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스토리] '다문화 3.0'…"기술은 평생 자산" 다문화학생에 건네는 명장의 인생조언

[※ 편집자 주 = 대한민국 사회는 저출생·고령화, 4차 산업혁명 등의 빠른 변화로 외국인 비율이 5%를 넘었고, 5년 내 체류 외국인 300만 시대가 예상됩니다. 이제는 이들을 낯선 존재가 아닌 함께 살아가는 이웃으로 받아들이는 사회통합 정책과 인식 개선이 필요합니다. 전문가들도 과학적 분석과 사회적 공감대를 기반으로 국민이 안심할 수 있는 지속 가능한 다문화 정책을 세우고 추진해야 한다고 조언합니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뿌리 깊은 '반(反)다문화 정서'와 '단일민족 주의'는 우리 사회에 '빛과 그림자'라는 양면을 드리우고 있습니다. 지난 2007년 한민족센터를 개설해 동포·다문화 관련 뉴스를 집중 조명하며 인식개선에 앞장서 온 연합뉴스는 '다문화 3.0' 시대를 맞아 연중 기획 기사와 함께 다문화 현장 영상을 연재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 사회가 포용하고 공존하는 문화를 만들기 위해 어떤 점이 필요한지를 짚어보고 성공적으로 코리안 드림을 실현한 사례도 조명할 예정입니다.]

(제천=연합뉴스) 이세영 기자 = "선생님 나이가 몇 살 같아요?"

충북 제천 한국폴리텍 다솜고 강당. 마이크를 든 흰머리 테일러(양복 명장)가 장난스레 묻자, 여기저기서 "예순!", "일흔!" 추측이 쏟아진다.

그가 웃으며 정답을 공개한다.

"선생님, 올해 일흔둘입니다. 그런데 한 달에 1천만 원 정도 벌어요. 왜냐고요? 기술이 있으니까요."

순간 강당 안이 조용해졌다. 다문화·이주 배경 청소년 100여 명의 시선이 단번에 연단 위로 쏠렸다.

1975년 스페인 국제기능올림픽 양복 부문 금메달리스트, 대한민국 양복 명장 백운현(72) 씨. 그의 말투는 담담했지만, "기술 하나 제대로 익히면 평생 흔들리지 않는다"는 문장은 학생들 가슴에 곧장 박히는 듯했다.

제작진은 다솜고에서 다문화 학생들을 대상으로 진행된 백운현 명장의 특강 현장과 그의 직업 철학을 인터뷰 형태로 카메라에 담았다.

◇ 파주 중퇴소년, 양복 한 벌로 세계를 건너다

백 명장의 시작은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파주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들어갔지만, 집안 형편이 그를 교실 밖으로 밀어냈다. 중학교 중퇴 후 집에 머물던 어느 날, 인생의 방향을 바꿀 장면이 찾아왔다.

"우리 집에 방을 얻은 세입자가 양복 기술자였어요. 그때만 해도 파주 용주골에 미군 부대가 많아서 양복점도 엄청 많았습니다. 학교를 그만두고 멍하니 있던 저에게, 그 방에서 들려오는 재봉틀 소리가 이상하게 귀에 들어왔어요."

양복점 문을 두드린 10대 소년은 곧 '도제'가 됐다. 실밥을 뜯고, 다리미를 들고, 밤늦도록 공방 바닥을 쓸며 기술의 세계에 들어갔다.

그는 "기술을 배우기 시작하니 '이 길로 끝까지 가보자'는 마음밖에 없었다"고 회상했다.

18살에는 지방 기능대회와 전국 기능대회를 잇달아 석권했다. 이어 국제기능올림픽 국가대표에도 선발됐다.

"원래 포르투갈 대회에 나가기로 돼 있었어요. 근데 쿠데타가 나면서 대회가 취소됐죠. 공단에서 한 번 더 기회를 줘서 다시 전국대회에 나갔는데, 그때는 정말 '이 기회를 못 잡으면 평생 후회하겠다'는 마음으로 매달렸어요."

다시 전국 1위를 차지한 그는 마지막 나이 제한이었던 21살, 스페인에서 열린 제22회 국제기능올림픽에 출전했다. 금메달을 목에 건 순간, 그는 겨우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그때는 진짜, 금메달 못 따면 돌아오지 않겠다는 각오로 나갔습니다. 어린 나이에 양복 한 벌로 우리나라 기술을 보여줬다는 자부심, 그게 지금까지 저를 버티게 하는 힘이에요."

