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릿빠릿’했던 기자가 작전세력이 됐다

■ 111억 삼킨 기자들의 '검은 공생'
금융감독원 자본시장특별사법경찰국이 최근 기자 선행매매 사건에 대한 중간 수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전직 기자 1명과 증권사 출신 지인 1명을 구속 송치했습니다. 다른 현직 기자와 지인 13명은 계속 수사 중입니다.
연루된 언론사 10여 곳, 가담한 기자 수십 명, 부당이득 규모 111억 원. 현재까지 드러난 것만 이렇습니다.
검찰 수사 과정에서 더 늘 수 있습니다.
구속된 2명의 수법은 전형적인 ‘선행매매’였습니다. 호재성 정보를 미리 입수해 주식을 산 뒤 기사를 써서 주가를 띄우고 팔아치우는 방식입니다.
범행은 2017년부터 2025년까지 8년 동안 지속됐습니다.
전직 기자 A 씨는 경제신문 '현직'일 때부터 이 일을 시작했습니다. 하다 보니, '돈이 된다'는 것을 알고, 기자를 그만뒀습니다.
코스닥 상장사 위주로 인수·합병해 온 김 모 씨는 "A 기자는 현직이었을 때 굉장히 빠릿빠릿하고 일을 잘한 기자였다"면서 "M&A에 대한 이해력도 빨랐다"고 회상했습니다.
그러면서 "일 잘했던 기자가 결국 이렇게 끝나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습니다.
A 기자는 기자를 그만둔 뒤에도 기사는 쓸 수 있었습니다.
도와주는 '현직' 기자와 언론사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A 기자가 부탁하면, 코스닥 상장사에 대한 각종 호재성 정보로 가득한 기사를 실어줬습니다. 이 기사들은 주식 관련 SNS 등을 타고 다니면서 매수세를 유입시키는 역할을 했습니다.
현직 기자들은 타 언론사를 그만둔 '전직' 기자를 선의로만 도왔을까요? 기사 작성을 대가로 금품이 오가지는 않았을까요. 검찰 수사 과정에서 규명돼야 하는 부분입니다.

KBS는 삼부토건 주가조작 사건에 등장하는 다수의 호재성 기사가 '코스닥 경영진 -> 홍보회사(IR) -> 경제지 기자'의 과정을 통해 작성된 정황을 보도했습니다.
[연관 기사] [단독] 삼부토건도 ‘맞춤형 기사’…10분 만에 온라인 기사로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8379529&ref=A
이번에 구속된 전직 기자가 현직 기자를 통해 작성한 기사 가운데는 삼부토건 호재성 기사도 있었습니다.
삼부토건 주가조작 사건의 핵심 조력자가 바로 전·현직 기자들, 그리고 이들을 방치한 언론사들인 겁니다.

이 문제를 어디부터 어떻게 풀어야 할까요? 지난 4일 국회에서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는 토론회가 열렸습니다.
언론인의 주가조작 등 부정행위 방지와 언론의 신뢰 회복을 위한 규제 방안 토론회. 제목이 곧 주제입니다.
기자 선행매매 사건의 근절 대책을 국회의원 중 가장 적극적으로 고민해 오고 있는 정무위원회 한창민 의원(사회민주당)이 주최했습니다.
■ '이유 불문' 주식 소유 금지
국내 언론사의 윤리 규정은 대부분 "부당한 목적으로 정보를 이용하지 말라"는 식의 선언적 수준입니다.
해외 언론은 다릅니다. ‘목적’을 따지지 않고 ‘소유’ 자체를 원천 금지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미국의 뉴욕타임스(NYT)가 대표적입니다.
뉴욕타임스는 모든 직원이 자신의 업무와 관련된 기업이나 산업의 주식을 소유하지 못하도록 포괄적으로 금지합니다.
예를 들어, IT 담당 기자는 기술 기업의 주식을 단 한 주도 가질 수 없는 구조입니다.
기사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고위 편집자의 경우, 업종을 불문하고 주식 자체를 보유할 수 없습니다.
자본주의의 천국인 미국에서, 사유재산권 침해 논란이 나올 만도 하지만, 큰 이견 없이 이렇게 해오고 있습니다.

