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양을 넘나드는 낡은 것과 새로운 것 [김영민의 연재할 결심]
〈논어를 다시 읽는다〉 ④
공자는 전통의 계승자로 자처했다. “받아 전하되 창작하지는 않으며, 옛것을 믿고 좋아한다.” 그러나 기존에 공자 사상의 특징으로 거론된 바 있는 점들-귀신보다는 인간 중시, 외관보다는 내면 중시, 혈통보다는 덕성 경향 등등-은 공자의 생전보다 두 세기 전부터 시작하여 공자 사후 반세기 정도 시기까지 지속되었던 현상이다. 요컨대 공자는 과거 전통에 집착했던 사람이 아니라 그의 당대를 살아간 사람이었다.
공자가 당대를 살았다는 말은, 과거에 얽매어 있지 않았다는 뜻인 동시에, 동시대인과 많은 것을 공유했다는 뜻이다. 따라서 공자가 마주했던 역사적 조건을 알아야 그의 생각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공자 시대에는 기존 정치 및 사회 질서가 급격히 해체되고 있었다. 제후국들은 주나라 왕실에 대한 충성을 유보하고 부국강병의 길을 갔으며, 개개인 역시 자신의 처지에 안주하지 않고 계층 이동을 꾀했다. 춘추전국시대와 같은 정치적 혼란기에는 단순히 출신 가문만 믿어서는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문제를 타개하기 위하여 귀족들은 자신들이 혈통만 훌륭한 것이 아니라, 그 혈통에 걸맞은 문화와 자질을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동시에 비귀족층 사람들도 그에 맞서 자신들도 혈통이 아닌 노력에 의해 그에 못지않은 문화와 자질을 가질 수 있다고 맞섰다. 〈논어〉에 나오는 자기 연마와 덕성 논의는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고대 중국 특유의 현상이었다는 말은 아니다. 에라스뮈스 역시 〈소년들의 예절론〉에서 귀족들에게 필요한 예의범절을 강조하는 동시에, “이제는 인문학을 공부하는 그 누구라도 귀족으로 여겨져야 한다”라는 주장을 펼친 바 있다.
이처럼 계층 이동의 길이 열렸다고 해서 그 사회가 계층 사회가 아니었다는 말은 아니다. 고대 중국이나 고대 그리스나 고대 로마나 모두 명시적으로 계층 사회였다. 그에 비해 오늘날 (한국) 사회는 적어도 겉으로는 평등 사회를 내세운다. 평등이 규범인 사회와 불평등이 규범인 사회의 사상이 같을 수는 없다. 논어의 청중은 이른바 특권층 및 특권층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었다.
동시에, 청중이 그러하다고 해서 그 사상이 반드시 특권층만을 위한 것이었다고 하기도 어렵다. 고대사회의 특권층은 그 폐쇄성에도 불구하고, 아니 바로 그 폐쇄성 때문에 상당히 높은 그리고 균질적인 교양 수준을 유지할 수 있었고, 그 덕분에 협애한 계급 이익을 넘어서 보편적인 주제에 대해서도 논의할 수 있었다.
높은 교양 수준을 갖춘 특권층은 육체노동을 엘리트의 핵심 활동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제자 번지가 농사짓는 일을 배우기를 청하자 공자는 다음과 같이 일갈했다. “소인이로구나! ··· 어찌 (다스리는 방법으로) 농사를 쓰리오!” 이와 유사한 이야기는 다른 계층 사회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누군가 “왜 스파르타 사람들은 직접 농사짓지 않고 노예들에게 시킵니까”라고 스파르타의 왕 아낙산드리다스에게 묻자 아낙산드리다스는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는 농사일보다 우리 자신을 돌보는 일을 더 좋아하니까.” 자기 연마를 위해서는 여가가 필요하고, 그 여가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생계 노동을 타인에게 외주 주어야 했다. 고대사회에서 그 타인이란 바로 노예와 여성이었다.
공자가 동시대인과 호흡했다는 말은, 생각의 언어를 공유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아무리 대단한 존재들도 처음부터 끝까지 새로운 것을 제로 베이스에서 창안하지는 않는다. 예수는 어떤가. 예수가 설파한 사랑의 정신은 대단한 것이었지만, 그조차 처음부터 끝까지 다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사랑의 중요성 같은 것은 이미 힐렐 같은 율법학자가 강조한 것이었다. 예수가 물 위를 걸은 일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당시에 물 위를 걷겠다고 한 사람은 예수만이 아니었다. 당시에 예언자를 자처한 테우다스(Theudas)도 마른 발로 요르단강을 건너 보이겠다고 호언했다. 예수가 한센병 환자를 치유한 것은 물론 놀랍지만, 당시 사제들 상당수가 그런 치유 행위에 종사하고 있었다. 즉, 일견 특이해 보이는 행동이나 말도 당대의 맥락 속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공자의 생각은 얼마나 특별한가?
