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만원 써도 아쉽다, 더 쓸 껄”…F1 싱가포르 그랑프리 직관 가보니
“그러니까 너 방금 새로운 취미에 200만원을 썼다는 거야?”
F1 싱가포르 그랑프리로 향하는 비행기, 옆자리에 앉은 러시아 승객이 농담처럼 던진 말이다. 스포츠에 빠져본 사람이라면 직관 경기를 보기 위해 비싼 표를 결제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모니터로 챙겨보던 경기를 현장에서 직접 마주하는 순간은 값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경험이다.

빠져버린 계기는 지난 여름 개봉한 영화 ‘F1 더 무비’다. 시속 300㎞로 질주하는 맹렬한 추격전과 극한의 화려함. 영화의 여운을 이어가기 위해 넷플릭스에 있는 F1 다큐멘터리를 밤새 정주행하다 즉흥적으로 싱가포르 그랑프리 표를 사버렸다.
즉흥이라는 용기를 빌리지 않았더라면 도저히 손을 댈 수 없었을 가격. 내 벌이에 맞지 않는 과소비라 걱정은 했지만 인생에 한번쯤 직관을 간다면 미쳐있는 지금 가고 싶었다.
올해 시즌도 이제 단 한 경기를 남겨두고 있다. 영화 흥행과 함께 역대급 관심이 몰린 2025 시즌. 최근 발테리 보타스의 내한, 인천 서킷 추진 소식까지 더해져 F1과 한국의 거리는 더 가까워졌다.
올해 직관 기회를 놓쳐 내년도 F1 직관을 고민하는 사람들을 위해 직접 다녀온 싱가포르 직관의 경험을 생생히 담아본다.

F1을 처음 알고 난 뒤 든 생각이었다. F1의 무대는 말 그대로 세계다. 올림픽, 월드컵과 함께 세계 3대 스포츠로 꼽히는 F1. 지구 전체가 경기장이라고 해도 과장이 아닐 만큼, 한 시즌 동안 21개국에서 24개의 그랑프리가 열린다.
스포츠 중에서도 F1은 가장 많은 자본이 들어가는 종목으로 꼽힌다. 스폰서 로고가 잔뜩 박힌 스포츠 유니폼 디자인의 원조도 F1이다. 역사와 영향력 모두 압도적이다.

서킷 주변엔 F1 팬들을 위한 다양한 볼거리가 많다. 마리나 베이 샌즈 호텔은 체커기로 변하고 곳곳에서 팀 팝업스토어가 열리며 선수들의 깜짝방문도 이어진다. 거리엔 유니폼을 입은 팬들이 가득하고 지하철 경고문조차 체커기 디자인이다.

F1 팬끼리는 만나자마자 응원팀·선수 이슈·여행 이야기로 몇 시간이고 수다를 나눈다.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홍콩 친구와는 급속도로 친해져 3일 내내 함께 다녔다. 세탁기를 기다리다 내 페라리 유니폼을 본 영국 친구와도 금세 친해져 다음 날 점심을 함께 먹었다.
만나는 사람마다 F1 얘기만 하다 보니 현실 감각이 사라진다. 그냥 경기를 보러온 게 아니라 F1이라는 세계에 들어온 것 같다. 엔간히 좋아해서는 직관을 보러오지 않으니 ‘찐팬’들만 모여 가능한 일이다.

“아, 너도 페라리를 좋아하는구나.” 그 눈빛에 괜히 “포르차 페라리!”라도 외쳐야 할 것 같다. 여기서 팀 유니폼은 단순한 옷이 아니라 명함이다.

경기 후 서킷 개장이나 떨어진 부품 줍기 같은 ‘F1 직관 전통’도 존1의 특권이다. 드라이버가 경기 전 무대에서 팬과 인사하는 행사도 존1에서만 열린다.

티켓을 빼고도 그랑프리 기간에는 비행기랑 숙소 가격도 함께 오르니 말 다했다. 가장 저렴한 구역인 존4의 3일권 가격은 약 80만원. 제일 싼 티켓인데도 항공권보다 비싸다. 평균 직장인이 감당하기에는 만만치 않은 취미. 가기 전까지 ‘너무 과소비한 건 아닐까’ 하는 걱정도 들어 취소할지 고민했다.
고심 끝에 가장 싼 존4 워크어바웃 티켓을 샀다. F1 그랑프리 티켓은 놀유니버스, 마이리얼트립에서 판매한다. 계급으로 따지면 가장 ‘최하위’, 꼬리칸이다. 갈 수 있는 구역이 적고, 선택권이 많이 없다.
존4는 구조상 선수들을 거의 볼 수 없다. 도로로 등장한다 해도 시속 300㎞로 달리기 때문에 ‘봤다’기보다 ‘사라졌다’는 표현이 더 맞다.

좌석을 가져도 코너석이 아니면 빠르게 지나가는 것만 보느라 지루하기도 하다. F1에서 재밌는 구간은 △추월구간 △코너 △피트인구간 정도다. 팬들은 더 재밌는 구간으로, 선수들이랑 더 가까운 구간으로 가기 위해서 지갑을 연다.

경기장에서 만난 한국인 방문객은 이미 존1의 좌석을 끊었음에도 “조금만 더 내고 VIP 갈 걸 싶더라”고 말했다. 처음엔 선수 얼굴 코빼기도 못 본 나를 농락하는 건가 싶었지만, 좋아하는 마음이 큰 만큼 아쉬움에 비례한 법이다. 끝나면 모두가 같은 다짐을 한다. 다음엔 더 좋은 티켓으로 오겠다고.

직관에서 실제 차는 화면보다 훨씬 빠르다. ‘온다’ 싶으면 이미 지나가 있다. 엔진음은 귀가 먹먹할 정도로 크다. 화려한 불빛, 쌩쌩 달리는 소리, 팬들의 함성까지. 현장이 주는 생생한 모습들은 잊을 수가 없다.

티켓이 가성비라고 느꼈던 요소 중 하나는 세계 유명 아티스트들의 공연이다. 그랑프리는 경기를 넘어 거대한 축제다. 특히 3일 내내 이어지는 아티스트 라인업은 웬만한 페스티벌을 능가한다.
1일 차에는 지드래곤과 씨엘이 등장해 오후부터 광장이 꽉 찼다. 엘튼 존을 비롯한 굵직한 아티스트들도 무대에 올랐다. 이런 아티스트들을 한데 볼 수 있다는 것도 믿기지 않았다. 푸드트럭, 아케이드, 기념품샵 등 즐길 거리도 많다.

좋아하는 마음은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준다. 올 한 해를 돌아보면 F1 덕분에 채워진 시간이 많았다. 경기를 기다리고 선수들 소식을 챙겨봤다. 단조로웠던 일상을 풍요롭게 만들어준 것, 이래서 사람들이 스포츠를 좋아했구나 싶다.
매년 직관하러 가겠다는 약속은 어렵지만 언젠가는 다시 갈 거란 의지를 다지며 마지막 딱 한 경기. 이제 드라이버 챔피언십의 향방을 결정할 마지막 레이스를 지켜본다.
싱가포르 = 문서연 여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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