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10년차, 수다로 진료합니다” [.txt]

한겨레 2025. 12. 7. 14:31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일하는 사람의 초상 l 산부인과 의사 이종현씨
아픈 곳을 먼저 털어놓는 환자들과 마음 나누고
새 생명 탄생 지켜볼 수 있어 직업 만족도는 최고
새벽에도 밤에도 긴급 호출이면 곧장 뛰어가며
진통 환자 덕에 심근경색 발견해 살아난 기억까지

일하는 사람의 초상 l 산부인과 의사 이종현씨

제주시 노형동에 있는 산부인과 진료실에서 차트를 확인하는 이종현 원장. 염기원 작가 제공
우리는 일을 해서 돈을 벌고,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보람도 얻습니다. 지금 한국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다양한 일 이야기를 ‘월급사실주의’ 동인 소설가들이 만나 듣고 글로 전합니다.
유난히 몸이 약한 소년은 툭하면 가야 했던 병원이 지긋지긋했다. 의대만큼은 싫다던 그의 생각이 바뀐 건 중학교 3학년 때. 진로를 상담해주던 담임 선생님이 의대생 조카를 소개해준 게 계기가 됐다. 막연히 과학자가 되겠다던 그는 의사가 보람 있는 직업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로부터 5년 뒤, 소년은 의대에 입학했고, 병원이 일터가 되었다.

서울 생활을 접고 내려와 이제 어언 10년차 제주살이에 접어든 산부인과 전문의, 이종현 원장. 서울 사당역 호프집에서의 회동 이후 10여년 만에 그를 마주했다. 미혼 남자인 내게 서울과 제주만큼 멀게 느껴지는, 제주시 노형동 ‘맘편한산부인과’ 3층, 그의 진료실에서였다. 기피 전공으로 꼽히는 산부인과를 언제, 왜 선택했는지 묻자 그는 일단 성적이 별로 좋지 않았다며 웃었다.

“보통은 졸업할 때나 인턴 때 정하는데, 나는 본과 들어가서 1, 2년 공부하고 바로 정했으니까. 좀 빨리 정한 거죠. 그때만 해도 산부인과 인기가 떨어질 때였고. 물론 성적이 좋지 않아도 고를 수 있는 과가 많이 있긴 했는데, 외과적인 수술도 하고. 지금처럼 내과 진료, 외래도 보고. 또 산모한테 처치도 해주고. 그런 것들을 할 수 있으니까요. 산과도 있고 부인과도 있어서 선택할 수 있는 것도 많고.”

더 큰 이유가 있는지 물으니 ‘수다 떨기 좋아서’라고 했다. 의아한 표정을 짓자 그는 손사랫짓하며 자신이 워낙에 말하는 걸 좋아하는 수다쟁이란다. 병원에 온 남자들은 좀처럼 말을 안 해서 답답했는데, 여자들은 어디가 아프다고 먼저 얘기를 하고, 길게 소통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고 했다. 나 역시 그와 얘기를 나누다 시간 가는 줄 몰라 약속한 것보다 오래 인터뷰를 했다.

학부를 마친 그는 고대 병원에서 인턴과 레지던트 생활을 거쳐 전문의가 된 뒤 공보의로 복무했다. 이후로는 쭉 서울에 있는 병원에서 일했다. 그러다가 2016년 가을, 홀연 제주도로 떠났다. 예능 프로그램 ‘효리네 민박’이 방영되기 전이었다. 무엇이 그를 이 섬까지 오게 했을까.

“전에 있던 병원에서 나오고 직장을 알아보던 중이었어요. 당연히 서울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제주도에 내려온 지금 원장님이, 학교 선배죠. 봄에 개업해서 혼자 하다가 의사가 더 필요해졌다고 하더라고요.”

당시 제주도는 인구가 늘어나고 있었는데 산부인과 의사가 부족했다. 고민 끝에 새로운 도전을 결심했다. 문제는 서울에 꾸려둔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는 식구들이었다. 당시 영어유치원에 막 들어간 아이를 제주에 있는 국제학교에 보내주겠다며 설득했다. 홀로 제주로 내려와 지금의 병원에서 일을 시작했고, 1년 뒤에는 아내와 아들도 제주로 왔다.

그를 만나기 전 나는 동문시장과 공항 사이에 있는 숙소에 짐을 풀고 왔다. 병원이 있는 노형동에 들어서니 제주에서 가장 높은 랜드마크인 제주드림타워가 눈에 들어왔다. 줄지어 선 아파트와 대형마트, 주상복합건물이 만든 풍경은 서울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그래도 관광이나 한달살이가 아닌, 정착한 사람이 생활하며 느끼는 제주살이는 차이가 있으리라.

