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투자 시대’ 이익충돌 방지 위한 기업 거버넌스 원칙 지켜야[천준범의 기승전 거버넌스]
최근 인공지능(AI)과 반도체 산업의 경쟁 우위를 선점하기 위한 대규모 투자가 국가적 과제가 됐다. SK하이닉스의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에 필요한 자금만 약 600조원으로 언급되는 등 기업들은 막대한 자금 조달의 필요성을 연일 강조한다. 그런데 이에 대한 해법으로 정부는 국민성장펀드의 조성과 함께 지주회사의 증손회사 지분율 규제를 100%에서 50%로 완화하고, 일반지주회사가 금융 리스업을 영위하는 회사를 보유할 수 있도록 금산분리 원칙에 일부 변화를 주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이는 곧 AI에 대한 대규모 투자라는 국가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경제력 집중을 견제하는 기존의 장치를 완화하면서까지 새로운 기술에 대해 이해가 높은 경영자의 ‘통 큰 결정’을 전적으로 지원하겠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하지만 첨단 기술 분야라는 이유로 경영자에게 전권을 부여하는 방식은 구체적인 사업 과정에서의 ‘작은 실패’를 방지하는 데에는 유리할지 몰라도 사업 자체를 좌우하는 ‘큰 실패’에는 대단히 취약하다. 방향 자체를 경영자가 설정하지만 견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지난 몇년 동안 현대자동차그룹의 자율주행을 책임져 왔던 포티투닷의 송창현 대표 퇴진이 대표적인 예다. 회장의 파격적 의사결정으로 인수와 투자가 결정됐지만, 외부 투자자들은 물론 내부 임직원들도 명확한 청사진을 갖지 못한 상태에서 결국 실패로 끝났다. 이 실패는 현대차에 대단히 뼈아프다. 결정적인 몇년 동안 자율주행에 관한 아무런 실적을 내지 못하는 사이 테슬라의 완전자율주행이 한국에 진출해 데이터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다시 시작해 얼마나 따라잡을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이번 지주회사 규제 완화는 결국 국민성장펀드의 AI 투자, 가깝게는 SK하이닉스 등의 대규모 반도체 시설 투자를 위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국민성장펀드를 통해 대규모 투자를 유치하면서도 투자받는 회사에 대한 회장의 지배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이런 방식에는 큰 문제가 있다. 예를 들어 완화된 규제에 따라 SK하이닉스가 과반 지분을 가진 자회사를 통해 국민성장펀드의 투자를 받아 새로운 반도체 생산시설을 건설하고 이것을 리스 방식으로 빌려 쓴다고 가정해보자.
이런 구조라면 거액이 투자된 시설을 빌려주는 회사도 SK 계열사, 빌려 쓰는 회사도 SK 계열사가 된다. 마치 변호사가 원고와 피고를 모두 대리하는 것과 같은 자기거래 구조가 되는 것이다.
게다가 재계의 한 관계자는 “규제가 완화되면 값비싼 설비를 리스 형태로 써도 되고 시간이 흐른 뒤 감가상각된 가격으로 사들일 수도 있다”고 했다고 한다. 무서운 말이다. 회계적인 감가상각은 실제 시설의 경제적 가치와 다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 말은 감가상각 기간이 3년이라면 3년 후 회계상 가치가 ‘0’이지만 아직 쓸 만한 반도체 시설을 공짜로 가져오겠다는 말과 같다. 빌려준 회사와 빌려 쓰는 회사가 같은 계열사인 이익충돌 구조가 될 텐데 이런 판단을 누가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이대로라면 국민성장펀드와 나아가 여기에 세금이나 펀드 투자 등을 통해 궁극적인 출자자가 될 일반 국민들이 정상적인 거버넌스에 의한 보호 없이 ‘묻지마 투자’와 같은 상황에 놓일 우려가 크다. 법령이든 계약이든 방지 장치가 반드시 필요하다.
한국은 정보기술(IT) 분야에서 자국 서비스가 제대로 경쟁하고 있는 몇 안 되는 나라다. 검색 서비스에서는 네이버가 아직도 구글에 앞서 있고, 워드프로세서는 아래한글이 공공기관을 중심으로 MS워드에 대항하고 있다. 고정밀 지도 데이터를 반출하지 않아 구글 지도가 제대로 서비스되지 않는 몇 안 되는 나라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이런 자부심이 지금의 AI 투자로 이어지는 것 같다. AI 시대에도 소위 ‘소버린 AI’를 구축해 미국이나 중국의 기술에 의존하지 않는 독자적 생태계를 만들고 싶다는 것, 한국이라면 꿈꿀 수 있다. 그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첨단 기술과 같이 지식·경험이 부족하고 미래 불확실성이 큰 분야라면 더욱 거버넌스의 기본 원칙을 지켜야 한다. 지금과 같은 이익충돌, 자기거래 구조로 투자한다면 잘못된 길로 빠져들어도 파멸의 결과를 볼 때까지 아무도 견제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그 결과의 후폭풍은, 보통 아주 나중에 나오고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큰 경우가 많다.

천준범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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