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희 할매 생각을 바꾸다

여자의 갱년기가 남자보다 훨씬 먼저 시작되어 심리적 생리적인 장기간의 허무함을 맞는 것은 손주들 키우는 보람을 얻기 위함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영희 할매는 그것 참 조물주의 절묘한 섭리이구나 생각했었다. 때마침 그녀는 뒤늦은 갱년기의 혼란을 겪고 있었고, 이를 기꺼이 맞이할 방도야 말로 손주들 키우는 가운데 있는 것으로 결심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 결심을 실천할 수 있었던 것은 아들 내외가 이를 기꺼이 받아들여준 덕분이기도 했다. 속마음은 어떤지 모르지만, 하여간 맞대놓고 싫은 소리는 없었던 것이다. 어린 손주들 키우는 문제가 크게 부각되는 것은 이에 들어가는 노고의 막대함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신세대 젊은이들의 인생관과 이에서 비롯되는 아동들 교육방식이 영희 할매네 구세대하고는 매우 다르다는 것이 더 부담스럽다고 할 수 있다. 요즘 시대는 아이들 키우는 것도 전문적인 아동심리학 교과서에 기초하여 개성 신장과 사회성 발달 같은 분명한 테마를 중심으로 한다고 하였다. 아이들에게 먹을 것을 좀 넉넉히 주다보면 영양분 섭취의 균형을 모른다고 할매의 무식함을 나무란다. 인내심 키우고 자립정신과 시간엄수 습관 키우는 방법을 모른다고 다그친다.
영희 할매가 아이들 교육이나 돌봄의 방식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그녀의 사회적 교분이 각별한 것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녀는 원래 성격이 활달하고 사람 만나기 좋아하는 편이어서 출신 초등학교 해당학년도 동창회의 회장을 오래 맡고 있었다. 워낙 오래 전의 친교를 기초로 하는 동년배들 모임이어서 조직성의 강도가 약했지만 오랜 세월을 겪어온 동시대적 체험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나름대로 정서적인 공감대가 두터운 모임이었다. 영희 할매는 동창회 회장이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동년배 친구들과의 만남이 잦았고 더불어 즐기고 교감하는 정도가 남달랐다. 이들 동년배 친구들의 공통적인 관심사 중에는 자연히 손주들 돌보는 문제가 있었다. 같은 또래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알게 된 것은 손주들 돌봄이라는 과제에 기여하는 정도와 목적이 제각각이었다는 것이다. 더구나 놀랄만한 사실은 손주들 돌보는 문제를 자기가 걱정할 일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자기 자식은 자기 자신이 키우는 것이라는 커다란 명제를 무슨 자연법칙처럼 내세우는 할매들도 많았다. 손주들이 자기 집에 찾아올 때는 반가운 마음이지만, 떠날 때는 더 반갑다는 말이 세태를 알려준다고 했다. 나도 내 자식을 키우느라고 고생고생했으니 너희들도 자식 키우는 과제를 기꺼이 받아들여야한다고 아들 내외에게 공공연히 선언한다는 친구들도 여러 명 있었다. 영희 할매는 이런 친구들을 보면 자식 키우느라 별별 고난을 감수했던 자신의 과거사가 떠오르며, 자기는 동창회 회장이라는 사람으로서 시대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더욱 난감해지는 것이었다.
그녀가 알아본 친구들 가정의 어린이보육 방식은 대부분 가정이 어린이들이 조부모와 동거하는 대가족이 아닌 핵가족이라는 세태를 반영하였다. 그러니까 할매 세대는 어린이보육의 책임이나 권리에서 놓여나는 것이고, 이런 세태에 대해 대부분의 할매 세대는 별다른 불만 표출이 없어보였다. 자기 손주가 자기가 사는 집에 출입하는 것조차 금지한다는 가정도 있었다. 어린아이를 할매에게 맡길 일이 있다는 눈치가 보이면 이를 면하기 위해 불가피한 사정을 꾸며낼 수도 있다고 하였다. 심지어는 아파트 출입 비밀번호를 알려주지 않는 경우도 있다고 하였다. 어쩌다가 손주가 자기 집에 오게 되어도 가지고 놀 수 있는 장난감 같은 것을 비치하지 않는 집도 대다수였다.
