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에 없는 여관, 설국의 풍경…일상에 지친 당신을 위한 ‘여행’

이은선 영화 저널리스트 2025. 12. 13.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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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을 떠나 낯섦으로 향하기…삶 그대로를 비추는 미야케 쇼의 《여행과 나날》

(시사저널=이은선 영화 저널리스트)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설국》의 첫 문장이다. 《여행과 나날》의 주인공 이(심은경) 역시 폭설이 내린 곳으로 향한다. 한국을 떠나 일본에서 살아가는 각본가인 그는 슬럼프를 겪는 중이다. 영화는 여행을 결심한 이가 기차를 타고 터널을 지나 온통 눈으로 뒤덮인 풍경 속에서 보내는 며칠간의 이야기를 그린다.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2022), 《새벽의 모든》(2024) 등으로 알려지며 일본의 뉴웨이브로 주목받는 미야케 쇼 감독의 신작이다. 쓰게 요시하루의 1960년대 단편만화 《해변의 서경》과 《혼야라동의 벤상》을 엮은 영화의 발길은 설국 이전에 드넓은 해변으로 먼저 향한다.

영화 《여행과 나날》 포스터 ⓒ(주)엣나인필름

바깥을 보는 여름, 내면으로 향하는 겨울

《여행과 나날》은 두 계절을 병치한다. 이가 각본을 쓰는 여름의 풍경이 먼저다. 손에 쥔 연필은 그의 카메라다. 이가 머릿속에서 이미지를 움직이는 대로 종이 위에 글자가 새겨지고 있다. 그것은 이내 영화가 된다. 'S#1. 여름, 바닷가. 막다른 길에 자동차 한 대가 세워져 있다. 뒷좌석에서 여성이 잠에서 깬다.' 또박또박 써내려간 문장이 영상으로 바뀐다.

나기사(가와이 유미)와 나츠오(다카다 만사쿠)가 한적한 항구 마을에서 우연히 조우한다. 화창했다가도 다음 날이면 비가 쏟아지는 변덕스러운 날씨다. 나기사는 일행을 내버려두고 홀로 말없이 마을을 어슬렁거리거나 터널을 지나 바닷가로 간다. 그곳에는 나츠오가 별다른 목적도 없이 백사장에 앉아서 바다를 지켜보고 있다.

여름의 장면들로 미야케 쇼 감독이 제시하는 여행의 성질 중 하나는 낯선 풍광의 목격이다. 카메라는 별다른 과시 없이 아득한 울창한 숲, 비가 쏟아지는 바다의 너울대는 파도 속에서 나기사와 나츠오가 따로 또 같이 보내는 낮과 밤이 느리게 흐르도록 우선 내버려둔다. 그러면서 이 이야기를 단순한 여행기에서 조금씩 확장해 영화 만들기, 즉 창작의 영역으로 연결해 간다.

예컨대 밤의 어둠에 물들어가는 항구의 풍경을 뒤로하고 나기사는 낯선 곳에서 다른 인물인 척 살아가는 것을 이야기한다. 이것은 여행의 묘미이기도 하고, 영화 만들기의 과정을 떠올렸을 때 매번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인물이 되어야 하는 배우의 숙명이기도 하다. 이 모든 이야기를 집필 중인 이의 경우로 대입하면 책상에서 낯선 인물의 사연을 창작하는 일과 연결되기도 한다.

여름의 장면들이 이가 쓴 각본의 영화였다는 것이 명백해진 뒤, 《여행과 나날》은 겨울로 성큼 향한다. 이번에는 이가 주인공이 되는 풍경이다. 여름이 여행의 성질 중 외연으로 향하는 배경이었다면, 겨울은 인물의 내면에 몰입하게 하는 배경이다. 재능이 없다고 느끼는 동시에 "말(言)이라는 틀에 갇혀있다"고 스스로의 상태를 진단한 이는 일상을 잠시 떠나는 길을 택한다. 숙소를 예약하지 않고 무작정 여행을 시작해 머물 곳을 찾는 데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이의 사정을 고려한 숙소 주인이 추천한 곳은 산 너머의 여관. 그가 내민 마을 약도에서도 자취를 찾을 수 없는, 그야말로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까마득한 곳이다.

