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 그곳에서] 먼 섬에서, 가장 늦게 지는 해를 오래도록 바라보다 | 전원생활

윤혜준 기자 2025. 12. 8.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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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신안 가거도

이 기사는 전원의 꿈 일구는 생활정보지 월간 ‘전원생활’ 12월호 기사입니다.

살다 보면 삶의 모든 것이 권태롭게 느껴지는 순간이 찾아온다. 꾸역꾸역 버티다 맞이한 연말이라면 권태로움은 깊어간다. 이런 마음을 안고 전남 신안군 흑산면의 가거도로 향해본다. 우리나라 최서남단에 있는 절해고도로 원시에 가까운 산과 바다의 풍경, 우리나라에서 가장 늦게 지는 해를 만날 수 있다. 태초의 풍경을 지닌 섬등반도 앞에서 묵은때를 씻어낸다. 갓 잡은 불볼락으로 차려낸 상차림에 팔딱팔딱한 생명력을 꿀꺽 삼키고, 섬등반도 뒤로 넘어가는 노을에 어둡던 마음을 담궈본다. 뭉툭하던 감성이 날카롭게 되살아난다. 
‘사람의 운명이 자신의 이름을 따라가듯 섬도 자신의 이름을 따른다.’ 섬 여행 도중 이름 모를 누군가에게 들었던 문장이다. 한 사람의 삶과 운명은 그의 이름을 따라갈 확률이 높으며, 이런 작명의 신비함은 섬도 피해 갈 수 없다는 맥락에서 나온 말이었다. 가거도(可居島). ‘사람이 가히 살 만하다’라는 뜻이다. 신라시대에 장보고가 작명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가거도만큼은 작명의 신비한 법칙에서 벗어난 섬처럼 보인다. 우리나라 최서남단에 있는 이 섬은 목포에서 136㎞ 떨어져 있다. 쾌속선을 타고 가도 4시간 30분이 걸린다. 강릉에서 울릉도까지 쾌속선으로 3시간이 걸린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멀고 먼 섬이다.

섬의 지형은 척박하다. 해발고도가 639m인 독실산을 중심으로 전체가 비탈진 형태의 지형을 띤다. 마음 놓고 일상을 편히 꾸려갈 만한 땅은 되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주민 343명은 골짜기에 터를 잡고 그저 물이 흘러가는 대로 느릿느릿 살아간다.

사람에게 그다지 너그럽지 않은 덕에 되려 가거도는 본래의 모습 그대로 존재한다. 흔히 이 섬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오지’라는 별칭이 따라붙는다. 야생성을 간직한 자연환경은 문명 속에서 무뎌진 야성을 일깨우고, 1970년대로 돌아간 듯한 마을 풍경은 향수를 불러 일으킨다.

그래서 가거도는 특별한 목적을 가진 사람들을 끌어들인다. 흑백사진의 대가 마이클 케냐, 고(故) 노회찬 의원,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 <괜찮아 사랑이야> 등을 집필한 노희경 작가 등이 가거도에 머물다 떠났다. 반복된 생활에 지쳐 새로운 경험을 하고 싶은 여형객에게 특히 인기 있는 여행지다. 권태로워진 마음을 안고 가거도로 가본다. 활기 넘치는 섬의 생명력을 잔뜩 훔치고, 오랫동안 지는 해를 눈에 담아볼 예정이다.

해상 길목에서 마주한 특별한 풍경
가거도를 여행할 때는 시간을 넉넉히 낼 필요가 있다. 가거도의 면적은 약 9㎢(272만 평)이다. 제주도 면적의 약 200분의 1에 해당한다. 둘러보는 데 하루면 충분한데, 여행 일정은 2박 3일로 짜기를 권한다. 오고 가는 배 시간만 꼬박 하루가 걸리는 까닭이다.

