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선의 남도인문학〉한강의 문장과 김대성의 선율이 만날 때

전남일보 2025. 12. 7.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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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3. 서정 음악극 ‘다랑쉬’
이윤선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전남도 문화재전문위원
김대성 작품집 다랑쉬 표지.

작곡가 김대성과 소설가 한강의 작품을 엮어 음악극 '다랑쉬 오르는 언덕'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다(본지 2025년 3월 15일자). 한강의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에 김대성의 곡을 입히자는 소박한 생각을 전한 글이었다. 오페라도 좋고 실내악도 좋고 어떤 형태든 시도해보았으면 싶었다. 하지만 한강 작가가 대외 활동을 하지 않는다고 하여 소통할 길을 찾지 못했다. 아마 내 능력이 부족한 탓일 것이다. 그래서 음악극의 개요를 여기에 간단하게라도 밝혀두자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그렇다고 노벨문학상 1주년을 기념하는 무슨 어벌쩡한 이벤트를 벌이고자 함이 아니다. 한강의 소설을 읽을수록 이야기가 아니라 사실은 음악 자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김지하의 초기 담시(譚詩, 발라드)도 그랬던 것같다. 담시를 창작판소리로 풀어 노래했던 임진택에 의하면 한 글자 한 획도 고치지 않고 그대로 노래해도 된다고 했다. 담시 자체가 노래라는 뜻이겠다. 한강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묘사와 독백과 대사와 아니 풍경에서 우러나오는 음악적 배경과 선율과 리듬들 말이다. 소설 속 무수한 대화들이 독백일 수 있고 챈트나 구음 시나위일 수 있다. 여기에 세계적 권위를 갖고 있는 김대성의 지극히 한국적인 곡들 그것도 4·3과 관련된 곡들이 오버랩되는 것은 내 감성이 너무 편향적이서만은 아닐 것이다. 이 소설은 오페라적 서사보다 레퀴엠적 울림 즉 죽은 자를 기리는 음악적 의례에 훨씬 적합하다. 레퀴엠은 죽은 사람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한 미사 음악을 말한다. 보다 민속적으로 말하자면 4·3에 대한 씻김굿과 만가 한판이라고나 할까. 아마도 소설의 서사가 마치 길고 긴 해금 연주를 주선율 삼고 장중한 첼로 연주를 배경 삼은 듯한 그런 느낌이다. 하지만 레퀴엠으로 가면 너무 무거워진다. 그래서 생각했던 것이 서정적 음악극(lyric muscic drama)이었고 소설 속 앵무새를 재해석한 파랑새였다. 작가가 기독교인이라면 파랑새 대신 비둘기로 바꾸어 해석해도 좋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음악 전체의 결이다. 서사보다는 음영과 공명이 앞서고 등장인물보다는 이미지와 소리가 중심이 되며 대사보다 그윽한 숨소리와 끈질긴 바람 소리와 현의 떨림들이 극을 이끌고 나가는 그런 음악극 말이다. 