■ '공직자처럼' 주식 내역 등록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스(FT)는 더 촘촘합니다. 일종의 ‘투자 등록부’를 운영합니다. 공직자가 재산을 등록하듯이, 파이낸셜타임스 기자는 보유한 주식을 다 등록해야 합니다.
주식이 없어도 예외는 없습니다. '자산 없음(0)'이라고 기록해서라도 반드시 등록해야 합니다.
토론회에 참석한 김동찬 언론개혁 시민연대 정책위원장은 "기사 작성이나 편집에 관여하는 모든 사람이 자신이 보유한 투자 자산을 '투자 등록부'에 신고하도록 하고 있다"면서 "'깜빡했다'거나 '몰랐다'는 변명이 통하지 않는다"고 소개했습니다.
BBC도 비슷한 시스템이 있습니다.
매년 인사팀에서 기자들에게 이메일을 보내 주식 보유 상황을 신고하라고 요구합니다.
만약 기자가 바쁘다는 핑계로 신고를 미루면?
김도원 언론노조 민주언론실천위원장은 " 신고를 완료할 때까지 인사팀이 계속해서 이메일을 보내며 기자들을 압박한다"고 설명했습니다.
단순히 규정을 만들어두는 것에 그치지 않고, 회사가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집행하고 있다는 방증입니다.

■ "내부자 거래, 해고해야"
김동찬 언론개혁 시민연대 정책위원장은 "로이터 통신은 내부자 거래가 무엇인지 누구나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정의 내린 후, 이 행위가 위법이라는 것을 경고한다"면서 "내부 규정을 어기면, 즉시 해고 사유가 된다는 점을 명확히 명시해 기자들이 경각심을 갖도록 한다."고 소개했습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단기 매매 자체를 금지합니다. 투기성 거래를 원천 차단하기 위해, 단기간에 주식을 사고파는 행위 자체를 막아버린 겁니다.
국내 일부 언론사들도 도입하고 있는 규정이지만, 해외는 훨씬 엄격하고 실효성 있게 적용한다는 게 토론자들의 지적입니다.
김득의 금융정의연대 대표는 "바늘 도둑을 소도둑 만들게 방치했다고 본다"면서 "사람의 양심과 선의만 믿고는 안 된다"고 강조했습니다.
김 대표는 "해외는 걸리면 죽는다"면서 "자율 규제안에 사람의 선의만 믿고는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강력한 규제가 동반되어야 한다"고 제언했습니다.
허찬행 언론인권센터 상임이사는 "이번에 검찰에 넘겨진 전직 기자 등은 110억 원의 부당 이득을 취하고 2천 건 넘는 기사를 썼는데, 이게 어떤 윤리적인 선언만으로 해소될 수 있는 문제인가"라고 반문했습니다.
"조직 내에서의 묵인이나 방조, 관행 같은 부분 때문에 드러나지 않았던 것은 아닌지 고민해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 '양심'에 맡긴 우리…'시스템'으로 막는 그들
한국 언론사들은 어떨까요. 해외 언론과 국내 언론의 가장 큰 차이점은 '시스템'의 유무입니다.
해외 언론은 '오해를 할 만한 행동은 아예 하지 말라'는 원칙에 따라, 잠재적인 충돌 가능성까지 회피하도록 '강제'합니다.
우리나라는 기자의 '양심'이나 '윤리의식'에 기대 사후 보고하는 방식에 머물러 있습니다.
[연관 기사] 뉴욕타임스 기자가 주식으로 장난 못 치는 이유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8320244
수십 명의 기자가 연루된 '기자 선행매매 사건'이 올해 처음으로 알려지고, 수사 결과까지 발표됐지만 "어떤 언론사가 윤리 규정을 손본다더라"하는 소식은 잘 들리지 않습니다.
'무죄 추정의 원칙'을 이번 기자 선행매매 사건에 적용하고 있는 걸까요?
윤리 기준 강화 소식이 들리기는커녕 이번 사건에 연루된 걸로 드러난 언론사 대부분이 KBS를 비롯한 타 언론사의 취재 요청에조차 응하지 않고 있습니다.
'수십 명의 전·현직 기자가 연루된 100억 원대 불공정거래 행위 사건'이라는 초유의 '사태' 앞에서 그저 침묵만 지키고 있을 뿐입니다.
증권 담당 기자, 코스닥 담당 기자들이 쓴 장밋빛 전망으로 가득한 호재성 기사가 결국 출고될 수 있었던 건 '데스킹'이라는 언론사의 '시스템'이 작동했기 때문입니다.
'착한 기자'를 믿을 게 아니라, '나쁜 짓을 할 수 없는 시스템'을 고민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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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수진 기자 (reportersong@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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