배는 전남 목포연안여객선터미널에서 출발한다. 출항 시간은 크게 오전과 오후로 나뉜다. 여행 시간을 충분히 확보하기 위해 여행객 대부분은 오전 8시 10분에 출항하는 배에 승선한다. 설레는 마음을 안고 승선한 ‘핑크돌핀호’엔 생생한 활기가 감돈다. 섬 주민들의 손엔 배추·감·귤 등 갖가지 농산물과 각종 생필품이 가득하다. 전문 낚시꾼들, 구독자 29만 명을 보유한 유명 여행 유튜버의 모습도 보인다.

민박집 사장님이 갓 잡아온 감성돔으로 회를 떠줬다. 젓가락으로 회를 가득 집어 입안에 넣어본다.

오늘 이 배에 탄 인원은 150명에 달한다. 평소 이용객이 80~90명인 걸 생각하면 꽤 많은 축이었다. 선사 직원이 기자에게 “기상 악화로 배가 결항했다가 일주일 만에 뜨는 것”이라 말했다. 가거도에 가기 위해선 시간과 돈뿐만 아니라 약간이 운도 따라줘야 한다.

핑크돌핀호가 출발한다. 노선은 목포-도초도-다물도-흑산도-상태도-하태도-가거도로 이어진다. 쾌속선이 다물도에 닿는다. 다물도는 큰 배를 접안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추고 있지 않아 종선을 바다 한가운데로 보낸다. 쾌속선과 종선이 만나자 승선객이 우르르 작은 종선으로 이동한다. 선원들이 공을 패스하듯, 농산물과 건축자재 등을 종선으로 옮긴다. 멀어지는 종선에서 한 승선객이 환히 웃으며 작별 인사를 건넨다.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진심 어린 인사를 받은 건 오랜만의 일이다.

섬등반도에서 바라보는 노을 환상적
오후 1시, 핑크돌핀호가 가거도항에 도착한다. 가거도엔 마을 3개가 있다. 가거도항이 있는 대리마을, 섬 서쪽에 있는 항리마을, 섬 북동쪽에 있는 대풍마을이다. 섬주민들 대부분은 대리마을에 산다. 여기엔 면사무소 출장소, 보건소, 슈퍼마켓, 음식점이 모여 있다. 항구에 내리자 숙박객을 픽업하러 나온 항리마을 민박집 사장들의 차량이 보인다. 여행객은 대부분 항리마을에 숙소를 잡는 편이다. ‘다희네 민박집’ 차량에 몸을 싣는다.

민박집 주인장 노애란 씨가 임도를 따라 거침 없이 달린다. 차창 밖으로 무성한 후박나무 군락지가 보인다. 과거 가거도 주민들은 이 후박나무에 기댄 채 생활을 영위해왔다. 가거도에서 생산된 후박나무 껍질은 전국 생산량의 80%를 차지할 정도로 품질이 좋은 걸로 평가받았다. 노씨는 “중국산이 수입되며 생산 면적과 생산량이 줄어들었다”고 말했다. 후박나무를 바라보는 그의 표정에 아쉬움이 비친다.

하얀 가거도 등대가 푸른 바다와 어우러져 깨끗한 느낌을 자아낸다.

20분가량 달리던 차량이 민박집에 들어선다. 노씨의 남편이 갓 잡아온 불볼락을 손질 중이다. 항리마을 민박집 사장들은 대부분 어업에 종사한다. 이들은 직접 잡은 제철 생선을 재료 삼아 근사한 식사를 제공한다. 테이블에 앉으니 불볼락구이와 가거도의 향토 음식인 장어 국수가 나온다. 불볼락은 가거도 근해에서만 볼 수 있는 특별한 어종이다. 한 점 베어 무니 살은 담백하고, 살짝 그을린 껍질에선 고소하고 은근한 단내가 난다. 김치찌개를 연상시키는 빨간 국물과 어우러진 담백함이 새로운 미식 경험을 선사한다.

