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로] 개근 거지·빌라 거지…누가 아이들에 혐오를 심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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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근 거지, 빌라 거지를 아시나요? 신조어인데 초중등학교 교실에서 이미 유행한 지 꽤 됐다고 한다.
개근 거지는 체험학습을 가지 않아 결석 없이 매일 학교에 나오는 아이들을 비하하는 표현이라고 한다.
아파트나 단독주택이 아닌 다세대 주택(빌라)에 거주하는 아이들을 싸잡아 거지로 매도하는 나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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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이승우 선임기자 = 개근 거지, 빌라 거지를 아시나요? 신조어인데 초중등학교 교실에서 이미 유행한 지 꽤 됐다고 한다. 개근 거지부터 보자. 사전적으로 개근은 학교나 직장에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빠지지 않고 매일 나온다는 뜻이다. 성실함의 척도이면서 책임감과 꾸준함을 갖췄음을 칭송하는 긍정적 단어다. 그래서 예전엔 우등상보다 개근상에 더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다.
![갈등과 대립(PG) [연합뉴스 자료 일러스트. 재배포 DB 금지]](https://img1.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12/15/yonhap/20251215140345167mixw.jpg)
그런데 이런 고결한 덕목을 뜻하는 단어 뒤에 거지가 왜 붙을까. 거지는 돈이 없어 구걸하는 사람이다. 가난한 사람을 비하하는 의미로도 쓰이는데, 때로는 몸이 멀쩡한데 불성실해 남에게 손을 벌린다는 뜻으로 확장되기도 한다. 성실과 불성실, 근면과 빈곤, 본받고 싶은 태도와 피하고 싶은 상태를 각각 상징하는 두 단어가 붙어 다니니 형용 모순이다.
지금 현실에서 저 두 단어를 합치면 멸칭이 된다. 개근 거지는 체험학습을 가지 않아 결석 없이 매일 학교에 나오는 아이들을 비하하는 표현이라고 한다. 칭찬받아야 할 아이들이 멸시의 대상이 된 데에는 일단 겉으로만 보면 체험학습이 원인을 제공했다. 개인 체험학습은 주로 가족 해외여행 기회로 활용되는 게 유행이라는데, 학교에 개근하는 아이들은 가정에 경제적 여유가 없어 해외여행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란 인식이 뿌리내렸다고 한다.
빌라 거지는 더 노골적이고 낯 뜨겁다. 아파트나 단독주택이 아닌 다세대 주택(빌라)에 거주하는 아이들을 싸잡아 거지로 매도하는 나쁜 말이다. 개근 거지와는 달리 듣자마자 직관적으로 무슨 뜻인지 딱 들어온다. 개근 거지, 빌라 거지란 말을 접하고 든 여러 생각 중 무엇보다 앞서는 건 참 슬프다는 감정이다. 순수해야 할 아이들끼리도 아파트에 살지 못하고 학기 중에 해외여행을 못 가는 친구를 거지 취급하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삭막함을 넘어 무섭다는 느낌마저 든다.
누가 우리 아이들을 이렇듯 괴물로 만든 걸까. 누가 하얀 도화지 같은 아이들의 마음속에 혐오와 차별부터 그려 넣었나. 물질 만능과 배금주의가 어린 시절부터 배도록 만든 건 누구일까. 아이들은 보고 들은 대로 말하고 행동한다. 부모 세대가 평소 보여준 모습이 거울에 비치듯 아이들에게서 나타난다. 아이들이 빌라에 살고 해외여행을 못 가는 건, 그 자체로도 비하 대상이 아닐뿐더러 아이 자신의 책임은 더욱 아니다. 부모들의 경제적 수준 격차를 이유로 아이들 사이에서 벽이 생기고 소외감과 고통을 느끼는 무리가 생긴다면 이 나라의 장래가 밝을 리 없다.
아이들까지 희생양을 설정해 혐오하며 공격하고, 타인의 상처에 공감하지 못하는 현상을 보면서 사회 분위기와 담론을 이끄는 정치권에 가장 큰 책임을 묻고 싶다. 정치의 역할은 나라 안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갈등과 대립을 조정하고 타협점을 찾아냄으로써 개인 간, 이해집단 간 긴장도를 위험수위 아래로 관리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사회 규범과 질서가 붕괴하는 아노미로 치닫지 않고 극단적인 충돌도 발생하지 않게 된다.
과연 우리 정치권은 이런 조정자 역할에 충실했는가. 조정과 협상은커녕 오히려 계층·성별·세대·지역 간 편 가르기, 혐오, 갈등, 반목을 키우는 데 앞장섰던 건 아닌가. 혹시 대립과 다툼의 에너지를 정치적 지렛대로 활용한 적은 없는가. 정치권은 이런 질문들을 스스로 진지하게 던지며 자성하고 적절한 해법을 고민해야 할 때다. 어린아이들마저 혐오에 무감각해지는 건 마지막 위험 신호이니까.
lesli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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