영화 《여행과 나날》 스틸컷 ⓒ(주)엣나인필름
영화 《여행과 나날》 스틸컷 ⓒ(주)엣나인필름

카메라를 통해 말하는 것

낡은 여관에서 홀로 지내는 주인 벤조(쓰쓰미 신이치)는 수상쩍은 첫인상과는 달리 별다른 사건을 만들어내지 않는 사람이다. 이가 글을 쓰는 사람인 것을 알고 여관을 배경으로 작품을 써서 장사에 도움이 되게 해달라는 싱거운 소망을 빌거나, 연못에 관상용 잉어를 기르면 어떻겠느냐는 이의 제안에 한밤중 잉어 포획의 여정에 동참할 것을 부추기는 정도가 전부다. 그에게도 속 깊은 사연이 있는 듯하지만 이가 좀 더 가까이 접근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여행하는 사람에게 허락되는 것은 친밀감이라기보다 차라리 적당한 거리 두기이기 때문이다.

여행을 떠나기 전 이는 우연히 필름카메라를 손에 넣는다. 말에 갇혀 펜을 움직이기 어려웠던 그에게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도구다. 한곳에 머물러 쓰는 일에만 몰두했던 이가 여행을 결심함에 따라 '쓰는 일'은 이제 '눈으로 포착하는 일'로 바뀐다.

눈으로 한번 보았던 것은 사진을 통해 새로운 풍경이 된다. 셔터를 누를 때 채 온전히 보지 못했던 이야기가 인화된 결과물을 통해 뒤늦게 발견되기도 한다. 동시에 사진의 프레임 바깥은 영원한 상상의 영역이다. 말이 포착하지 못하는 것, 눈이 미처 닿지 못하는 것이 거기에 존재할 것이다. 이 같은 사진의 속성은 《여행과 나날》이 비교적 좁은 비율인 화면비(1.31:1)를 선택한 이유와 나란해 보인다. 이야기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프레임 너머를 각자가 여행하는 일과 같다. 이가 지도에 표시되지 않은 여관을 찾아 며칠을 머물렀듯, 영화는 프레임 바깥을 상상하는 관객의 호기심을 추동한다. 마침 이가 머무르는 설국의 풍경은 텅 빈 스크린의 여백을 떠올리게 한다.

여행의 본질은 낯선 환경에 자신을 놓아보는 일이다. 평소와는 다른 장소와 사람을 만나고, 익숙한 것을 다르게 보는 과정은 정체감으로부터 한 걸음 나아갈 수 있게 하는 작은 힘을 준다. 약간의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길을 잃는 것마저 모험이 될 수 있는 시간. 일상에서 당연하다고 느꼈던 모든 것을 당연하게 느끼지 않게 되는 며칠. 무엇보다 나 자신이 아닌 또 다른 사람을 연기할 수도 있는 일. 정해진 루트를 따르는 관광이 아닌 진짜 여행의 묘미는 여기에 있다.

벤조의 여관에 머무르는 동안 이는 눈(雪)을 손으로 만져본다. 언어로 쓰기 위해서가 아니라 몸으로 감각하기 위해서다. '주변의 사물이나 감정에 이름을 붙이고 익숙해지는 것'인 일상을 떠나 처음 일본에 왔을 때처럼 '모든 것이 낯설고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던 상태를 되찾기 위해서다. 그렇다고 이 여행이 치유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강한 재생의 힘을 이에게 주진 않는다. 다만 마지막 장면에서 목격하는 이의 표정은 분명 이전과는 다르다. 필시 그의 마음과 펜을 움직이는 손끝에도 영향이 번질 것이다. 일상을 떠난 며칠을 통해 우리가 손에 쥘 수 있는 변화는 보통 그 정도로도 충분하다.

미야케 쇼의 영화는 만들어진 이야기라기보다 이토록 삶 그대로를 닮았다. 그가 창조한 인물들은 대부분 단단한 인연의 접합이라기보다 우연한 만남에 가까운 모양으로 연결된다. 그날 그 장소에 함께 있었다는 것만으로 접점이 생겨버린 사람들. 인생은 그런 무수한 순간의 점들이 모여 만드는 선과 면이다. 나아가 그건 극장에서의 경험이기도 하다. 낯선 사람들과 한데 모여 같은 풍경을 응시하는 일. 상영관 밖을 나와 각자의 일상으로 흩어지는 일. 그것은 언제나 짧은 여행이기도 하고, 우연한 결속이기도 하다. 《여행과 나날》이 영화를 넘어 삶으로 확장되는 경험이라고 느낀다면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일본 아카데미상 최우수 여우주연상을 받은 《신문기자》(2019) 등을 통해 일본에서도 활발히 활동 중인 배우 심은경은 이 영화의 깨끗한 기품을 만든다. 꽉 채워진 인물의 밀도보다 여백을 더 근사하게 표현해낼 줄 아는, 흔치 않은 배우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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