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기술력은 세계 최고인데 변방 머무는 K-애니메이션

이경탁 기자 2025. 12. 17.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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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주는 한국 웹툰이 넘고, 돈은 일본 제작위원회가 챙긴다."

한국 애니메이션 산업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말이다.

일본이나 미국의 블록버스터 애니메이션 한 편 제작비는 수백억원에 달하지만, 우리 정부 지원금은 프로젝트당 1억~3억원, 많아야 10억원 미만 수준이다.

한국 애니메이션의 기술력은 세계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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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주는 한국 웹툰이 넘고, 돈은 일본 제작위원회가 챙긴다.”

한국 애니메이션 산업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말이다. 극장가와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방송까지 애니메이션이 주류 문화로 올라섰지만, 그 성과의 중심에 ‘한국 애니메이션’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시장은 커졌는데, 주도권은 여전히 일본과 미국 스튜디오에 있다. 한국은 소비 시장으로서의 존재감만 키웠다.

올해 국내 극장가는 ‘귀멸의 칼날: 무한성’ ‘체인소맨’ ‘주토피아2′ 등 해외 애니메이션이 장악했다. 인구 대비 관람률로 보면 일본 본토보다 한국 관객의 열기가 더 뜨겁다는 분석도 나왔다. 넷플릭스에서는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2025년 가장 영향력 있는 IP(지식재산권) 중 하나로 꼽혔고, 애니메이션 전문 채널 애니플러스는 개국 15년 만에 연간 시청률 1위를 기록했다. “애니메이션은 아이들만 보는 콘텐츠”라는 인식이 바뀌고 있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한국이 결코 원천 IP가 부족한 나라가 아니라는 점이다. ‘나 혼자만 레벨업’ ‘전지적 독자 시점’ 등 글로벌 흥행을 이끈 슈퍼 IP의 출발점은 한국 웹툰이다. 스토리 경쟁력도, 세계가 반응하는 문화 코드도 이미 입증됐다. 그럼에도 애니메이션 제작 단계로 가면 주도권은 해외로 넘어간다. 한국은 여전히 ‘원작 공급처’이거나 ‘하청 기지’에 머무는 구조다.

업계가 지목하는 가장 큰 원인은 제도다. 정부는 K-콘텐츠 육성을 외치지만, 애니메이션 정책은 여전히 유아동 산업을 전제로 설계돼 있다. 제작 지원 평가 기준에는 ‘교육적 가치’와 ‘아동 보호’가 앞에 서 있고, 성인 타깃 작품은 조금만 액션 수위나 세계관이 어두워져도 “상업성이 불확실하다”는 이유로 배제되기 쉽다. 실사 영화와 웹툰이 표현의 자유를 무기로 성장하는 동안, 애니메이션만 과거의 심의 잣대에 묶여 있는 셈이다.

지원 규모 역시 현실과 괴리가 크다. 일본이나 미국의 블록버스터 애니메이션 한 편 제작비는 수백억원에 달하지만, 우리 정부 지원금은 프로젝트당 1억~3억원, 많아야 10억원 미만 수준이다. 이른바 ‘마중물’ 역할에 그친다. 넷플릭스나 글로벌 유통 플랫폼의 기준에 맞는 퀄리티를 기대하기 어려운 구조다. 결국 제작사들은 자체 IP에 과감히 투자하기보다, 해외 대작의 하청으로 제작비를 메우는 악순환에 빠진다.

편성 구조도 산업을 보호하지 못한다. 국산 애니메이션 의무 편성 제도는 취지와 달리 형식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방송사들은 시청률이 낮은 새벽이나 비시청 시간대에 편성으로 의무를 채우고, 방영권료는 제작비의 일부에 불과하다. 제작사는 방영을 할수록 적자가 쌓인다. 일본처럼 방송사가 제작위원회에 참여해 리스크와 수익을 나누는 구조와는 거리가 멀다.

세제 지원 역시 현장을 외면하고 있다. 제작비 세액공제는 이익이 발생해야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구조다. 수년간 적자를 감내하며 IP를 키워야 하는 애니메이션 산업 현실과 맞지 않는다. 업계가 요구하는 환급형 세액공제는 재정 부담을 이유로 번번이 논의에서 밀려났다.

한국 애니메이션의 기술력은 세계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는다. 작화와 촬영, 후반 제작 역량은 글로벌 스튜디오에서도 인정받고 있다. 웹툰이라는 강력한 원천 스토리도 확보했다. 재료와 요리사는 준비돼 있는데, 주방과 조리 환경이 따라주지 않는 구조다.

지금 필요한 것은 또 하나의 지원 사업이 아니다. 애니메이션을 ‘아동용 교육 콘텐츠’가 아닌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바라보는 관점의 전환이다. 성인 타깃 작품을 전제로 한 심의 기준 정비, 실질적인 세제 지원, 불공정한 편성 구조에 대한 제도적 손질이 없다면 상황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

애니메이션 전성시대는 이미 시작됐다. 남은 질문은 하나다. 한국은 이 흐름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을까. 아니면 2026년에도 한국 웹툰 주인공이 일본어를 쓰며 싸우는 모습을 극장에서 지켜보는 소비자 역할에 머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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