이렇게 구세대와 신세대의 관계가 냉냉하게 되는 것은 부모세대와 차세대 사이의 기본적인 불신 때문이라 했다. 차세대는 부모세대가 시대의 퇴물이라고 보고 부모세대는 차세대를 배운망덕하다고 본다는 것이다. 부모세대의 입장에서는, 기껏 애껴주고 키워준 자식들에게 부모의 은혜 같은 것을 되갚는다는 관념 자체가 없으니 실망과 후회의 마음이 부모의 가슴을 쓰리게 한다는 것이다. 오죽하면 부모와 자식은 전생에 원수였다는 농담 아닌 농담을 들려주기도 했다. 근래에는 부모가 자기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주는 것이 당연하다는 재래의 통념이 사라지고 있고, 관련된 상속법까지 바뀐다는 얘기였다. 자식을 키워주는 것은 부모가 아니라 국가사회의 제도이고, 노인을 먹여 살리는 사람은 자손이라는 말 대신에 노인의 부양의무는 국가의 복지제도에 있다는 것이니, 세상 바뀌는 것 자체를 어쩌겠냐는 것이다. 수천 년 지속되어온 부모자식 간의 사랑과 존경이라는 당연한 세상 이치가 하필이면 이 시대에 와서 바뀌는 것이 서운한 마음이지만, 현재의 세태 변동이 앞으로는 더 빨라진다는 말도 있으니, 그냥 바라볼 수밖에 없다.
영희 할매는 서너 살 되는 손주아이들을 볼 때마다 그 아이들을 옛날 사람들의 자식사랑처럼 부등켜안고 자기 혈육임을 느껴볼 것인지, 바깥세상 바뀌는 것처럼 덤덤하게 남남의 관계로 볼 것인지 헷갈리고 황당스럽다. 옛날에 아들 딸 키울 때의 어린이들과 요즘 손주들 세대의 어린이들은 이들의 언어 자체가 다르고 어른을 대하는 태도도 달라보여서 옛날 어린 세대처럼 생각하고 대하기가 어렵다. 요즘 다른 집 할매들이 손주들과 같이 있기를 싫어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손주들 세계가 낯설게 느껴지면, 옛날 내가 길렀던 아들 딸들까지 낯선 사람처럼 느껴진다. 세상이 달라짐에 따라서 귀중한 자기 인생을 포기하고 내던져버린다는 허무감을 면할 수 없다.
유치원 선생을 하는 어떤 젊은이에게서 들은 말이 자주 떠오른다. 어린이집이나 유치원 선생이 제일 행복하고 이런 행복이 초등학교 학년을 올라가면서 차츰 희미해지다가 중학생 정도가 되면 이런 행복감이 제일 떨어지고 고등학생이 되면서 행복인지 불행인지 가물가물해진다고 하였다. 영희 할매는 어린이집 다니는 손주들을 볼봐주는 시간에도 이건 의무감과 책임감으로 하는 것이지, 행복하다는 느낌이 별로 없어서 착잡하다. 자기가 어린애들 돌보는 일이 정말 아들 며느리 세대가 바라는 방향의 것인지, 무슨 잘못은 없는지 신경이 쓰인다. 다른 집 할매들을 가만히 보아도 욖구만족 티가 별로 안 보여서 좀 안심이 되지만, 이것은 아마도 몇몇 사람의 경우가 아니라 이 시대의 탓일 것도 같다. 어쩌면 당연한 얘기이다. 디지털 문화니 인공지능 시대니 하는 세상에서는 어린아이들과 할매들 사이가 점점 소통이 어려워진다. 아이들의 언어 자체가 어른들하고 많이 달라보였고, 어린이들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모르니, 괜히 당황할 때가 많다.
