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이 고집 있네" 그날을 뒤집은 2분 녹음 파일
1999년 '옷 로비' 의혹 청문회 코미디로
"전 재미가 없..." PD에 다른 의견 낸 신인
"단발 출연이었는데" 엑스트라의 역전
편집자주
함께 도전해 세상의 편견을 지우고 변화를 이끈 대중문화 단짝들 인터뷰.

"미안합니다, 몸이 아파서..."
지금으로부터 26년 전인 1999년을 들썩인 이 유행어, 기억하는 분들 있을 겁니다. 코미디언 김영철씨가 어색한 듯 쭈뼛거리며 내뱉은 이 한마디로 그의 인생은 송두리째 달라졌습니다. 그해 '옷 로비' 의혹으로 청문회에 출석한 강인덕 전 통일부 장관 부인 배정숙씨를 패러디해 KBS2 '시사터치 코미디파일'에서 단번에 스타로 떠올랐습니다. 김영철씨는 1999년 KBS 14기 공채 코미디언으로 발탁된 신인으로, 다른 선배들 코너에 엑스트라로 잠깐씩 TV에 얼굴을 비친 게 전부였습니다. 당시 청문회에서 배씨는 의원들 질문에 "미안합니다, 몸이 아파서"라고 말해 구설에 올랐습니다. 그가 TV로 중계된 청문회에서 눈썰미 좋게 패러디 요소를 찾아내 주목받은 겁니다. 지금의 김영철씨를 있게 한 결정적 순간입니다. 지상파·종합편성·케이블 채널 통틀어 요즘 TV에서 정치 풍자 코미디가 싹 사라진 것과 비교하면 이례적 풍경입니다.

"청문회랑 맞지 않는 얘기하는 게 웃기더라고요, 전"
이 결정적 순간에 '환상의 콤비' 김영철씨와 황선영 작가는 함께였습니다. 당시 신인이었던 코미디언의 정치 풍자 패러디는 어떻게 이뤄졌을까요. 두 콤비가 26년 만에 털어놓은 사연은 이랬습니다.

당시 옷 로비 의혹은 청문회 개최는 물론 특별검사제도 도입으로 세간을 들썩였습니다. 외화 밀반출 혐의를 받던 최순영 신동아그룹 회장 부인 이형자씨가 남편의 구명을 위해 고위층에 고급 옷을 로비했다는 의혹으로 시작된 사건이었습니다.
'시사터치! 코미디 파일' 제작진은 이 이슈를 웃음 소재로 활용하기 위해 코미디언을 물색했습니다. '김영철이 사람 흉내를 잘 낸다'는 얘기는 당시 제작진 사이 알음알음 퍼져 있었다고 합니다. 제작진은 청문회에 출석한 네 명 중 인상이 강했던 의류업체 사장 패러디를 김영철씨에 제안했는데 신인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청문회를 보는 데 (배씨가) 청문회와 맞지 않는 얘기를 하는 게 전 웃기더라고요. 의류업체 사장은 느낌이 안 와서 '전 재미가 없...'다고 말하니 PD가 '신인이 고집 있네'라고 하더라고요. 그럼 '연습해 와'라고 해서 '미안합니다~' 그걸 짜갔죠. 그때 황 작가가 '일단 한번 해보죠?'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방송에서 했더니 고(故) 서세원 선배께서 진행하시다가 그 성대모사에 꽂히신 거 같더라고요. 코너를 하고 나왔는데 '아까 그분은 어디 갔죠, 그 아주머니?'라고 다시 불렀고 '미안합니다, 마이크가 없어서'라고 대꾸했는데 그게 빵 터졌죠." 김영철씨의 말입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화제가 된 김영철씨의 코미디는 이후 '미안합니다, OO해서'란 식으로 곳곳에서 다양하게 변주돼 유행어가 됐습니다. "영철이는 사실 단발 출연이었어요. '미안합니다~'가 터져 계속 출연하게 됐죠." 황 작가가 들려준 뒷얘기입니다.

음성 파일 녹음에서도 성대모사 '뼈그맨'
사실 이 내용에 대한 취재는 '환상의 콤비' 인터뷰 이후 추가로 진행됐습니다. 두 사람이 함께한 결정적 순간에 관한 이야기를 더 듣기 위해 김영철씨에게 연락하니, 당시 연기 뒷얘기를 2분 44초 분량의 음성 녹음 파일에 담아 카톡으로 전해줬습니다. 연락 당시 김영철씨가 일정을 소화 중이라 통화가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그 음성 녹음 파일을 연 순간 '신인인데 고집 있다'는 대목에 저도 모르게 길거리에서 소리 내 웃었습니다. 퇴근길 바로 제 앞에서 걷던 어떤 분이 웃음소리에 놀라 뒤를 돌아봤습니다. 먼저 죄송했고, 다음엔 민망했습니다. 녹음 파일엔 김영철씨가 '미안합니다~'를 두 차례나 성대모사한 목소리가 실려 있었습니다. 김영철씨는 인터뷰에서도 자신과 연관된 사람을 얘기할 때 그 사람의 목소리를 따라 하거나 당시 상황을 대화식으로 구성해 들려줬습니다. 음성 지원은 기본. 그 자리에 없는 강호동, 고현정씨의 모습이 순식간에 돋을새김 됐습니다. '뼈그맨'(뼛속까지 개그맨의 줄임말)의 세계를 새삼 실감한 순간이었습니다.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21014510003995)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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