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인물열전]목화로 의생활에 일대 변혁 가져온 문익점

임명진 2025. 12. 10.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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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에 얼어 죽는 백성 구제 큰 몫…세종대왕 ‘부민후’ 칭호 내려
이 땅에는 아주 오래 전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다. 그들의 발자취를 알아가는 과정은 지방소멸의 시대에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고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본보는 역사적 인물에서부터 근현대사의 정치, 경제, 문화 예술인 등 다양한 분야의 지역 인물들을 조명하고 널리 알려 나가고자 한다. 편집자 주

'우리 동방에 오랫동안 목면(木綿)이 없었는데, 문익점이 서장관(외교관)으로 경사(지금의 북경)에 들어갔다가 그 종자를 구하고, 또 가꾸고 길쌈하는 방법을 알아 가지고 와서 화분에 심었다. 점점 고을에 전해 드디어 일국에 퍼졌다'-조선왕조실록
 
전시관 내 조선시대 무명의복


지금과 같은 현대적인 난방 시설이나 방한복이 없던 시절, 찬 바람이 불어오는 겨울철이 다가오면 난방을 위한 땔감 확보는 겨울나기의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였으나 이마저도 쉽지 않았다.

고려사나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과거 백성들에게 겨울나기는 생존을 위한 혹독한 고통 그 자체였다. 얼어 죽거나 동상에 걸린 사람들이 곳곳에 널려 있을 정도로 겨울나기는 매우 고통스러웠다.

일반 백성들은 주로 삼베옷을 겹겹이 껴입거나 짚으로 만든 도롱이 등을 방한복으로 착용하기도 했다. 삼베나 모시는 거친 촉감과 보온성이 현저히 낮아 혹독한 겨울 추위를 막아내기엔 역부족이었다. 경제적 여유가 있는 일부만이 털가죽을 덧댄 옷을 입을 수 있었다.

그런 우리나라 의생활에 혁신적인 변화를 가져온 인물이 바로 문익점(1329~1400)이다.

◇목화의 도입…겨울철 고통받는 백성 구제

문익점은 1329년 고려 진주목 강성현에서 출생했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산청군 단성면에 해당한다.

공민왕 9년(1360년)에 과거에 올라 관직에 진출했다. 1363년에는 원나라(1271~1368)에 파견되는 사신단의 서장관으로 뽑혔다. 서장관은 사신 일행의 외교 문서를 담당하는 직책이다.

당시 고려는 공민왕이 원나라의 실세인 기황후의 일족과 친원파 제거에 나서면서 원과의 관계가 크게 틀어졌다.

원은 사사건건 반목하던 공민왕(31대) 대신 충선왕(26대)의 아들 덕흥군을 왕으로 옹립하려고 했다. 1364년 덕흥군은 최유를 비롯한 자신을 지지하는 고려 출신 인사들과 함께 원의 군대를 이끌고 고려에 침공했지만, 최영 장군에게 크게 패해 실패로 돌아갔다.

이때 원에 갔던 사신단 중 일부가 덕흥군 옹립 시도에 가담한 혐의로 처형되었지만, 문익점은 상대적으로 파직이라는 가벼운 처벌을 받는다.

이를 두고 문익점이 어쩔 수 없이 가담했다고 보기도 한다. 문익점이 목화씨를 고려에 가져온 시기는 1364년 사신단이 귀국길에 오를 때였다. 1년여간 원에 체류하는 동안 겨울철 추위로부터 사람들의 생명을 지켜주는 목화의 효용성을 체감했기 때문이다.

당시 원나라는 목화 재배와 면직물 생산이 이미 보편화돼 있었다. 목화 재배뿐만 아니라 솜에서 씨앗을 분리하는 씨아, 실을 뽑는 물레 등 관련 가공 기술과 도구도 발달해 있었다.

그동안 원나라가 목화씨의 해외 반출을 금지해 문익점이 붓두껍에 몰래 숨겨왔다고 알려져 왔으나 그 진위에 대해서는 오늘날 논란이 있다.

당시 원나라는 화약 등의 일부 국외 반출 금지 물품이 있었지만, 목화는 원에서 흔히 재배되는 작물이었으며 반출 금지 대상이 아니었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문익점이 가져온 목화는 큰 변화를 불러왔다. 가볍고 보온력이 뛰어난 솜옷이 백성들에게 보급되고 겨울나기가 한결 나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인도가 원산지로 알려진 목화는 가을에 따듯한 솜을 맺는 식물이다. 씨앗을 맺을 때 생기는 털을 이용해 솜과 무명천을 만들 수 있다.

부드러운 촉감 때문에 의복, 이불, 베개 등 다양한 생활용품으로 활용돼 춥고 더운 날씨에 모두 유용하게 사용됐다.

조선시대에는 목화로 만든 옷감인 면포(무명)가 화폐로 사용될 정도였다.