영희 할매는 세대간 불화에 대해 자신은 유별나게 신경 쓴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들이 부딪치는 애로사항들을 관심갖고 알아보는 가운데 가정마다 제각각인 세태를 보고 자기 가정의 세대간 갈등에 대한 돌파구를 찾는 것이 더 막막해진 것 같았다. 알면 병 모르면 약인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던 차에 그녀가 만난 사람이 그녀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영희 할매네 초등학교 동창회는 거의가 중졸 이상의 학력인데 초등학교로 학력을 마감한 친구가 같은 동네로 이사 와서 사는 곳을 여러 번 가서 봤던 것이다. 이 친구는 손주 둘을 아예 도맡아서 키운다고 했다. 무학 무식한 할매가 손주들과 즐겁고 행복하게 사는 모습이었다. 아들 며느리 없이 손주 둘을 도맡아 키운다는 사연이 기가 막혔다. 그녀의 아들은 시골에서 농사 짓다가 둘째 아이까지 본 다음에 몹쓸 병으로 죽어버렸고 과부가 된 며느리가 일자리를 찾아 아파트 단지인 이 근방으로 옮겨왔다는 것이다. 동네 옷가게에 점원으로 나가는 며느리 대신에 아이들 둘과 함께 하루 종일을 보내는 할매의 처지가 영희 할매의 관심을 끌었다.
중간세대가 없이 할매가 맞바로 손주들을 키우면 세대차이가 더욱 벌어질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아 보였다. 이 집에 가서 보면 가끔씩 아이들이 요란하게 우는 소리와 할매가 크게 꾸짖거나 달래는 소리가 들리지만, 이런 소리는 여느 가정에도 얼마든지 듣게되는 소리였다. 가서 볼 때마다 할매가 아이들과 함께 무얼 하는 시간이 많진 않았고 대부분 시간이 할매와 아이들 둘 각자가 무얼 하든지 따로 시간을 보낼 때가 많았다. 특별히 이상한 것은 아이들이 고양이나 강아지와 더불어 뭔가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이들이 강아지와 입맞춤하고 고양이 얼굴을 아이들 손으로 만지작거리고 하는 것이 아주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나이 든 할매보다도 어린아이들과 동물들의 소통이 더 잘 되는 것 같아 보였다. 할매가 하는 일이란 아이들 옷 빨래나 청결, 위험한 사고 방지를 위한 조치였고 나머지는 아이들이 원하고 좋아하는 방향으로 하는 것이 아무런 갈등이나 주저함, 당혹스러움이 없이 행복해 보였다. 이들이 사는 모습이 하도 가상하여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구한 운명이네, 부모없는 손주들 둘이나 키우다니.
--나를 동정하는 말 하지 마요. 말하려거든 나를 축복하는 말이나 하든지.
자기 남편과 아들이 일찍 죽은 것은 자기의 사랑이 부족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에 이렇게 살아서 손주들 키우는 것은 지나간 과거의 죄스럽고 아픈 부분을 아물리는 일이니, 축복이 아니냐는 것이다. 손주들 얼굴이 바로 남편과 아들의 얼굴처럼 보인다고 했다. 영희 할매는 집으로 돌아오면서도 이들의 모습이 눈 앞에 가물거렸다. 이들의 비극적인 가정사야 흔하지 않은 특수한 경우겠지만 적어도 그들에게는 세대차이가 만드는 당혹스러움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은 그녀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영희 할매는 뒤늦게 만나게 된 옛날 동창을 찾아가는 시간에 새로운 활력을 얻는 것 같았다. 이제까지는 수많은 동창친구들과 접하는 것이 자기가 구식 할매임을 느끼게 하는 착잡하고 심란한 일이었다. 앞으로는 그들과 만난 자리에서 손주하고 재미나게 지냈던 얘기할 때도 거리낌이 없게된 것이 속시원하게 되었다. 아들 딸네 집을 자주 찾아가서 손주들을 돌봐주는 것이 자기 딴에는 즐겁고 행복한 일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당혹스러운 일이었으며 세상사람들 눈에는 시대에 뒤떨어진 딱한 할매로 비쳐졌을 것으로만 여겨지지 않았는가. 무학 무식한 구식 할매의 손주 돌보기는 무슨 지식이나 상식을 근거로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시대가 바뀌어도 불변할 것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