세계대회 우승은 그의 인생을 '옷 만드는 사람'에서 '기술인'으로 바꿔놓았다. 서울 조선호텔 앞 최고급 양복 거리, '제니스'라는 간판 아래서 그는 스승 모선기 선생 밑에서 재단을 다시 처음부터 배웠다.

"세계대회 금메달 따고 돌아와도, 현장은 또 다르더라고요. 재단대를 붙들고 밤새다시피 하며 4년 정도는 거의 다시 수련했습니다."

스승 밑에서 기술을 쌓은 뒤, 25살이 되던 해 경기도 시흥에 자신의 첫 매장을 열었다. 당시 시흥은 아직 시골에 가까웠지만 양복점만 50여 개가 있을 정도로 호황기였다. 그런 가운데 그에게 예상치 못한 일이 찾아왔다.

"원풍모방에서 '재단사 105년, 원풍모방을 권하는 까닭'이라는 광고를 찍었어요. 컬러 TV가 막 보급되던 때라, 방송 한번 나가자 전국에서 '그 재단사에게 옷을 맞추겠다'는 손님이 몰려왔죠."

주문은 폭발했지만, 그는 '장사꾼이 아닌 장인'을 선택했다.

"장삿속으로 했으면 돈을 더 벌었겠죠. 그런데 전 '좋은 옷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어요. 한 벌에 이틀, 사흘씩 붙들고 패턴과 맞음새를 다듬었습니다. 돈은 많이 못 벌어도, 옷은 진짜 잘 만들고 싶었어요."

강남 압구정동, 양재동 등 구매력 있는 고객이 모이는 공간마다 그의 매장이 있었다. 한 벌에 수백만 원, 때로는 '3천만원짜리 양복'으로 화제를 모은 옷도 있었다.

화려한 시절은 오래가지 않았다. IMF 외환위기와 경기 침체, 기성복과 해외 브랜드의 범람은 맞춤 양복 기술자를 사양 산업의 변두리로 밀어냈다.

"제가 기능대회 나가던 시절, 양복 기술자만 5만 명이었어요. 지금은 전국에 500명도 안 될 겁니다. 동네마다 휴대전화 가게가 있는 자리, 예전엔 전부 양복점이었어요."

백화점 기성복은 해외 생산으로 돌아섰고, 국내 대형 원단 회사들도 하나둘 공장을 접었다. 맞춤 양복은 '아주 특별한 사람들'만 찾는 사치품이 됐다.

"명장 타이틀을 달고도, 강남에서 고급 양복만 고집했으면 아마 버티기 어려웠을 거예요. 옷 한 벌에 200만∼300만 원 받으면 '왜 이렇게 비싸냐'는 반응이 먼저 나옵니다. 그런데 외국 브랜드 코트에 수백만 원 쓰는 건 별로 아까워하지 않아요. 그게 우리 문화의 한 단면이기도 하죠."

그럼에도 그는 '양복 기술 자체는 여전히 평생 자산'이라고 강조했다.

"양복 산업이 사양이라고 해서, 기술 가치까지 사라지는 건 아닙니다. 좋은 옷을 만드는 법, 사람 몸을 읽는 법, 패턴을 설계하는 감각은 어떤 시대에도 쓰일 수 있어요. 다만 그 기술을 어떻게 '새로운 방식'으로 활용할지가 관건입니다."

◇ 기술자에서 '로봇 관리 기술자'로…"100세 시대 생존 전략"

제천 다솜고 강단에서 백 명장이 가장 길게 할애한 주제는 '로봇 시대의 기술'이었다. 자동차, 용접, 제조라인에서 로봇이 인간 노동을 대체하는 현실은 이미 낯설지 않다.

"용접도, 물류도, 자동차 생산도 이제 로봇이 합니다. 여러분이 지금 배우는 기술도 언젠가는 기계가 대신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기술' 그 자체보다, 로봇을 관리하고 조정하는 능력을 더해야 합니다."

그는 기술을 이렇게 정의한다.

"100세 시대에, 젊을 때 기술을 안 배우면 나중에는 기회가 없습니다. 기초 기술과 이론, 자동화 시스템까지 함께 공부해야만 '평생 일자리'를 가질 수 있어요. 자격증은 기본이고, 현장 경험이 더해져야 진짜 기술인입니다."