“지인들과 단절되는 것도 있고, 문화 인프라도 좀 다르고. 물가가 생각보다 비싸고 불편한 부분이 있더라고요. 택배도 빨리 안 오고, 백화점 같은 것도 없고. 텃세도 좀 있어요. 말투만 보고도 제주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아니까. 그나마 의사라 영향을 좀 덜 받는다고 보는데, 외지인들하고 잘 안 섞이려는 경향이 있어서 친해지기가 좀 어려워요.”

브라질, 일본, 베트남, 라오스, 러시아, 중국, 대만, 타이 등 다양한 나라의 산모를 만난다는 것도 제주의 특색 중 하나다. 출산율이 낮아지는 상황에서 산부인과의 미래를 얘기하기도 했는데, 병원보다 의사 줄어드는 속도가 더 빠르단다. 서울에도 문 닫는 병원이 많은 형편이다. 제주도에서 분만할 수 있는 병원은 손에 꼽는다. 대학병원 레지던트를 제외하면 개인 병원에 근무하는 45살 이하 의사를 본 적이 없다고 하니, 현직들이 물러나면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한국에서 전문직 종사자의 업무는 전국 어디를 가나 비슷하게 돌아간다. 그는 일주일에 6일 출근한다. 오전 9시부터 진료를 시작해 계획된 수술과 출산만 소화해도 숨 가쁘다. 게다가 산부인과 아닌가. 새벽이건 밤이건 유도 분만이나 긴급한 출산이 발생한다. 이를 대비해 세명의 의사가 돌아가며 당직을 선다. 화요일과 수요일이면 그는 병원과 10분 거리에 있는 곳에서 밤새 대기한다. 주말도 3교대 당직 체계다. 인터뷰를 월요일 저녁에 한 것도 그 이유다.

그런 빡빡한 생활에는 인이 박였다. 레지던트 3년차, 기혼자였던 그는 한달에 두주만 집에 갈 수 있었다. 그런 날조차 새벽에 나와서 밤늦게 퇴근하니 어린 아들 얼굴 보기도 힘들었다. 지난 금요일에도 아기 받느라 늦게 끝나 서귀포 집에 가지 못했다. 주말은 당직이었고, 나와의 약속 때문에 이날도 집에 가는 걸 포기했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긴급한 상황을 자주 겪는 직업이고, 의료 사고에 대한 염려도 있을 것이다. 요즘은 병원을 찾기 전에 덤터기 쓰지 않는 요령부터 검색하는 이들도 많다. 의사보다 인공지능(AI)에 먼저 물어본 뒤 혹시 과잉 진료가 있지 않을까 하는 의심을 안은 채 병원에 들어서기도 한다. 의료 현장에 있는 의사로서 부담스럽지 않은지 물었다.

“모든 의사가 다 그렇겠지만 의료 사고를 안 내려고 노력하죠. 고의로 사고를 내지는 않겠지만, 진료가 밀려 있고 하면 처치나 이런 게 늦어지기도 할 수는 있을 텐데. 나는 진료의 최우선 목표가 사고 없이, 최대한 안전하게 진료를 보는 것이에요. 제주도에 온 이후로 지금까지 큰 사고라 할 건 없었어요. 다행이죠. 에이아이에게 틀린 정보를 받아오는 분들이 많긴 해요. 그러니까 더 잘 알려드려야죠.”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특별하게 하는 것은 없다. 대신 걷는 걸 좋아해 주말이면 올레길로 향한다. 한번 걷기 시작하면 15㎞에서 20㎞까지 걷는다. 아내는 이미 완주증까지 받았다. 사실 이제 그에게 걷는 건 지금의 일을 계속하기 위한 필수적인 루틴이기도 하다. 환자를 보는 게 직업인 그 역시 환자가 됐기 때문이다.

3년 전의 일이다. 당직을 서던 새벽, 진통이 심한 환자의 전화에 선잠에서 깼다. 병원으로 향하는데 가슴에 심한 통증이 왔다. 의사인 만큼 본인의 병명을 이미 알고 있었다. 도착하자마자 119를 불러달라고 부탁했다. 내원한 환자를 다른 원장에게 맡기고 구급차에 실려 갔다. 짐작대로 심근경색이었다.

“그 산모가 아니었으면 자다가 어떤 일이 생겼을지 모를 일이었죠. 감사해요. 스텐트를 넣어준 담당 선생님이 이제 잠을 푹 자야 한다면서, 당직이나 수술 같은 스트레스 받는 일을 하지 말라고 그랬죠. 그런데 그거 안 하면 어떻게 먹고살아요. 선수끼리, 하하. 나름대로 건강을 챙기려고 노력하는데 직업상 한계는 있죠. 그래도 꾸준히 약을 먹고 있으니 다시 재발하지는 않겠죠.”

