 통제를 벗어나고, 히카루는 마치 독립된 인격처럼 김해진과 편지를 나누기 시작한다.

작품은 천천히 오가는 편지 속에서 감정이 서서히 고조되고, 오해가 깊어지는 과정을 차분히 따라간다. 해진이 히카루를 처음 여성으로 오해하는 장면에서 소소한 웃음이 터져 나오지만, 극이 진행될수록 관객은 혹여 비밀이 드러나지 않을지 마른 침을 삼키며 무대를 지켜보게 된다.

대표 뮤지컬 넘버 ‘거짓이 아니야’의 한 장면. 정세훈의 필명에 불과하던 히카루는 이 넘버 이후로 구체적인 인격으로 구성된다. [라이브㈜]
이번 10주년 공연은 더 많은 관객과 만나기 위해 대학로 소극장을 벗어나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대극장으로 무대를 옮겼다. 그럼에도 연출은 새로운 변주보다 기존 무대의 정서를 지켜내는 데 집중한다. 김태형 연출가는 기자간담회에서 “아무것도 바꾸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최대한 지난 공연과 비슷하게 만들었다”며 “10년, 20년, 30년이 지나도 클래식한 작품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라 믿는다”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작품은 고색창연한 매력으로 가득하다. 1930년대 경성의 창호지와 나무 창살로 이뤄진 카페를 배경으로 문인들이 등장하는 넘버 ‘넘버 7’은 작품의 정서를 단번에 보여준다. 양장을 말쑥하게 차려입은 문인들이 재즈와 스윙 리듬에 맞춰 문학관을 노래하는 이 장면에는, 순수문학에 대한 사랑과 시대가 안긴 슬픔이 동시에 스며 있다. 환하게 노래하는 얼굴 위로 어딘가 모르게 쓸쓸한 기색이 겹쳐진다.

뮤지컬 ‘팬레터’는 1930년대 시대적 배경에 걸맞게 중절모를 쓰고 양장을 입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라이브㈜]
10년이라는 시간이 무색할 만큼, 작품 곳곳에는 여전히 영리한 연출이 살아 있다. 히카루라는 인물의 존재감을 가장 또렷하게 드러내는 장면은 넘버 ‘거짓이 아니야’다. 무대 뒤편의 그림자로 머물던 히카루가 무대 앞으로 걸어 나와 세훈과 대칭을 이루는 순간, 가상의 인격은 하나의 실체로 관객 앞에 선다. 창호지를 활용한 그림자 연출과 동선의 대비는 히카루가 세훈의 분신이면서도 동시에 독립된 인물임을 분명하게 각인시킨다.

세 인물의 관계가 본격적으로 얽히는 지점을 표현한 넘버 ‘섬세한 팬레터’도 인상 깊다. 히카루와 세훈이 함께 소설을 써 내려가는 이 장면에서 세 배우는 교차하며 파트너를 이뤄 왈츠를 춘다. 이어 세훈을 무대 위에 남긴 채 히카루와 해진이 함께 퇴장하는 동선은, 세 명의 복잡한 관계와 그 속에서 커져가는 세훈의 소외감을 단순하면서도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객석 반응도 뜨겁다. 대표 넘버가 끝날 때마다 박수가 터져 나오고, 세훈이 마침내 해진 앞에서 진실을 고백하는 장면에서는 관객들 역시 숨을 죽인다. 자극적인 장치 없이 사랑과 예술, 창작의 고통을 차분히 그려온 ‘팬레터’는 이제 하나의 클래식으로 관객에게 다가간다.

공연은 2월 22일까지.

뮤지컬‘팬레터’의 한 장면에서 히카루가 편지를 가슴에 안고 노래하고 있다. [라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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