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속의 역사] (77) 원효대사의 구도길

원효는 신라의 변방에서 관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지헤로우면서도 뛰어난 완력으로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온몸으로 뛰어들어 해결했다. 일찍 불도의 길에 뛰어들었으나 삼국통일을 향한 나라의 전쟁에도 깊숙이 개입해 전술전략을 펼치는 호국승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신화전설 1: 원효의 길
신라 진평왕 36년, 경산 남쪽 사라수 아래에서 한 아기가 태어났다. 마을 사람들은 이 아이가 장차 세상의 어둠을 밝힐 등불이 되리라 믿으며 이는 하늘의 뜻이라 여겼다. 아이는 '설(薛)' 씨 성을 지닌 귀족 가문 출신으로 일찍이 총명하고 불심이 깊었을 뿐 아니라 어린 시절부터 모든 학문과 불경에 두루 통달하였다.
불법의 진리를 깨닫기 위해 머리를 깎고 출가한 그는 스스로 이름을 '원효(元曉)'라 고쳐 지었다. '근원에서 밝아지는 깨달음'이라는 뜻으로 새벽을 의미했다.
그는 신라 각지를 떠돌며 경전을 공부하고 수도에 전념했다. 청년 시절에 도반 의상과 함께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들은 경주를 떠나 당나라로 향하던 중 지금의 당항진을 지나 바다를 건너기 전 깊은 산중에서 날이 저물자 굴속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됐다.

"모든 것은 마음에서 비롯되나니, 해골이라 여겼으면 더럽고, 그릇이라 여겼을 땐 깨끗했다. 이 마음이 바로 세상을 만들고, 고통도 집착도 이 마음에서 생긴다. 모든 것은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구나."
그는 그 자리에서 곧바로 유학을 포기하고 신라로 돌아갔다. 진리는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는 이 깨달음은 이후 그의 삶 전체를 관통하게 됐다.
귀국한 원효는 전통적인 사찰 중심의 수행을 넘어 거리와 마을, 장터와 논밭을 누비며 평민들에게 불법을 설했다. 때로는 춤을 추고 노래하며, 때로는 미친 사람처럼 웃기도 했기에 사람들은 그를 '행각승'이라 불렀다.
그러나 그 말 속에는 놀라움과 존경이 함께 담겨 있었다. 그는 고정된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누구나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평등한 진리를 전파했다.

불가에서는 원효가 승려의 신분을 버린 것에 대해 비판도 있었으나 원효는 형식보다 진리를 중시했다. "세속에 살며 중생을 깨우치는 것이 곧 참된 불도"라는 그의 말은 훗날 불교의 대중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경주의 분황사에 머물며 불경을 주석하고 사상을 정립했다. 특히 '금강삼매경론', '십문화쟁론', '화엄경소' 등 100여 종, 240여 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술을 남기며, 일심사상을 중심으로 한 화쟁사상을 펼쳤다. 이는 모든 종파의 논쟁을 넘어 본질적 진리에서 하나가 됨을 강조한 것이었다. 그의 사상은 후대 고려, 조선까지 깊은 영향을 끼쳤다.
또한 경주의 기림사를 창건해 수행과 교화의 중심지로 삼았고, 불법을 현실 속에서 실천하려는 그의 사상은 백성들 사이에 깊이 뿌리내렸다. 만년에는 경주 인근 혈사에 머물며 조용히 삶을 정리했다. 신문왕 시대인 686년 원효는 혈사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향년 69세였다.
아들 설총이 원효의 유골로 소상을 만들어 분황사에 모셨다. 사람들은 그의 가르침과 웃음, 그리고 거리에서 들려오던 노래에서 여전히 원효의 존재를 느꼈다.

◆흔적: 오어사
혜공은 부궤화상이라 별명이 붙을 정도로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녔다. 삼태기를 짊어지고 시장바닥이든 야산이든 가리지 않고 술을 마시며 노래를 부르다가 아무 곳에서 코를 골며 잠을 자기도 했다.
그의 행동에는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자유가 느껴졌다. 혜공은 이미 아무렇게 행동해도 자연의 이치에 거스르지 않는 해탈의 경지에 이르렀다. 또한 자연의 힘을 빌려 병을 치료하는 수준에 이르러 가끔 기인의 이적을 일으키곤 했지만 누구도 그 행적을 알아채지 못했다.
다만 고선사와 기림사에 머물며 대승불교론을 써내려가던 원효대사는 그의 행적과 높은 공부를 이해하고 가끔 선문답을 통해 세상의 이치와 불교의 진리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았다.

