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의 후원(後園)·임효경〉큰 자연 속의 작은 나
12월이다. 찬바람이 어깨를 오그리게 한다. 추위에 취약하여 굳어가는 온 몸의 마디는 따뜻한 온기를 요구한다. 나만 그럴까. 저 들판과 숲 속에 잎을 떨구고 앙상하게 추위에 떨고 있는 나무들과 자연 속의 생물들은 어떠할까? 하나님은 어떤 조치를 해 놓으셨을까? 문득 궁금해 졌다.
학교 도서관 신간 코너에서 책을 한 권 골랐다. 책 표지 그림이 눈을 사로잡는다. 딱따구리가 나무에 구멍을 뚫고 있다. 책 뒷 표지에 추천인의 말이 곧 내 생각이었다. '거대한 생태계 변화의 시기에 이런 책이 나와서 반갑다. 나는 도시의 야경과 스카이라운지와 유리잔이 반짝이는 세련된 식당들을 좋아했다. 그런데 뭔가 변했다. 이제는 생명이 알고 싶다. 세상의 많은 생명들과 더 많이, 더 넓게, 더 잘 연결되어서 살고 싶다.' 그리고 작은 글씨로 '이 책은 FSC 인증을 받은 친환경 용지와 콩기름 잉크를 사용해 인쇄했습니다.'라고 쓰여 있다. 최원형의 <질문으로 시작하는 생태 감수성 수업>이라는 책이다. 이 책을 읽다 보니, 큰 자연 속의 작은 나를 또 다시 발견하게 되었다.
내가 사는 아파트 앞 숲 속엔 참나무가 많다. 상수리나무, 떡갈나무, 굴참나무, 갈참나무, 졸참나무, 신갈나무들이 도토리를 만들어내는 참나뭇과에 속한다고 한다. 정확한 수종은 모르겠지만, 참나무가 울창한 것이 처음에는 못마땅했었다. 소나무와 대나무가 밀려나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가을이 되면 아파트 마당에 도토리가 우수수 떨어진다. 튼실하고 굵은 놈들이다 보니, 사람들이 주워간다. 다람쥐들과 청설모가 먹고 살아갈 식량이지만, 사람도 나눠 먹는 것이다. 음식 솜씨 좋은 옆 집 언니가 이 도토리로 만들어 준 묵은 찰지고 탱탱한 식감을 자랑했다. 양념장에 찍어 먹기도 하고, 살짝 볶아 밥에 얹어 비빔밥으로 먹어도 기막힌 한 끼 식사가 되었다. 거기까지가 내가 가졌던 참나무 사용설명서이다.
이 책은 12개월 장(章)으로 구성되어 매 장을 질문으로 시작하는데, 10월에 '왜 크고 오래된 참나무는 드물까?'라고 묻는다. 크고 오래 된 참나무를 나도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굴참나무 세 그루, 갈참나무 한 그루, 그리고 졸참나무 한 그루 총 다섯 그루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단다. 소나무 36그루, 은행나무 24그루, 느티나무 19그루가 천연기념물인 것과 비교하면 참나뭇과는 거의 존재감이 없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 이유가 우리나라에서 참나무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였기 때문이라 했다. '참나무는 우리나라 기후에 잘 맞아 어디서나 잘 자라니 오랜 시간 우리 민족의 살림살이에 요긴하게 쓰였다. 구황작물로 먹을거리가 되어 주었다. 가뭄에 더 왕성한 열매를 맺어 시름에 잠긴 사람들에게 더 많은 도토리를 제공한다. 또한 강원도 산간 지역에서는 너와집 재료로 소나무와 전나무가 구하기 힘들어지자, 두툼한 굴참나무 껍질로 지붕을 이은 굴피집을 짓고 살았다. 비가 오면 샐 것 같지만 나무는 물을 머금고 팽창해서 틈을 완벽하게 메워 주었다. 또한 참나무 숯은 연기가 나지 않아 최고의 재료가 되고 버섯을 기르는 원목도 참나무였다.'
건축용 자재로 쓰이는 소나무를 보호하느라 땔감은 늘 참나무였다고 한다. 땔감용으로 도끼질을 당하고, 도토리 수확을 위한 사람들의 거친 발길질 당하며, 끊임없이 빼앗기다 보니 크고 오래된 참나무들이 없었던 것이다. 독일 등 여러 나라들에는 수령이 200년 이상 된 참나무가 공원 숲을 이루어 동화 속의 배경이 되고 사람들의 안식처가 되고 있다고 한다.
우리가 무시하고 함부로 했던 참나무가 가장 많은 생명을 살린다고 한다. 참나무 한 그루는 일생 동안 평균 300만 개의 도토리를 떨어뜨린다고 했다. 그것으로 얼마나 많은 다람쥐와 청설모가 그리고 사람들이 먹고 살았겠는가? 딱따구리도 참나무에 구멍을 뚫어 새끼를 길러 내고, 그곳에 먹이를 저장한다. 참나무는 여러 벌레들이 좋아하는 수액도 흐른다. 시큼한 냄새에 하늘소, 장수풍뎅이, 사슴벌레 나비와 나방들이 몰려와서 참나무에서 살아간다. 줄기에는 이끼와 지의류가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참나무가 참 대단하다.
숲 속에서 낙엽이 쌓인 곳을 살짝 들어보면 많은 생물들이 우굴 우굴 살아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곳은 따뜻하다. 나뭇잎들이 땅을 덮으니 수분 증발이 적어 축축하다. 층층 쌓인 낙엽이 천천히 썩어간다. 낙엽은 썩으면서 상당한 열을 낸다. 그래서 추운 겨울에 참나무가 떨군 나뭇잎은 다양한 분해자들에게 집이 되어 주고 이불이 되어주고 식당이 되어 주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미소생물에겐 기댈 언덕이 되어 주고 있다고 했다.
추운 겨울, 도로와 마당에 낙엽이 쌓이면 사람들은 깨끗이 치우느라 애를 쓴다. 특히 우리 아파트 청소를 담당한 분들에겐 골치 아픈 낙엽이다. 그러나 욕하지 마라. 여전히 참나무는 그 낙엽으로 생명을 키우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