다솜고 교실에서는 이미 이 말이 현실이 되고 있다. 컴퓨터기계과, 에너지설비과, 스마트전기과 등에서 학생들은 3년 내내 실습 중심으로 현장 기술을 익히고 있다. 졸업생 전원이 국가 기술 자격증을 취득한 해도 여럿이다.

몽골 출신 2학년 우한나(몽골 이름 바트수지 만두카이) 학생은 "여기 와서 처음으로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을 생각하게 됐다"며 이렇게 말했다.

"1학년 때부터 봉사활동을 많이 하면서 국제구호 활동가라는 꿈이 생겼어요. 이제는 기술과 한국어, 사람들과 어울리는 법까지 함께 배우고 있습니다. 자퇴하려고 고민하던 때를 생각하면, 이 학교에 와서 정말 다행이에요."

◇ 국내 유일 다문화 기숙형 기술고…"아이들은 한국과 세계를 잇는 다리"

한국폴리텍 다솜고등학교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다문화·이주 배경 청소년을 위한 기숙형 기술 대안고다. 학비·기숙사비를 포함한 교육비 전액이 국비로 지원되고, 학생들은 한국어 교육, 인성 교육, 자격증 취득, 취업·진학 상담까지 한 곳에서 지원받는다.

윤지현 교장은 "우리 학생들은 각자의 모국과 한국을 잇는 '작은 외교관'"이라며 이렇게 설명했다.

"다솜고 학생을 보면 인사를 정말 잘합니다. 얼굴에 희망이 있어요. 이 아이들은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태어난 환경이 다를 뿐, 미래 대한민국을 위해 씨앗이 될 소중한 인재입니다."

실제 졸업생들은 기업 취업과 대학 진학으로 진로를 넓혀가고 있다. 필리핀 어머니와 한국인 아버지를 둔 박진수 학생은 기계가공·3D프린터 운용·전기기능사 등 6개의 자격증을 따고 미래자동차공학과에 진학했다.

나이지리아 출신 3학년 모세는 "처음 한국에 왔을 때는 한국어도, 문화도 너무 어려웠다"며 "다솜고에서는 한국어 수업도, 기술 수업도 내 눈높이에 맞춰 설명해줘서 '한국에서 살아갈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고 말했다.

◇ "다문화 기술학교가 여기 하나뿐인 게 안타깝다"

백 명장은 강연을 마친 뒤 인터뷰에서 "이런 학교가 전국에 더 생겨야 한다"고 말했다.

"다문화 청소년들이 일반 학교에서 왕따당했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습니다. 그런데 여기 아이들은 표정이 밝아요. 기숙사에서 함께 지내며, 비슷한 상처와 경험을 나누는 친구들과 어울리는 게 얼마나 큰 힘이 되겠어요. 이런 학교가 제천에 하나뿐이라는 게 솔직히 아쉽습니다."

인터뷰 말미, 그는 다시 '기술'에 대해 되짚었다.

"손흥민 선수, 김연아 선수도 하루아침에 된 게 아닙니다. 다섯 살, 여덟 살 때부터 미친 듯이 훈련했죠. 기술도 똑같아요. 저는 공부는 못했지만, 평생 바늘을 손에서 놓지 않았습니다. 그 시간이 모여 지금의 저를 만들었어요."

70대 테일러의 눈빛은 여전히 현역 선수 같았다.

"저는 나라와 사회 덕분에 여기까지 왔습니다. 남은 생은 기술을 나누고, 후배들에게 '길'을 보여주는 데 쓰고 싶어요. 어떤 직업을 택하든, 평생 흔들리지 않는 '자기 기술' 하나만큼은 꼭 가지고 살길 바랍니다. 기술은 평생 자산입니다. 헛된 시간 보내지 말고, 각자 분야에서 '최고 기술인'이 되길 바랍니다."

백운현 명장의 마지막 당부에, 학생들은 우렁찬 목소리로 답했다.

"네, 감사합니다!"

* 자세한 내용은 영상을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기획·제작총괄 : 김희선, 구성 : 민지애, 내레이션 : 유세진, 인터뷰 : 박현수, 영상 : 박주하, 취재협조 : 다솜고등학교, 연출 : 박소라> sev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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