소크라테스는 어떤가. 많은 이들이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의 창안자라고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소크라테스가 그 말을 자주 한 것은 맞다. 소크라테스를 주인공으로 하는 플라톤 대화편들을 실제로 읽어본 사람들은 이 말이 원래는 델포이의 아폴로 신전에 새겨져 있던 말이라는 것을 안다. 그 말의 원래 의미도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철학적 권고라기보다는 신탁 상담을 하기 전에 염두에 두어야 할 권고 사항이었다는 해석이 유력하다.

공자는 어떤가. “문을 나가서는 큰 손님을 뵌 듯이 하며, 피치자를 부릴 때는 큰 제사를 받들듯이 하라”고 했을 때, 독자는 마치 그 말을 공자가 처음 한 것처럼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 말은 〈좌전〉에 이미 나온다. 사람들이 그걸 공자 생각이라고 오인하지만, 그것은 공자가 기존 언명을 재해석한 것이며, 그만큼 해당 담론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다. 그 유명한 교언영색(巧言令色)이니 극기복례(克己復禮)니 하는 것도 다 이미 있던 말이다. 특히 공자는 당시의 고전을 통해 말하기를 즐겼다.
그러니 공자가 〈논어〉에서 개진하고 있는 생각도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공자 사상의 대표 격으로 논의되는 인(仁)을 보자. 공자는 물론 인을 처음 말한 사람이 아니다. 극기복례를 인이라고 한 사람도 공자가 처음이 아니다. 공자 이전부터 인은 매우 중요한 개념이었으며, 공자는 그러한 경향을 계승하고 강화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공자의 인 사상에 특징이 있다면, 원래 통치자나 귀족의 덕성을 지칭하던 인을 보다 많은 사람들이 노력을 통해 실현할 수 있는 덕성으로 간주한 점이다.
예(禮) 혹은 예치에 대한 강조 역시 결코 공자의 전유물이 아니다. 〈좌전〉은 〈논어〉 못지않게 풍부한 예 사상과 사례를 담고 있다.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좌전〉 속에서 일상에서 정치적 결정, 연회 및 사교에 이르는 다양한 행동 129회가 명시적으로 예의 견지에서 평가된다. 그리고 예에 맞추어 열려야 하는 혈맹에 대해서도 637회 언급하고 있으며, 심지어 〈좌전〉에서 수백 번 등장하는 군사작전조차 예에 의해 규정되고 실행되었다. 주나라 자체가 예치를 기초로 성립한 정치체이니, 당시에 예와 관련한 언설이 풍부한 것도 이상하지 않다.
귀신이나 하늘 같은 초월자에 대한 견해는 어떤가. 상나라에서 주나라에 이르기까지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그 대가를 바라는 사고방식이 팽배했다. 물론 이러한 사고방식은 고대 중국 특유의 것이 아니다. 예컨대 인도의 베다 시기에도 인도아리안들이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고, 그 제사 공물을 받은 조상들이 답례로서 악신을 물리치고 후손의 복락을 위해 활동한다는 관념이 있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공자는 이런 관념을 명시적으로 비판했다. 공자에게 예의 주된 의미는 초월적 존재로부터 받는 보답이 아니라, 예를 통해 함양되는 덕성과 조화였다. 그런데 공자 혼자만 이런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다. 춘추시대 후기에 이르면 귀신이나 하늘은 인간의 행동을 지시하고, 인간의 행동에 반응하는 그 나름의 목적과 지각을 가진 존재라는 관념이 의심받기 시작했다.
세금을 적게 하고, 형벌을 차선으로 생각하며, 기복적인 태도를 비판한다는 생각도 공자 혼자 한 것이 아니다. 춘추전국시대 사상가 관중(管仲)이나 안영(晏嬰)이나 범려(范蠡) 역시 그와 유사한 입장을 취했다. 이른바 정명 사상이라고 해서 어디 공자만의 전유물일까. 〈좌전〉이나 〈사기〉 등에는 다른 사람들도 그와 같은 사상을 펼친 기록이 여럿 실려 있다.
공자와 에라스무스가 모두 꾸짖은 ‘쩍벌’
요컨대 공자는 불가사의할 정도로 특이한 성인이었던 것이 아니라, 당시 사회에 부유하던 공통언어 자원을 활용해 자기 생각을 청중에게 개진하던 사람이었다. 그렇게 개진된 그의 생각은 〈논어〉라는 텍스트에 고정된 이후에 오늘날까지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해왔기 때문에, 우리에게 완전히 낯설지도 않다. 동시에 그것은 아주 오랜 시간 전승되어왔으므로 각별히 노력을 기울여야 비로소 섬세하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문명권을 넘어서도 마찬가지다. 〈논어〉의 세계는 타 문명권 사람들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낯선 것은 아니다. 예컨대, 일상의 예를 강조한 것이 어디 동아시아 문명뿐이랴. 공자는 무례하게 다리를 벌리고 앉은 옛 친구 원양을 지팡이로 치면서 이렇게 일갈했다. “어려서는 불손하고 연장자를 공경하지 않더니, 커서는 칭찬해줄 거리도 없고, 늙어서는 죽지도 않으니, 해만 끼치는 놈이로다.” 다리를 쩍 벌리고 앉는 것이 무례하다는 지적은 〈논어〉뿐 아니라 에라스무스의 글, 그리고 18세기에 익명으로 출판된 베스트셀러 〈품격 있는 아카데미 혹은 어린 신사 숙녀를 위한 행동 학교〉에서도 나온다. 실로 예는 많은 문명권에 두루 존재했다. 여러모로 중국 문명과 대조되는 로마 문명의 경우에도 일상의 예를 중시했으며, 그러한 예의 실천을 통해 타인에게 영향을 끼치고자 했다.

