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늬가 있는 삶] 고인의 손을 마지막으로 잡는 사람 | 전원생활

길다래 기자 2025. 12. 9.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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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장의사 유재철

이 기사는 전원의 꿈 일구는 생활정보지 월간 ‘전원생활’ 12월호 기사입니다.

여섯 명의 전직 대통령을 비롯해 유명 대기업 회장, 문화 예술인 등 수천 명의 장례를 주관해온 장의사 유재철. 그는 자신을 ‘염장이’라 소개한다. 정년이 없는 직업이니 힘이 닿을 때까지 염을 하겠다는 그를 만나, 그는 자신을 ‘염장이’라 소개한다. 정년이 없는 직업이니 힘이 닿을 때까지 염을 하겠다는 그를 만나, 죽음과 삶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갑자기 장례가 잡힐 수 있어서 인터뷰 날짜를 두 개 잡아두어도 괜찮나요?”

대한민국장례문화원 유재철 대표와 일정을 정하는 통화 중에 그가 양해를 구해왔다. 죽음이란 예약할 수 없는, 본디 그처럼 급작스러운 일이라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닫게 된다. 서울 은평구 대한민국장례문화원 사무실에서 그를 마주했다. 평범한 사무실 같지만, 오방색 장례 용품이 곳곳에 놓여 있어서 장례회사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장례지도사’ ‘장의사’ 등 여러 표현 중에서도 그의 명함에는 ‘염장이’라 쓰여 있다. 장례 절차 전반을 주관하지만, 그중에서도 시신을 씻기고, 깨끗한 수의를 입혀 입관하는 일, 고인에게 정성을 다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믿는다.

대통령의 장의사 유재철 대표. 대한민국장례문화원 대표를 맡고 있다.

그는 전직 대통령 여섯 명의 장례를 주관했고, 법정 스님 등 전국 사찰 큰스님들의 장례와 다비(불교에서 시신을 화장하는 의식)를 진행했다. 삼성 이건희 회장의 묘소를 조성하고, 이맹희 CJ 명예회장의 장례도 주도했다. 방송인 송해, 탤런트 여운계 씨의 마지막 가는 길도 준비했다. 수천 명 보통 사람의 마지막을 배웅하기도 했다.

그는 학문적으로도 장례를 깊이 공부했다. 그는 동국대학교대학원에서 ‘한국 단체장’으로 석사 학위를,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에서 ‘한국 국가장’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17년에는 ‘대한민국 전통 장례 명장 1호’에 선정되었다. 현재는 직접 장례를 주관하는 일뿐 아니라 장례지도사를 교육하고, 장례문화 확립을 위해서도 다방면으로 애쓰고 있다.

고인에게 다하는 정성
유 대표가 처음 장의사 일을 시작한 것은 1994년이다. 그는 이전에 몇 차례 사업을 벌였지만 신통치 않았고, 결혼하고 자녀가 생긴 뒤로는 자신만의 일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에 절박했다. 광주광역시에서 장례 사업을 하는 친구에게 이쪽 분야가 유망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번듯한 건물까지 올린 친구를 보면서 비전을 보았다.

“처음에는 돈 때문에 시작했어요. 젊은 사람 중에 이 일을 하려는 사람이 없으니 선임자들이 잘 가르쳐주더라고요. 첫날부터 염을 배웠는데, 선임 장의사가 오른쪽 팔을 닦으면 왼쪽 팔을 똑같이 따라서 하는 식으로 했죠.”

예고 없이 시신을 마주하는 일이 무섭지는 않았을까?

“옛날에는 장례를 집에서 치렀으니, 친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아버지와 큰아버지께서 직접 염을 하셨어요. 수의로 갈아입힐 때 제게 할머니 머리를 붙들고 있으라 했는데, 우리 할머니여서인지 무서운 줄 몰랐어요. 염을 처음으로 배운 날, 마주한 시신도 어느 할머니였는데, 마치 돌아가신 친할머니 같다고 생각했어요.”

유 대표는 몇 달 동안 광주광역시에서 염하는 법을 비롯한 장례 전반에 대해 배운 다음 서울 조계사 앞에 ‘연화회’라는 작은 불교 장례 업체를 열었다. 그가 서울로 떠나기 전 친구는 그에게 세 가지를 당부했다. 고인을 돈으로 보지 말고, 장례에 관해 계속 공부하며, 홍보에 돈을 쓰지 말라는 것이었다.

고인에게 정성을 다하면 영가가 손님을 모셔올 것이라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그는 친구의 당부를 되새기며 장의사 일을 해나갔다. 돈을 받고 하는 일이지만 염습을 지켜본 유족들은 진심으로 그에게 감사해했다.

2009년 김대중 대통령 국장.

“아무 준비도 없이 시신 얼굴을 보면 유족들이 큰 슬픔에 빠져 시신에 매달리는 경우가 있어요. 그러면 ‘수의에 눈물 묻으면 무거워서 떠나지 못한다’고 이야기해줘요. 염하는 과정을 지켜보면 그래도 조금은 마음을 진정시키고 마주하는 것 같아요.”

죽은 자의 품위를 지켜주는 일에 보람을 느껴온 그지만, 친구의 시신을 거두었던 일은 깊은 상처로 남아 있다.

