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시각] 배우 김지미의 “현실에 지지 마”

배우 김지미의 부고를 듣고 6년 전 영화 담당 기자로 그를 인터뷰한 날을 떠올렸다. 2019년 10월, 미국 LA에 거주하는 김지미가 한국 영화 100년을 기념해 부산국제영화제를 찾는다는 소식이었다. 영화제 기간 중 어렵게 1:1 인터뷰 자리를 마련했다. 본지와 다른 언론사 한 곳만 그를 따로 만난 것으로 기억한다. 주어진 시간은 60분.
약속 시간 10분 전 카페에 도착한 김지미는 카페라테를 한 모금 마신 뒤 흡연실로 들어가 구두를 벗었다. 다리를 꼬고 담배 한 개비를 느긋이 태웠다. 어떤 예식 같았달까. 일련의 과정이 물 흐르듯 매끄러웠다. 세월과 내공이 느껴졌다. 그가 담배 피우는 모습을 유리 너머로 넋 놓고 바라봤다.
배우는 약속한 시간이 되자 자리로 왔다. 꼿꼿이 앉아 기자의 질문을 기다렸다. 잔뜩 힘주고 날카로워 보이려고 애썼지만, 60년 넘는 경력의 대배우가 보기엔 가당찮았을 것이다. 2년 차 초년병 기자가 얼마나 어설펐을까 생각하면 낯이 뜨겁다. 그러나 그 어떤 질문에도 그는 허투루 답하지 않았다. 사람을 존중할 줄 아는 우아한 어른이라고 느꼈다.
답은 거침없었다. 그는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게 뭐 어떠냐”면서 “내가 몇 번 시집갔는지 사람들이 더 잘 안다. 나 모르는 일도 안다. 숨겨서 뭐 하느냐”고 했다. DJ 정권 때 “전국구 국회의원 제안도 받았다”던 그는 “내 분야에서 쇼부(승부)를 보고 있는데, 이름 팔아먹고 거기 가서 망가져 돌아오면 안 된다”며 정치와 선을 그은 일화도 들려줬다. 여든을 앞둔 그에게 다소 발칙(?)하게 “훗날 묘비명에 새기고 싶은 문구는 무엇이냐”고 질문했다. 기분 나쁜 기색 없이 “한 배우로서, 한 여자로서 시대를 당당하게 살아왔다”는 문장을 읊었다.
인터뷰를 마치고 녹취 메모를 보고하자 당시 사수이던 선배는 한숨을 쉬며 “이걸론 안 된다. 무조건 다시 만나라”고 지시했다. 눈앞이 새하얘졌다. 큰 기대 없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에게 연락했다.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내일 아침 몇 시까지 파라다이스 호텔 로비 카페로 오라”고 했다. 이어진 인터뷰에서 데뷔 관련 일화, 김기영 감독에 대한 추억, 김지미라는 예명의 탄생 배경 등 내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는 한 끗 다른 기사를 쓰고자 하는 신문사의 욕심을 이해하는 사람이었다. 오히려 기특해했던 것도 같다.
두 번에 걸친 인터뷰의 마지막 질문은 이거였다. 여자는 한평생 어떻게 살면 후회가 없을까요? 분량상 당시 기사엔 담지 못한 김지미의 답변을 뒤늦게 나눈다. “현실에 지지 말고 살아. 뭐든지 나 스스로 극복할 수 있다는 잠재적인 생각을 갖고 있어야 뒤처지지 않아. (…) 당당하게, 사회에서, 나로서 살아. 그걸 해주셨으면 좋겠어.” 그가 피하지 않고 가로지른 삶의 풍파가 눈앞에 아득하게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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