원효가 혜공의 이러한 자유스러움에 장난을 부렸다. 혜공이 잠든 틈에 그의 삼태기에 죽은 쥐 여러 마리를 넣어두었다. 일반 사람들의 눈에는 그냥 채소더미로 보였다. 일어난 혜공은 삼태기에 가득한 채소를 보더니 소여물을 삶는 농부의 솥에 그대로 쏟아 부었다. 쥐는 이미 채소로 변한 채 소여물이 됐다.
다음 원효가 항사사로 옮겨가 있는 혜공을 찾아갔다. 이때 혜공이 "먼 길을 와서 배가 고플 텐데 물고기나 잡아먹자"고 권했다. 원효는 먼저 장날 쥐로 장난한데 대한 복수라 생각하고 흔쾌히 "좋다"고 응했다.
둘은 어린아이들처럼 물가를 첨벙거리며 고기를 잡아 배부르게 구워먹었다. 그러고는 둘이 서로 마주보며 물가에서 변을 보았다. 배설되는 것들은 모두 고기가 돼 상류로 힘차게 헤엄쳐갔다. 그중 하나가 오색찬란한 빛을 자랑하며 춤추듯 두 사람을 선회하다가 또한 상류로 유유히 사라져갔다.

◆신화전설 2: 원효의 입적
신라 천년의 도읍지 서라벌은 그 자체가 하나의 불국토였다. 그곳의 숲과 물줄기, 산과 들은 수많은 고승들의 발자취를 품고 있었고, 그 중에서도 가장 신비롭고 깊은 자취를 남긴 이는 단연 원효대사였다.
원효는 총명한 설씨 귀족으로 태어나 일찍이 불도에 귀의했고, 세상의 허상 너머 참된 진리를 찾기 위해 평생을 떠돌았다. 그는 법을 논하기보다 길에서 깨달음을 나누었고, 높은 전각보다 아이들과 흙길을 더 사랑했다. 그러나 그의 행적은 단순한 유랑이 아니었다. 그것은 도력의 실천이자, 자비의 변용이었다.

말년에 원효는 깊은 고요 속으로 들어갔다. 그는 경주 인근의 외진 골짜기에 위치한 작은 암자, 혈사에 머물렀다. 바위틈에 들어앉은 그곳은 속세와 멀리 떨어져 마음을 가라앉히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광유선승을 만나 다시 한 번 전율할 만한 깨달음을 접한다.
광유는 말을 아끼며 오직 묵묵히 앉아 호흡하고, 마음의 그림자를 들여다보는 호흡마저 아끼는 자였다. 원효는 그와 함께 선을 행하며 어느 날 밤 바위굴에서 육신의 무게조차 사라지는 듯한 고요한 몰입에 들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육천통(六天通)'에 이른다. 육신의 경계를 벗어나 모든 경계가 헛된 것임을 보았다. 과거와 미래를 넘나들고, 모든 중생의 마음을 헤아리며 하나의 법계로써 세계를 보게 된 것이다. 그 순간 그는 육신을 벗은 신선의 경지, 자유로운 존재가 됐다.
입적의 순간 혈사에는 이상한 기운이 감돌았다. 바위에서 은은한 향이 피어올랐고 새들은 노래하며 날았다. 하늘에 다섯 가지 빛의 구름이 일었다.
누군가는 그가 몸을 남기지 않고 홀연히 사라졌다 하고, 누군가는 그가 다시 백 개의 모습으로 세상에 흩어졌다고 했다. 그러나 진실은 그는 세상에서 사라진 것이 아니라 세상 모든 곳에 동시에 머무르게 된 것이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이 글은 문화콘텐츠 육성을 위해 스토리텔링 한 것이므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Copyright © 대구일보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