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 폭설도 못이긴 임윤찬-산타 체칠리아 협연…관객에게 직접 편곡한 ‘고엽’으로 앙코르
임윤찬, 라벨 피아노협주곡 협연
직접 편곡한 ‘고엽’ 등 앙코르 들려줘

4일 저녁. 조금씩 흩날리던 눈발이 금새 씨알이 굵어져 도로와 인도를 모두 하얗게 덮었다. 예술의전당을 가려면 거쳐야 하는 남부터미널 앞도 마찬가지였다. 마을버스 서초22에 되는대로 몸을 우겨넣고 눈을 피해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 가려는 사람들의 얼굴에선 결연한 의지와 동시에 지친 기색이 묻어났다. 그럼에도 가야만 하는 이유는, 한국에서의 올해 마지막 임윤찬 연주이기 때문이었다.
어수선한건 관객들 뿐만이 아니었다. 공연이 시작됐으나 이탈리아 산타 체칠리아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입장도 ‘버퍼링’이 걸렸다. 출입문이 열리고 단원 한 두명의 얼굴이 조금 삐져나왔다가 이내 다시 들어가버린 것. 막 시작되던 박수소리가 멋쩍어졌다. 분위기를 전환시킬 강력한 한 방이 필요해보였다.
단원, 악장, 지휘자까지 등장하고 첫곡인 베르디의 ‘시칠리아 섬의 저녁 기도’ 서곡이 시작됐다. 지난달 이탈리아 로마 산타 체칠리아홀에서 시작해 홍콩, 대만, 중국을 거쳐 투어의 마지막 일정으로 한국을 찾은 산타 체칠리아 오케스트라는 다니엘 하딩의 지휘 아래 무르익은 연주를 들려줬다. 이 곡은 중반부 이후부터 격렬한 에너지를 폭발시키며 웅장하게 마무리된다. 잠이 확 깨는 열정적인 연주에 분위기는 반전됐다. 이어지는 두번째 곡, 임윤찬이 협연할 라벨의 피아노 협주곡 G장조를 즐길 준비도 완료됐다.
관현악단은 소수 정예만 남고 그랜드 피아노가 무대 가장 앞쪽으로 불려나왔다. 임윤찬이 입장할 때, 관객은 홈그라운드의 저력을 보여주겠다는 듯이 큰 박수와 환호로 그를 맞이했다. 시선은 땅에 고정하고 빠른 발걸음으로 피아노 앞까지 걸어간 임윤찬은 의자에 앉아 크게 조정없이 곧바로 연주를 시작했다.
1악장은 ‘레디~액션’이 떠오르는 타악기 슬랩스틱(두 개의 나무 조각을 쳐서 ‘딱’ 소리를 냄)의 신호로 시작된다. 이어지는 감각적인 재즈풍 선율은 듣는 즉시 알아챌 정도로 아이코닉하다. 조지 거슈윈의 ‘랩소디 인 블루’가 자동 연상됐다. 클래식 피아노 연주자인 임윤찬이 재즈 피아노 연주자로 변신했다. 피아노와 목관이 서로 주거니받거니 대화하며 경쾌함을 고조시켰다. 실제로 라벨이 미국 현지에서 접한 재즈와 흑인 영가가 이 곡을 구성하는 주요 아이디어로 쓰였다고 한다. 1932년 파리에서 초연됐을 때부터 이 곡은 호불호없이 곧바로 성공작으로 불렸다.
2악장은 완전히 새로운 세계로 진입했다. 지시어 마저 ‘아다지오 아사이’로, ‘충분히 아다지오로’ 연주하도록 한다. 즉, 아름다우면서도 우울하고 서정적인 특색이 강하다는 뜻이다. 오케스트라는 잠시 멈추고 피아노의 카덴차(독주)로 메인 테마가 소개된다. 사실상 피아노 협주곡의 백미인 셈이다. 라벨도 이 피아노 카덴차 선율의 ‘한 마디 한 마디를 고통스러울 만큼 치밀하게 다듬었다’고 회상할 정도로 공을 들였다.
그런데 모두가 잔잔한 피아노 선율에 집중하던 그때, 1층 한 객석에서 휴대폰 유튜브 영상 소리가 들렸다. 돌발적인 소동이었다. 하지만 임윤찬은 지휘자 하딩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연주에 열중했다. 독주에 이어 피아노와 오보에의 대화 부분에 가서는 서정성이 극대화됐다.
3악장부터는 다시 재즈풍의 밝은 선율이 시작되고, 임윤찬은 엄청난 피아노 속주를 선보였다. 여러차례 의자에서 공중부양하듯 튀어올라 다이내믹한 연주를 쏟아냈다. 피날레에선 심벌즈도 가세하며 밝은 장조곡답게 기세 좋은 마무리를 지었다. 오케스트라와 피아니스트의 흔들림없는 연주에 관객은 끝나지 않는 환호와 박수를 보냈다. 커튼콜 두어번만에 임윤찬은 다시 자리에 앉아 직접 편곡한 ‘고엽’을 앙코르곡으로 들려줬다. 앙코르가 끝나고도 환호성이 계속되자 임윤찬은 악장에게 의사를 전하고 두번째 앙코르곡을 시작했다. 코른골트 오페라 ‘조용한 세레나데’의 곡인 ‘가장 아름다운 밤’을 골랐다. 임윤찬은 두번의 앙코르 끝에 이제 진짜 안녕을 얘기하는 듯, 조그만 수신호로 인사하며 퇴장했다.

7년만에 내한한 산타 체칠리아는 2부를 라흐마니노프의 교향곡 2번으로 정했다. 60분간 이어지는 장대한 곡이다. 하딩은 1악장과 2악장 사이에 쉬는 시간 없이 연주를 이어갔다. 잠시 악기의 조율 시간을 가지고 시작한 3악장은, 클래식 팬을 넘어 대중적인 사랑을 받는 곡으로 유명하다. 클라리넷 솔로가 선율을 연다. 한참을 클라리넷의 저음만이 콘서트홀을 가득 채운다. 이어 오보에와 바순 등의 목관과 바이올린과 비올라 등 현악기로 선율이 점차 퍼져간다. 클라리넷의 솔로가 워낙 중요하기에, 하딩이 곡이 끝나고 제일 먼저 일으켜 박수로 보낸 이도 수석 클라리네리스트 알레산드로 카보나레였다. 4악장까지 마무리하고 돌아선 하딩의 얼굴에서 후회는 없어보였다. 모든것을 쏟아낸 듯한 후련함이 감지됐다.
공연 시간은 이미 3시간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하지만 산타 체칠리아는 이탈리아의 교향악단임을 다시한번 강조하듯 베르디의 ‘운명의 힘’ 서곡으로 앙코르를 선사했다. 이 곡은 정명훈 감독도 즐겨 레퍼토리에 포함시켜 국내 관객들에게 익숙하다. 이날 산타 체칠리아와 임윤찬은 도합 세 번의 앙코르로 첫눈 오는 날을 따뜻하게 데웠다.
이민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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