“IMF 때 친구가 스스로 세상을 떠났는데, 그때는 울면서 염했어요. 친구 아내도 아이들도 다 아는 사이였는데, 그때는 너무 힘들었죠.”

죽음 가까이에서 일하는 사람은 언제나 평정심을 유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죽음에 잠식되어 자신마저 무너지거나 고인을 온전히 보낼 수 없게 된다.

다비식부터 국장까지
1996년 유 대표는 일봉 서경보 스님이 입적하면서 처음으로 대규모 불교식 장례를 맡았다. 신도 수천 명이 모이는 불교 장례는 영결식 규모부터 절차까지 일반 장례와는 크게 달랐다. 이를 무사히 치러내자 전국에서 큰스님들의 장례 의뢰가 밀려왔다.

2002년부터는 통도사·해인사 등 전국의 사찰을 돌며 불교 장례인 다비를 더욱 깊이 연구했고, 이후 전통 다비를 현대적으로 계승한 ‘연화다비’를 개발했다. 밤을 새워 진행하던 것을 3시간이면 완료하도록, 예와 격식은 갖추되 효율성은 높이는 방향으로 바꾸었다. 2013년부터는 전국 사찰에서 이뤄진 다비 대부분을 그가 맡았다.

2006년, 최규하 대통령 서거 소식이 전해졌다. 그는 곧장 고인을 모신 서울대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장의사 유재철은 여섯 명의 전직 대통령을 비롯해 수천 명의 장례를 주관했다.

“국가에서 주관한 장례식은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이후 처음이었어요. 27년 만이니 국가 장례식을 주관해본 사람이 없어서 우왕좌왕하던 상황이었죠. 그나마 제가 관련 경험이 있어서 대통령 장례를 주관하게 되었어요.”

조선 왕실의 염습·입관 기록과 역대 대통령 장의록을 살피며 장례를 치렀다. 최 대통령 장례식을 국민장으로 치르는 동안 2년 먼저 세상을 떠난 부인 홍기 여사 묘소를 대전 현충원으로 이장해, 최 대통령과 합장했다. 그러한 인연으로 2009년 노무현 대통령 국민장, 2009년 김대중 대통령 국장, 2015년 김영삼 대통령과 2021년 노태우 대통령 국가장, 2021년 전두환 대통령 가족장까지, 전직 대통령의 떠나는 길을 배웅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세브란스병원에서 염습을 진행해서 그분을 제외하고 전직 대통령 다섯 명을 직접 염했어요. 저는 제일 잘하는 게 염하는 것 같아요. 염을 하는 동안에는 정신이 똑발라지고, 고인에게만 정성을 들이게 되죠. 대통령, 국무총리, 누구 시신이건 저는 제 할 일을 하는 거예요.”

고인이 주인공 되는 장례문화
수많은 장례를 주관해온 유 대표는 지금의 장례문화에 대해서 아쉬움이 있다. 장례는 ‘시신을 다루는 일’과 ‘고인의 사회적 관계를 정리하는 일’, 두 가지 역할을 해내야 하는데, 지금의 장례식은 후자에 들이는 시간과 과정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영정 사진 앞에서 잠깐 인사하고, 부의금 전달하고는 조문객들끼리 안부만 묻다가 끝나요. 그런데 미국이나 일본에서는 편안하게 웃고 떠들면서 고인을 기억하며 이야기를 나누어요. 죽었다는 게 꼭 슬픈 것만은 아니잖아요. 어차피 맞이해야 하는 일이라면 작은 애도식이라도 열어서 추억하는 문화가 정착되었으면 해요.”

사찰에서 스님의 시신을 화장하는 다비식 모습.(사진 유재철 제공)

애도식 외에도 살아생전에 가족과 지인을 초대해서 여는 ‘생전 장례식’이나, 아직은 유명인만 하는 ‘영결식’ 등도 제안한다. 유 대표는 실제 그의 장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작은 애도식을 열었다. 대금 연주, 시 낭송, 가족 대표가 추억을 나누는 순서 등을 마련해 따뜻한 시간을 보냈다.

그는 그의 자녀들에게도 자신의 장례식에는 영정 사진은 활짝 웃는 것으로 하고, 평소 즐겨 부르던 가수 이장희의 노래를 틀어달라고 말해두었다. 이만하면 좋은 삶이었으니 눈물지을 것도 없다는 말과 함께. 마지막으로 그에게 어떻게 살아야 좋을지를 물었다. 유 대표는 무소유의 가르침을 전한 법정 스님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린다.

“스님은 마치 잠이 든 듯 보여서 흔들어서 깨우면 일어날 것 같았어요. 죽음이 다가오는 걸 알면서도 의연히 맞이했기 때문에 그런 평온한 표정을 지으셨겠죠. 그만한 정신세계에 이르기는 어렵겠지만, 떠날 때는 미련 없이 두고 가야지요.”

많은 사람은 두려움에, 아쉬움에, 인상을 쓰고 주먹을 꽉 쥐고 죽음에 이른다. 그렇다고 죽음을 막을 수 없다는 걸 그는 누구보다 잘 안다.

글 길다래 기자 | 사진 고승범(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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