로마인들이 예를 통해 동작을 제어했다는 것은 로마 문명에도 자아 수양, 자기 돌봄, 자기 배려, 자아 연마, 혹은 수기치인의 전통이 존재했음을 시사한다. 동서비교론자들은 흔히 자기연마(自己鍊磨)나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전통이 동양에서 주로 발달한 것처럼 선전하곤 한다. 천만에. 흔히 동양의 전유물처럼 이야기되던 수기치인이 유럽 문화에서 얼마나 핵심적이었는지 미셸 푸코가 극명하게 보여준 바 있다. 수기치인의 문제가 서양에서 얼마나 핵심적인 사안이었는지를 알면, 수기치인이라는 칼로 동서양을 일도양단하기보다는 수기치인이라는 공통 기반 속에서 다양한 입장 차이를 논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자기 연마라 해도 모두 같은 것은 아니다. 예컨대 〈논어〉의 자기 연마와 고행자 전통의 자기 연마는 유의미하게 다르다. 〈논어〉의 세계는 자기 포기가 아니라 자기 완성을 목표로 한다. 그 점에서 고행을 통해 자신을 포기하고 신에게 의탁하고자 했던 그리스도교 고행자 전통과도 다르고, 인간에게 주어진 유한한 생을 이미 마친 것으로 간주하며 수행했던 유대인 고행자 전통과도 다르다. 〈논어〉의 자기 연마는 본래적 자신을 발견하는 일과도 거리가 멀다. 후천적 노력에 의해 좀 더 나은 자신을 만들어나가는 데 관심을 가질 뿐, 돌아가야 할 인간 본성이 있다고 믿지 않는다. 그 점에서 타고난 도덕적 본성을 강조했던 후대의 성리학과도 크게 다르다.
했어야만 하는 것과 실제로 한 것들 사이의 간극을 날카롭게 의식한다는 점에서 유럽의 지적 전통과 〈논어〉의 세계는 이처럼 비슷한 점이 많다. 스토아주의에서 말하는 자아 연마의 구체적 실천법에는, 하루 동안 범했던 실수들을 상기하는 게 있다. 예컨대 로마의 귀족 섹스티우스는 취침 전에 ‘오늘 너는 어떤 단점을 극복했는가? 어떤 악덕을 거부했는가? 뭔가 나아진 점이 있는가’라고 자문했다. 이것은 〈논어〉에서 증자가 말하는 하루 반성법과 별로 다르지 않다. “나는 하루에 세 번 나 자신을 살핀다. 남을 위해 도모하는 일에 남김없이 정성을 쏟았나? 붕우와 교제할 때 믿음직스럽게 대하지 않았는가? 익히지 않은 것을 전해주었는가?”

동시에, 차이점 역시 찾을 수 있다. 스토아 학자들은 미래에 닥칠 불행을 명상함으로써, 그것이 진짜 불행이 아님을 깨달아 그 불행의 힘을 무화시켜버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이른바 미래의 불행에 대한 사전 명상이다. 반면, 에피쿠로스주의자는 불행 따위 미리 근심해봐야 소용없고, 과거의 즐거운 기억을 떠올리는 게 낫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논어〉의 세계는 이 두 입장 모두와 다르다. “사람에게 먼 곳까지 걱정하는 마음이 없으면, 반드시 가까운 곳에 근심이 있기 마련이다.” 걱정 대상을 넓고 먼 시야에 배치함으로써, 임박한 걱정이 없도록 만든다.
이처럼 여러 문명에 걸쳐 〈논어〉와 유사점과 차이점이 두루 존재한다면, 공자는 다른 문명권의 사람들이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다른 생각을 한 것도 아니고, 다른 시대에도 똑같이 반복되는 식상한 이야기를 한 것도 아니다. 공자 사상의 특색은 지금까지 거론한 다양한 요소들이 공자라는 특정한 인격 속에서 특정한 방식으로 통합된 뒤, 고대 중국이라는 시공간에서 발화되었다는 사실에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아무리 21세기에 살고 있어도 가능한 한 〈논어〉가 속했던 역사 세계를 상상해보고, 〈논어〉가 아무리 분절된 텍스트처럼 보여도 그 부분들을 보다 큰 전체의 일부로서 독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ditor@is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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