이산 산청군 목면시배유지 전시관 관장은 "목화는 단순한 식물 섬유를 넘어 의생활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다줬다. 목화로 만든 면직물은 옷감뿐만 아니라 조선시대에는 화폐 대용으로 사용될 만큼 중요해졌으며 이는 국가 경제 전반에 큰 변화를 불러왔다"고 설명했다.

◇대량 재배 성공…정천익이라는 훌륭한 조력자

역사의 기록을 보면 고려 이전에도 목화나 목면의 존재를 엿볼 수 있는 기록이 일부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도 문익점의 목화 전래가 최초로 평가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백성들의 생활에 영향을 미칠 만큼 처음으로 대량 재배 및 보급에 성공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는 사람들이 착용하는 의복과 침구류 등에 있어 질적 향상과 보편화를 가져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목화씨를 들여오고, 우리 기후에 맞는 재배 품종을 찾고 씨를 빼는 씨아나 실을 뽑는 물레 같은 기술과 도구를 보급하는 일도 어려웠다. 그런 문익점에게는 훌륭한 조력자가 있었다. 바로 그의 장인 정천익이다.

문익점 초상화 제공=산청군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문익점이)갑진년(1364년)에 진주에 도착해 그 씨, 반으로 본고을 사람 전객영(典客令)이라는 관직을 마치고 물러난 정천익에게 심어 기르게 하였더니, 한 개만이 살게 되었다. 천익이 가을이 돼 씨를 따니 100여 개나 되었다. 해마다 더 심어서 정미년 봄에 이르러서는 그 종자를 나누어 향리(鄕里)에 주면서 권장하여 심어 기르게 하였는데, 익점 자신이 심은 것은 모두 꽃이 피지 아니하였다. 중국의 중 홍원이 천익의 집에 이르러 목면을 보고는 너무 기뻐 울면서 말했다. "오늘날 다시 본토의 물건을 볼 줄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천익은 그를 머물게 하여 며칠 동안을 대접한 후에 실 뽑고 베 짜는 기술을 물으니, 홍원이 그 상세한 것을 자세히 말해 주고 또 기구까지 만들어 주었다. 천익이 그 집 여종에게 가르쳐서 베를 짜서 1필을 만드니, 서로 배워 알아서 한 고을에 보급되고 10년이 되지 않아서 또 한 나라에 보급됐다.'

이산 관장은 "목화에 관해 전문적 지식을 가진 중국의 승려가 고려의 수도가 아닌 지방에까지 내려와 정천익의 집을 찾은 것은 우연의 일치로 보기 어렵다. 문익점이 원에서 체류하는 동안 어떤 교감이 있었던 것으로도 추론해 볼 수 있는 대목"이라고 말했다.

전시관 건립 기념비

◇백성의 삶을 부유하게 하다

사신단의 일로 파직을 당하고 고향에서 10여 년 동안 목화 재배와 보급에 힘써 온 문익점은 그 공을 인정받아 다시 정계로 복귀한다.

그만큼 목화의 보급은 당시 고려 사회에 엄청난 파급효과를 가져왔다. 우왕(1374~1388) 1375년에 '전의주부'에 임명된 문익점은 창왕(1388~1389) 때는 '좌사의대부'라는 고위 관직에 올랐다.

그러나 신진사대부가 추진하던 토지개혁(과전법)을 이색 등과 함께 반대하다가 다시 파직됐다. 이후 고려왕조가 멸망하고 1392년 조선왕조가 들어섰지만, 다시 관직에 등용되지 못하고 고향에서 여생을 보냈다.

문익점은 정치적 행보와는 별개로 겨울철 동사로부터 백성을 지키고, 생활 전반에 큰 변화를 가져온 공로는 우리나라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다.

세종대왕은 문익점을 영의정에 추증하고, 백성의 삶을 부유하게 만든 관리라는 뜻의 '부민후'라는 영예로운 칭호까지 내렸다.

오늘날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에 그 업적을 기리는 '목면시배유지'가 조성돼 있다. 이곳에는 전시관과 부민각, 목화밭 등의 공간이 꾸며져 있다.

처음으로 목화 재배에 성공해 전국으로 보급하게 된 시초가 된 재배 장소는 사적 제108호로 지정돼 있다.

현재도 일부 밭에는 관상용 목화를 심어 그 역사를 재현하고 있다.

목화가 솜, 실, 베가 되는 전 과정을 보여주는 전시관에는 물레, 베틀 등의 도구와 함께 면화의 역사 자료들이 전시돼 있다.

부민각은 백성을 부유하게 만든 집이라는 뜻이다. 문익점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임명진기자 sunpower@gnnews.co.kr

 

 
 
산청군 목면시배유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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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화 솜
전시관 내 목화의 성장과정
산청군 목면시배유지 전시관
 
전시관 내 전통 물레
부민각 전경
부민각 내부
 
산청군 목면시배유지 내 목화밭
산청 문익점 효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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