태아의 3차원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초음파 영사 기기. 염기원 작가 제공

당직 근무가 있는 병원에 근무한다는 건 수면 시간이 부족하다는 얘기다. 응급 환자가 오는 건 대개 밤 11시부터 새벽 2시. 그래서 아예 2시 이후에 잔다. 중간에 전화가 와서 깨는 일도 잦지만 무조건 오전 9시까지 출근해야 한다. 그런 생활이 일상이라니, 극한 직업이다.

제주살이는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벌이가 나쁘지 않다고 해도 아이가 다니는 제주 국제학교의 학비를 내다 보니 병원을 개업하는 건 엄두가 나지 않는다. 수다를 줄이고 더 많은 환자를 받으면 돈을 더 벌 수 있겠지만 그럴 생각은 없다. 그는 월급 받는 봉직의, ‘수다쟁이 산부인과 의사’인 지금이 만족스럽단다.

“보람이 많잖아요. 건강한 아이들을 볼 수 있고, 그러면 기쁘죠. 아픈 환자도 오지만, 임신의 기쁨을 안고 즐거운 마음으로 출산하러 오는 분들이 주로 와요. 갓 낳은 아이를 안고 행복해하는 분들을 보는 게 직업이니 얼마나 좋아요. 아픈 사람을 낫게 하는 게 의학의 대부분인데, 산부인과는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지켜보는 곳이니까.”

그러면서 자신의 직업 만족도가 최상이라고 자부했다. 서두에서 언급한 것처럼 환자들과 즐겁게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점도 큰 지분을 차지한다. 그는 다른 의사들보다 오랫동안 환자를 본다. 웬만하면 끊지 않고 얘기를 다 들어주며 살갑게 대답해준다. 유산을 겪은 산모들은 자신을 책망하는 경우가 많단다. 그럴 때는 이후의 수술 절차를 기계적으로 통보하기에 앞서 오래도록, 조심스럽게 얘기를 나누며 마음의 상처부터 치료해준다. 그것도 그의 보람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환자 얘기도 인상적이었다. 레지던트 때였는데, 혼자 외래로 온 초진 환자로 분만이 임박한 상태였다. 보통은 출산 뒤 이틀간 입원하고 퇴원하는데, 그 산모는 갓 낳은 아이를 놓고 그대로 사라졌다. 수납 담당 직원이 집에 찾아가니 유리창도 없이 비닐로 덮은 집에 아이 다섯이 더 있었다. 남편은 지방 건설 현장의 일용직 노동자였다. 직원은 안타까운 상황을 방송국에 제보했다. 이후 병원비를 해결하고도 넉넉한 후원금이 모여 그 가족들에게 건넬 수 있었단다.

인터뷰를 마친 그는 오랜만에 만난 나를 그냥 보낼 수 없다며 인근 고깃집으로 데려갔다. 소고기를 굽고, 베지근한 곱창전골 국물을 떠먹으며 얘기를 이어갔다. 부러울 것 없이 자란 줄 알았던 그는 사실 넉넉한 집안이 아니었다고 고백했다. 사립대 의대의 비싼 등록금은 장학금의 도움으로 해결했다. 가세가 기울었던 때가 있었는데, 후천적으로 시력을 상실한 어머님께서 마사지사로 일하며 실질적인 가장 역할을 하셨다는 말을 덤덤히 털어놓았다.

자리를 옮겨 나는 생맥주를, 그는 카페라테를 마시며 자정이 넘게 수다를 떨었다. 나는 어느새 불면증 얘기부터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것까지 그에게 내놓고 있었다. 경영학을 전공한 내가 병원장이라면, 그와 같은 수다쟁이 의사를 두고 고민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가족이 병원에 갈 일이 생긴다면 꼭 그와 같은 의사―어디가 어떻게 아프고 무슨 걱정을 하는지 다 들어주는―와 만나기를 바랄 것이다.

얘기를 나누는 동안 문득 ‘칠드런 오브 맨’이라는 2006년 영화가 떠올랐다. 산부인과 의사가 없는 세상이라면 그 자체로 디스토피아일 것이다. 숙소로 돌아온 나는 다시 제주에 오게 되면 ‘우주보다 귀한 한 생명’이라는 주제로 그와 또 오래도록 수다를 떨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염기원 작가

염기원 작가
염기원 l ‘문학의봄’으로 등단해 장편소설 ‘구디 얀다르크’ ‘인생 마치 비트코인’ ‘오빠 새끼 잡으러 간다’ ‘여고생 챔프 아서왕’ ‘블루아이’를 썼다. ‘월급사실주의’ 동인이다.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