다랑쉬 오르는 언덕, 작별하지 않는다
내가 착상했던 음악극의 전체 풍경과 일곱 개의 장면을 짧게 스케치해둔다. 무대 한가운데에 완만한 경사의 오름 세트가 있다. 그 아래 다랑쉬 동굴 입구가 보인다. 멀리서 들려오는 바다의 사운드가 애절하다. 음악은 김대성의 곡들로 짜인 '연작 모노와 앙상블 음악극들이다. 해금과 25현 가야금에 첼로 연주를 포함하여 서사의 깊이를 더해주는 곡들이다. 검은 나무들이 낮 귀신들처럼 서 있는 숲, 우듬지 잘린 통나무들이 군집해 서 있는 풍경, 배경막으로 영상이 흐른다. 눈 덮인 검은 나무들이 한 움큼씩 흐르다가 발목까지 차오르는 바다에 이른다. 쓸려가는 뼈들이 시선을 압도할 듯 줌인된다. 그러다 아스라이 멀어져 간다. 해금 솔로로 진행되는 '다랑쉬'의 서두는 서늘하다 못해 차갑고 모질다. 남도의 진계면에 서도토리를 가미하여 긴장감을 유지한다. 진도 무속음악의 '삼장개비' 장단을 빠르고 느리게 반복하다가 느릿하게 종지한다. 각 장면은 '줄거리'보다는 소리와 이미지와 그 안에 깃든 숨결 혹은 바람결이 중심이다. 개략적인 드라마 트루그 메모다. 장면으로 이어가 본다. 장면1은 해금, 가야금, 생황의 즉흥적인 음영으로 시작한다. 다랑쉬 오름의 한켠에 작은 파랑 빛 조각 같은 게 보인다. 자세히 보니 앵무새다. 경하의 나레이션이 잔잔히 울려퍼진다. "진달래 피고 지는 날인가, 목련이 눈처럼 흩날리는 날인가?" 바람이 스친다. 어쩌면 이 바람이 무대의 첫 주인공일지도 모른다. 이미지와 소리로 구성된 이야기들이 바람을 통해서 서서히 열린다. 장면 2는 '다랑쉬' 원곡으로 시작했다가 새로 쓴 연주로 풀어나간다. 아이의 그림자 혹은 아이의 발걸음 소리, 용눈이 오름 아래 오후의 긴 빛들을 연출할 수 있으려나. 대사는 없고 오로지 그림자와 움직임과 태양의 빛이 위치를 바꾸는 장면으로 구성한다. 끄트머리 부분에 첼로의 변주를 붙이면 좋다. 장면 3은 해금 솔로 '비설(飛雪)' 혹은 이 곡을 편곡하거나 재구성해도 좋다. 앵무새들이 다시 등장하고 어떤 목소리들, 그림자들이 겹친다. 이 장면을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퍼포머가 등장해도 좋다. 한 번쯤 독백 나레이션이 흘러도 좋다. "파랑 빛은 웬지 능청스러운 색 같아, 언제는 블루였다가 언제는 그린이었다가." 장면 4는 대금과 가야금 협주곡 '잃어버린 마을'이다. 사건의 재현은 없다. 그저 사라진 마을의 바람 소리만 시청각으로 구현한다. 가야금이 부재의 울림을 대변하고 대금이 선율의 윗단과 아랫단을 오간다. 경하의 나레이션이 흐른다. "바람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흐르는 것일까?" 장면 5는 관현악곡 '진토굿'이다. 씻김굿의 에코, 땅이 흔들리는 저음과 타악의 미세한 떨림이 공명한다. 일군의 무용수들이 있어도 좋겠다. 안무는 흙을 손으로 쓸어 모으는 동작 중심이다. 긴 호흡을 닮은 바람이 분다. 살아서는 지상의 숨을 쉬다가 죽어서는 땅속의 숨을 쉰다. 장면 6은 앵무새의 귀환이다. 해금, 가야금, 타악으로 구성된 새로운 곡이 흐른다. 경하는 친구 인선이가 회복되었는지 혹은 그곳으로 떠났는지 말하지 않는다. 이야기의 문을 닫지 않는 것은 작별하지 않기 위함이다. 장면 7도 주선율은 해금이다. 선율의 플라지올렛을 따라 빛이 따라 오르다 허공에서 사라진다. 눈길 따라 오르는 곳, 앵무새라고 생각했는데 파랑새다. 아니 비둘기다. 무대 밖으로 날아가는 듯, 무대가 서서히 청색에서 백색으로 바뀐다. 관객들이 하나둘 일어나 나가지만 음악극이 끝났는지 언제 끝나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조명이 꺼진 무대가 밝아질 뿐이다. 시간이 지나서야 각자의 가슴에 무엇인가 담고 나온 것을 알아차린다. 
한강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 영문판 표지.

남도인문학팁

다시 한강과 김대성에게 
지난 글에서 나는 작곡가 김대성과 소설가 한강에게 말해두었다. "진달래 피고 지는 어느 날, 아니면 하얀 목련 피고 지는 어느 날이라도 좋다. 혹은 다랑쉬 오름이나 용눈이, 돝오름의 어디 귀퉁이도 좋고 창꼼바위 너머 자리돔 튀어 오르는 계절이어도 좋다. 해금과 가야금 혹은 첼로의 '다랑쉬' 곡을 함께 연주하며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를 음영해보자." 다시 새겨보니 나는 봄을 생각했던 것 같다. 또 그렇게 말해두었다. "친구 인선이가 병원에서 회복되었는지 죽었는지 친절하게 알려주지 않는 것은 그 어떤 경우에라도 결코 우리가 작별하지 않음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앵무새의 죽음과 혹은 살아있음을 보고 자연스럽게 관음과 파랑새 설화를 떠올릴 수 있었다." 작별하지 않는 존재들은 4·3의 그림자와 숲 혹은 바람이며 앵무새로 현현한 파랑새이거나 비둘기이다. 불교에서 파랑새를 관음조(觀音鳥)라고 한다. 산스크리트어로 '아발로키테슈바라', '세상의 소리를 자유자재로 굽어살피는 자'라는 뜻이다. 고통의 소리를 듣고 구원하는 자비로운 보살이라는 의미다. 만약 두 분이 기독교인이라면 파랑새를 비둘기로 바꾸어도 좋다. 기독교에서 비둘기는 성령조(聖靈鳥)이다. 노아의 방주 등 성령의 임재에 주로 나타난다. 둘 다 하늘과 땅을 오가는 존재, 삶과 죽음을 왕래하는 존재이기에 평화와 자비, 순결의 가치가 다르지 않다. 소설이나 음악은 부활이나 재생을 강요하지 않는다. 다만 작별하지 않을 뿐이다. 한강을 만나면 앵무새를 말한 능청스러움에 관해 물어볼 요량이라고 말해두었는데 파랑새와 비둘기를 말하지 않은 까닭으로 질문을 수정해도 좋겠다.
이윤선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전남도 문화재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