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 만취 차량이 앗아간 아빠의 다리… 일상이 멈췄다 [탐사기획-당신이 잠든 사이]
김석곤씨의 고통
아버지는 다리가 튼튼한 사내였다. 건실한 몸은 그의 유일한 밑천이었다.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농사일을 돕다가 십 남매의 입 하나라도 덜어보고자 전북 임실 산골 마을을 떠나 처음 상경했을 때도, 막노동판을 구르다 구로동 럭키아파트 경비복을 입었을 때도, 불혹을 넘긴 나이에 쓰레기 청소차의 뒷발판에 올라섰을 때도 그는 두 다리로 버텨내는 세상이 거뜬했다.

“아버지, 인자 일 그만두시면 안 될까요. 꿈자리가 사나워서요.” “딱 1년만 더 하고, 내 나이 칠십까정만 채우고 그만둘랑게.”

석곤은 평소 1층 카운터에서 목욕비 1만원을 치르고 열한 계단을 밟아 2층 탈의실로 올라간다. 빛바랜 신발장에 운동화를 밀어 넣고 작업복을 벗을 때, 15인치 텔레비전에선 밤새 벌어진 사건·사고를 전하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이발소와 덜거덕거리는 녹슨 운동기구가 있는 낯익은 풍경. 다시 열다섯 계단을 더 올라 3층 남탕에 들어서면, 비로소 석곤의 시간은 멈춘다.
수증기가 가득한 남탕 문을 열면 세신사가 먼저 보인다. 그 옆으로 2.5평 남짓한 작은 사각형의 온탕이 석곤을 기다린다. 40도가 채 되지 않는 온탕에 몸을 담그면 세상 모든 근심이 사라지는 듯했다. 노동의 피로를 몸에 달고 사는 석곤에게 냉탕은 사치처럼 느껴졌다. 석곤은 늘 목욕탕 벽에 붙은 ‘몸을 씻고 들어가세요’ 팻말을 힐끔 쳐다봤다. 혹여 세상의 편견이 그곳까지 따라온 것은 아닐까 싶어서였다.
몸이 노곤해지면, 목욕탕 구석의 간이 수면실로 향했다. 미약한 온기만 있는 타일 바닥에 딱딱한 목침을 베고 잠시 눈을 감으면 간밤의 노동을 잊을 수 있었다. 그렇게 두세 시간을 보낸 뒤에야 아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향했다.
“유일한 취미가 목욕일 겁니다. 일 말곤 다른 걸 하는 걸 본 적이 없어요.” 석곤과 십수 년을 함께 일한 갑장의 동료 상차원 한대현의 말처럼 석곤에게 목욕은 단순히 몸을 씻는 일 그 이상의 의미였다.
“아버지 식사하세요.”

7호선 남구로역 4번 출구 앞 오르막길에서 좌회전 신호를 기다리던 석곤은 운전원 유충기가 모는 음식물 수거차의 뒷발판에 올라 손잡이를 꽉 움켜쥐고 있었다. 더위 탓에 가슴팍 지퍼를 내려 땀을 식히던 찰나였다.
“콰앙!”

“경찰입니다. 김석곤씨 가족 되시죠? 뼈가 좀 보이는데… 빨리 오셔야겠습니다.”
어리둥절한 종현은 택시를 잡아타고 동작구 보라매병원으로 무작정 달려갔다. 단순 골절상이라고 믿고 싶었다. 평생 술, 담배를 멀리한 무쇠 같은 아버지였으니까. 응급실에서 마주한 아버지의 다리는 으깨지고 망가진 상태였다. 그런 사고를 당하고도 버틸 수 있는 무쇠 다리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절단해야 합니다.”
보라매병원 응급실 당직의는 엑스레이 사진을 보여주며 고개를 떨궜다.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그곳에선 수술이 여의치 않았다. 자정을 넘긴 시간, 수술할 병원을 찾아 헤맸다. 나흘 전 서울권역외상센터로 지정된 국립중앙의료원이 가까스로 석곤을 받아줬다. 종현은 자정을 넘긴 0시57분, 아버지의 보호자 자격으로 함께 구급차에 올랐다.
다음날 오전 1시35분, 국립중앙의료원 소생실에서 석곤을 처음 만난 외상외과 소속의 전문의 김미나는 진료차트에 ‘다리 으깸 손상, 경골·비골(무릎부터 발목까지의 다리뼈) 개방성 골절’이라고 기록했다. 그는 석곤의 가족들에게 절단의 불가피성에 관해 설명했다. 의사들은 이를 ‘나쁜 소식 전달하기’라고 부른다. 김 전문의는 “절단은 환자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는 굉장히 큰 일이다 보니 설명하는 데 힘들고 괴로웠다”고 했다.
수술 준비가 끝난 건 새벽 2시56분이었다. 집도를 맡은 정형외과 전문의 이재헌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가장 큰 문제는 외상성 쇼크였고, 출혈이 많아 사망 위험이 컸습니다. 혈류가 끊겨 다리가 매우 차가웠어요.”

