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번째 생일날 北 공비에 입 찢기고 피살… “공산당이 싫어요” 이승복
1968년 12월 9일 9세

1968년 12월 9일 강원도 평창 속사국민학교(초등학교) 계방분교 2학년 이승복(1959~1968)은 북한 무장 공비에 의해 무참히 살해됐다. 아홉 번째 생일을 맞은 날이었다. 이날 어머니·남동생·여동생도 함께 목숨을 잃었다.
이승복 가족을 살해한 무장 공비 일당은 울진·삼척 지역에 침투한 북한 124군 소속 120명 중 일부였다. 북한은 10월 30일·11월 1일·2일 사흘에 걸쳐 15명씩 8개 조를 울진·삼척 지역 해안에 침투해 이른바 후방 교란 및 게릴라전을 펼쳤다. 북한은 앞서 1월 21일 특수부대원 31명을 남파, 청와대를 습격해 대통령 박정희를 살해하려고 한 1·21 사건을 일으켰다.
정부는 11월 3일 오후 2시 30분 경북·강원 일부 지역에 ‘을종 사태’를 선포했다. 국군·예비군을 투입해 12월 28일까지 토벌 작전을 벌였다. 북 무장 공비 120명 중 111명 사살, 5명 생포, 2명 자수, 2명이 도주했다. 우리 피해도 컸다. 군경·예비군 33명과 민간인 16명 등 49명이 사망하고 37명이 다쳤다.

이승복 일가 살해 사건은 무장 공비 잔당 5명이 북으로 도주하려다가 일어났다. 공비 일당은 12월 9일 밤 11시 강원도 평창군 노동리 계방산 중턱 이승복의 초가집에 들이닥쳤다. 당시 조선일보 보도에 따르면 가족은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들 참이었다. 안방 문을 박차고 들어온 공비는 어머니 이마에 기관단총을 들이대고 “밥을 지으라”고 했다. 어머니가 “쌀이 없다”고 하자 “강냉이를 삶으라”고 했다. 공비 셋은 아이들을 둘러싸고 감금했고, 둘은 옥수수 삶는 어머니를 감시했다. 아버지 이씨는 아랫마을 이웃의 이삿짐을 날라주느라 외출하고 집에 없었다.
강냉이를 먹은 공비들은 안방에 가족 5명을 몰아넣고 북한 체제를 선전했다. 아홉 살 승복군이 “우리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얼굴을 찡그리며 말하자 공비 한 명이 승복군을 끌고 나갔다. 이어 어머니와 나머지 세 자녀를 모두 끌고 나가 10여 m 떨어진 퇴비 더미로 갔다. 공비들은 자식들이 보는 가운데 벽돌만 한 돌덩이로 어머니 머리를 내리쳐 현장에서 숨지게 했다. 승복군에게는 “입버릇을 고쳐주어야겠다”면서 양 손가락을 입에 넣어 찢은 다음 돌로 내리쳐 죽였다. 나머지 셋도 돌로 내리쳤는데 승복군의 형(당시 15세)은 다행히 살았다.
아버지 이씨는 집으로 돌아와 공비들과 맞닥뜨렸으나 엉덩이를 칼로 찔리는 부상을 입으면서도 달아나 2㎞ 떨어진 향군 초소에 신고했다.
당시 조선일보는 이 같은 내용을 담아 ‘잔비(殘匪), 일가 4명을 참살/ “공산당이 싫어요 어린 항거(抗拒) 입 찢어’(1968년 12월 11일 자 3면)라는 제목으로 보도했다.

이승복 살해 사건은 30년 후인 1998년 다시 세상의 주목을 받았다. 일부에서 조작설을 제기하며 ‘오보 전시회’를 열었다. 이들은 “현장에 조선일보 기자가 없었다” “조선일보 보도는 작문·소설”이라고 주장했다. 근거는 1992년 조작설을 제기한 잡지 ‘저널리즘’ 기고 글이었다.
30년 전 사건을 후배 조선일보 기자들이 다시 검증 취재했다. 생존한 승복군의 형을 비롯해 당시 마을 주민들을 다시 찾아 인터뷰했다. 당시 조선일보 사진기자가 찍은 현장 사진에서 취재 기자가 찍혀 있는 필름도 찾아냈다. 취재 기자가 현장에 있었다는 명백한 물증이었다. 오른쪽 입술 끝에서 귀밑까지 찢어져 잔혹하게 살해된 승복군 시신 사진도 공개됐다.
현장에서 공비의 칼에 찔리고도 살아남은 승복군의 형은 동생이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말했고 “공비가 승복이의 입속에 칼을 쑤셔박았다”(1998년 9월 19일 자 31면)고 증언했다.
마을 주민 및 관련자도 당시 승복군이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말했다가 변을 당했다고 들었고, 조선일보 기자가 현장에서 취재해 기사를 송고했다는 사실을 증언했다.
2006년 11월 24일 대법원은 “조선일보 보도는 사실”이라고 최종 결론을 내렸다. 조작설 제기 후 14년, 오보 전시회 후 법정 공방을 벌인지 8년 만이었다.

승복군의 형은 대법원 판결 후 그동안 겪었던 고통을 토로했다.
“이승복 사건은 거짓이라고 말하는 사람들, 마음이야 그 사람들과 한바탕 싸움이라도 하고 싶었습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68년 12월 9일 우리 집이 생각나는데… 진실을 가리는 듯한 정부며 언론들, 몇몇은 내가 만들어 낸 사건이라고까지 주장하더군요. 승복이 사건으로 화병 드신 우리 아버지께서 더 마음 아파하셨습니다.”(2006년 11월 25일 A8면)
기사 제목은 ‘대법 “조선일보 이승복 보도는 사실” 14년 만에 최종 결론/ 상처받은 어린영혼·유족 누가 달랠 수 있나…’였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교황 “전쟁 위한 기도, 예수의 길 아냐” 부활절 앞두고 美장관과 격돌
- 트럼프 전 며느리 버네사, ‘교통사고 논란’ 타이거 우즈에 “사랑해” 공개 지지
- ‘뇌물 1억원 수수 의혹’ 강호동 농협회장, 경찰 출석
- 美 국방예산 ‘이천조국’ 되나…이란전 이유 40% 증액 편성
- 오타니, 드디어 ‘불방망이’ 본격 가동...시즌 첫 홈런 포함 멀티히트 활약
- “벚꽃 한창인데…” 전국 대부분 강풍 속 봄비
- 한은 총재 후보 신현송, 다주택 보유 82억 자산가
- 이란 상공서 美 F-15기 격추…“실종자 찾자” 양국 수색 대결
- 국힘, 김창민 감독 폭행 사건에 “검찰 보완수사권 없는 경찰 수사 의문”
- 국대에서 펄펄 난 이강인, PSG 복귀 후 선발 출전해 맹활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