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법대 수석 입학 소감 “인권 유린 서민 돕겠다” 변호사 조영래
1990년 12월 12일 43세

1965년 2월 14일 서울대 합격자 발표에서 전체 수석은 법과대학 법학과에 지원한 경기고 출신 조영래(1947~1990)였다. 이날 조선일보는 ‘전교 수석에 조영래 군/ 서울대학교 올해 합격자 발표’ 기사를 실었다.
“조군은 500점 만점에 421점을 따서 2305명의 합격자 중 으뜸가는 성적을 나타냈다. 조민제씨의 7남매 중 장남인 조군은 위로 세 누이와 아래로 세 남동생, 모두들 수석을 뺏겨본 적이 없는 전형적인 ‘엘리트’ 가문이었다.”(1965년 2월 14일 자 7면)
기사에서 조영래는 수석 비결로 “적당한 휴식, 굳건한 신념, 끊임없는 노력”을 꼽았다. 법대에 지원한 이유로는 “인권에 유린된 서민을 돕겠다”고 했다.

재학 중에는 사법시험 공부에만 몰두하지 않았다. 한·일 기본 조약 반대, 3선 개헌 반대 등 학생운동을 주도하며 김근태·손학규와 함께 ‘서울대 운동권 삼총사’로 불렸다. 1971년 사법시험에 합격해 연수원 생활 중 ‘서울대생 내란 음모 사건’으로 구속됐다. 서울대생 이신범·심재권·장기표와 함께였다.
중앙정보부는 조영래 등의 혐의를 ‘정부 전복 음모’라고 규정했다.
“이들은 거사에 성공하면 헌법 기능을 일시 정지시키고 각계 대표로 가칭 ‘민주혁명위원회’를 구성하여 위원장에 김모 의원을 추대, 동 위원회로 하여금 3권을 장악케 하고 ‘부정부패처벌법’ 등 혁명 입법을 구상해 놓는 등의 음모를 꾸몄다는 것이다.”(1971년 11월 14일 자 7면)

조영래는 1973년 출소했지만 다시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로 수배돼 6년간 도피 생활을 했다. 이 기간 익명으로 1980년대 운동권 필독서였던 ‘전태일 평전’을 썼다. 10·26 후 사면돼 사법연수원을 마치고 1982년 변호사가 됐다. 초심대로 ‘인권 변호사’로 활동했다.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 보도 지침 사건 같은 시국 관련과 망원동 수재 사건, 진폐증 시민 손해배상 등 서민을 위한 변론을 맡았다.
변호사 활동은 8년에서 그쳤다. 1990년 12월 12일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43세였다. 서울 여의도성모병원 빈소에는 “인권 변호사로서 ‘짧은 삶’을 애도하는 조문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1990년 12월 13일 자 22면)
조영래는 ‘민주 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 전신인 ‘정의실천법조인회’(정법회) 창설을 주도했다. 민변 출신 노무현·문재인은 대통령이 됐고, 박원순은 서울시장을 지냈다. 민변 출신은 386세대로 이어지며 진보 정권에서 핵심 요직을 차지했다.

정작 조영래는 정치와는 거리를 뒀다고 한다. 생전에 “모든 권력은 놔두면 남용된다”며 “내가 스스로 정의롭다고 생각하는 순간 남용의 위험에 빠진다”(2024년 3월 25일 자 A34면)고 했다.
한 출판인은 조영래를 ‘이념과 진영에 갇히지 않은 참 자유인’으로 추억했다.
“요즘 386 정치인들과는 달랐지요. 민주화 투쟁으로 수감되고 고문받았지만 누굴 증오하거나 조롱하며 독설을 퍼붓지 않았어요. 박정희 대통령 돌아가셨을 때도 조의를 표한 사람이에요. 지식인들이 앞장서 반대했던 88올림픽도 그는 ‘우리 민족에게 온 큰 선물’이라고 했지요. 그 혜안이 얼마나 놀라운지. 이념과 진영의 논리에 갇히지 않은 참자유인이었다오.”(2019년 5월 28일 자 A3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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