다음 단계로 무릎 관절 위, 손가락 하나 길이만큼을 남기고 메스로 근육을 갈랐다. 수술용 진동 톱으로 허벅지 뼈를 가르는 날카로운 기계음이 수술실을 채웠다. 톱날의 마찰열에 뼈 조직이 타버리지 않도록 식염수가 쉴 새 없이 뿌려졌고, 통증을 기억할 신경은 후유증을 줄이기 위해 새 칼날로 단칼에 끊어냈다. 칠십 평생 가장을 지탱해 온 기둥이 그렇게 잘려 나갔다.
날카로워진 뼈 단면을 둥글게 갈아내고 그 위를 근육과 피부로 당겨 덮어 한 땀 한 땀 꿰맸다. 솜 붕대와 탄력붕대로 지긋이 상처를 눌러 덮었다. 오전 6시10분, 평소라면 동이 트고 쓰레기 수거가 끝났을 시각, 대퇴부 절단 수술이 마무리됐다.
“찌릿찌릿해서 잠을 잘 못 잔다.”
사고 후 2년이 흘렀지만 석곤은 지금도 흐린 날이면 왼쪽 발끝이 욱신거린다. 절단 환자의 65%가 겪는다는 환상통(幻想痛)이다. 다리는 사라졌지만 신경이 당시를 기억하는 것이다. 석곤은 요즘도 자다가 허공에 팔을 휘젓는 날이 있다. 아직도 밤마다 쓰레기를 치우는 꿈을 꾸기 때문이다.
“그때 그냥 죽어버렸으면… 살아서 뭐 하나.”
육체의 고통보다 더 아픈 것은 일상의 상실감이었다. 중환자실에서 일반 병동으로 이어진 긴 병원 생활, 병상에 누워 천장만 바라보던 석곤은 수없이 되뇌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산업재해 인정은 됐지만, 한쪽 다리로만 살아갈 날이 아득했다.
단짝이던 동료 대현은 수술이 끝나고 닷새 만에 병원을 찾았다. 마약성 진통제를 맞던 때라 석곤은 당시 기억이 흐릿하다. 두 사람은 병실에서 20분간 연신 “이제 어떡하느냐”라는 말만 반복하며 눈물을 글썽여야 했다.
석곤은 자신의 다리를 앗아간 가해자를 용서했다. 병실을 찾아와 무릎 꿇는 가해자에게 “자네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지 않으냐”며 오히려 남자를 일으켜 세웠다. 혼자 아이를 키운다는 그의 사정을 듣고는 아들 종현이 떠올라 탄원서까지 써줬다. 그 덕에 음주운전, 도주치상 등의 혐의로 기소된 가해자는 지난해 5월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구로2동 사람들은 석곤네 부자를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부자가 살던 1997년 지어진 10평짜리 임대주택 앞집에 사는 신경순은 “부자가 인사성이 참 밝았다”고 했다. 동네에서 가장 오래된 보충대 슈퍼 주인 김복연은 안타까움에 혀를 찼다.
“아들이 아버지 출근 전에 600원짜리 ‘레쓰비’를 사러 종종 왔었는데 안타까워 어째.”
석곤은 끼니를 해결할 때도 도통 싫증을 내지 않았다. 아침 퇴근길이면 회사 장부식당인 ‘서태자 김밥집’에 들러 아침으로 갈비탕을 시켰다. 미화원 동료들이 “지겹지도 않으냐”고 핀잔을 줬지만, 개의치 않았다. 수정식당에선 비빔밥을 줄곧 먹었다. 그는 “국물만 있으면 뭐든 맛있게 먹는다”고 했다.
석곤은 지난해 5월 둘째 아들이 사는 전주로 이사했다. 지난 10일 완산구 평화동 주공아파트 1층 자택에서 만난 석곤은 당시를 “뼈가 바사삭 부서지는 것 같았다”고 기억했다. 사고 장면을 떠올린 순간 오른쪽 다리를 거실 바닥에 쾅쾅쾅쾅쾅 다섯 번이나 굴렀다. 몸서리쳐지는 기억이었다.

“목발을 짚고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면서 다니고 있으면, 청소차가 지나가. 그럼 얼굴 보고, 인사하고 그러지. 그 사람들 일 하는데 커피 한 잔 마실 시간도 없어.” 이들에게 여유로운 휴식은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다.
석곤은 평생 일터였던 D환경을 찾아가진 못한다. 아직 보상 문제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는 “회사만 가면 합의해달라고 오는 통에 다시 가지 못하겠다”고 말했다.
목욕탕도 가지 못한다. 그는 “목발 짚고는 미끄러워서”라고 했다. 석곤의 새 보금자리, 직사각형의 좁은 욕실에는 이동식 욕조가 하나 놓였다. 매끈한 하얀색 플라스틱 재질의 간이 욕조다. 이제는 이 차가운 플라스틱 통이 구로동의 온탕을 대신한다. 신호목욕탕 주인 조정기는 석곤에 대해 “어느 날부터 보이지 않아 이상하다 생각하던 차에 누가 교통사고로 다쳤다고 알려줬다. 늘 사람 좋은 인사를 나눴는데 인생이 참 얄궂다”고 했다.
아들은 아버지를 위해 현관에 의자를 놓았다. 외출할 때 신발을 신고 목발을 짚는 곳이다. 석곤은 아들과 아파트 단지를 한 바퀴 걸으며 산책했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1년이 넘는 재활의 시간이 필요했다. 이제는 팔이 더 튼튼해졌다. 익숙해졌다고 하지만, 겨드랑이 사이에 목발을 끼우고 걸을 때면 어느새 힘이 들어가 어금니를 꽉 깨문다. 그는 산책을 마치고 집에 들어와 다시 소파에 올랐다. 말없이 현관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짝을 잃어버린 오른쪽 운동화 한 짝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탐사보도팀=조병욱·백준무·배주현·정세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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