오래된 민박집을 둘러싼 자연환경은 독특한 풍경의 집합소다. 스위스 초지를 연상시키는 초록의 산등성이가 펼쳐진다. 독실산을 타고 오르는 구불구불한 도로는 거대한 뱀의 형상 같아 절묘한 그림을 만든다. 가거도의 제일 비경인 섬등반도도 보인다. 100m 높이의 해안절벽이 꿈틀대며 바다로 용틀임한다.

섬등반도는 우리나라에서 해가 가장 늦게 지는 곳이다. 마이클 케냐가 촬영을 위해 이곳에 일주일이나 머물렀을 만큼 일몰이 아름답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랫동안 아름다운 황혼을 바라보는 호사를 누린다.

최서남단 해역을 지키는 환한 불빛
다음 날, 섬의 북쪽에 있는 ‘가거도 등대’로 이동한다. 백년등대라 불리는 이 등대는 1907년 불을 밝혔다. 김용복 씨(55)를 만난다. 그는 목포지방해양수산청에 1995년 입사한 후 목포·가사도 등대를 거쳐 현재는 가거도 등대 항로표지관리원으로 근무 중이다. 가거도 등대 빛은 동중국해와 외해에서 진입하는 선박들의 길잡이가 돼준다.
섬등반도에는 ‘송년 우체통’이 있다. 소망 엽서에 근심과 걱정을 담아 지는 해와 함께 떠나보내라는 의미를 담아 설치됐다. 면사무소는 12월 말에 엽서를 모아 1월 초에 보내준다.

“가거도는 태풍이 지나가는 길에 있어 등대가 자주 고장 나는 편이에요. 예전에 태풍 ‘프라피룬’이 왔을 때, 정전으로 불빛이 꺼지는 위급 상황이 발생했어요. 사람이 날아갈 정도로 바람이 셌는데 혼자 고군분투하며 수리해 다시 등대 빛을 밝혔던 기억이 오래 남아 있어요.”

그는 자신이 지켜온 등대 빛이 만선을 이룬 어선이 무사 귀환 수 있도록 돕는 ‘희망의 빛’이 되기를 바란다. 일에는 늘 이런저런 어려움이 따르지만, 지난 30년 동안 이 길을 택한 것을 후회해본 적은 없다. 외딴 곳에서 지내다 보니 집안일을 챙기지 못해 마음이 쓰일 때도 있지만, 이 또한 등대지기의 운명처럼 받아들인다. 그의 형형한 눈빛, 마치 등대의 환한 빛처럼 느껴진다.

가거도항으로 이동한다. 목포행 배가 들어오길 기다린다. 웅장한 크기의 방파제가 눈에 담긴다. 일명 ‘슈퍼 방파제’라 불리는 이 방파제는 가거도항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고강도 구조물이다. 2012년 착공한 공사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그간 가거도는 태풍으로 인해 심각한 피해를 입어왔다.

가거도 일몰. 용틀임하는 섬등반도와 망망대해를 뒤로한 채 해가 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해가 가장 늦게 지는 곳이다.

정부는 기존 방파제로는 반복되는 태풍 피해를 막기 어렵다는 판단 아래 100년 주기의 초대형 태풍에도 견딜 수 있는 방파제를 건설 중이다. 방파제 부근에 60t짜리 테트라포드가 공깃돌처럼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함께 배를 기다리던 주민이 말했다.

“2011년 태풍 ‘무이파’가 찾아왔을 때, 저 테트라포드가 바람에 날아와 현재 면사무소가 있던 자리에 떨어졌어. 내가 그 당시에 찍었던 사진 보여줄게. 여기 봐봐. 파도의 높이가 건물 20층은 돼 보이지? 참 아름답지 않아?”

생명을 위협하는 높은 파도를 보며 “아릅답다”고 표현하는 그의 시선에 말문이 막혔다. 그는 “뭐든 시간이 지나 무뎌지면 다 괜찮게 느껴져”라 덧붙였다. 목포로 돌아온다. 익숙하던 도시의 모습이 생경하게 다가온다. 권태로움에 지쳐 있던 감각이 날카로워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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