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열의 물방울 그림은 ‘총알 구멍의 상상력’에서 태어났다

폭격과 총격을 피해 도망치면서 작가는 목격했다. 주검에 뚫린 총알구멍이며, 진창이 된 마을 터와 피난길을 짓뭉개고 지나간 탱크와 장갑차의 섬뜩한 주행 흔적들을. 몸서리가 쳐지고 살아남은 자의 회한이 들불처럼 일어나는 그 기억을 작가는 자신의 작업에서 평생 떨칠 수 없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지난 8월부터 열리고 있는 실향민 출신의 작고 작가 김창열(1929~2021)의 회고전(21일까지)은 트라우마처럼 달라붙은 전쟁기의 기억들이 ‘물방울’로 유명한 60년 회화 세계에서 어떻게 발현됐는지를 보여주는 자리다.
평남 맹산에서 태어난 김창열은 해방 뒤 홀로 월남해 미대를 다니다 한국전쟁 발발로 학업을 그만둬야 했다. 전시는 작가가 전쟁 때 겪은 참혹한 전상의 기억을 표상한 작품들로 시작한다. 6전시실 ‘상흔’의 들머리에 붙어 있는 1967년 작 ‘제사’는 유년기 삶을 휩쓸고 지나간 전란의 광풍 같은 기억을 물감을 잔뜩 묻힌 거친 붓질로 마구 쓸고 지나간 흔적처럼 표현했다. 그림 옆에는 짧은 회고 글이 붙어 있는데, 전시를 이해하는 단적인 실마리가 된다. ‘6·25 전쟁 중에 중학교 동창 120명 중 60명이 죽었고, 그 상흔을 총알 맞은 살갗의 구멍이라고 생각하며 물방울을 그렸다. 근원은 거기였다.’

전시는 물방울 연작으로 대중적 명망을 얻은 추상미술 대가 김창열의 창작 여정을 입체적으로 조망한다. 대표작과 미공개 작품 31점을 포함해 1950년대 초기작부터 미국 뉴욕을 거쳐 프랑스 파리에 정착해 별세할 때까지 그린 작품 120여점을 보여준다. 여기에 각종 서신, 사진, 문서, 영상 등의 아카이브를 처음 망라한 연대기 얼개를 씌워 대가의 화력 전체를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도록 꾸려놓았다.
전시는 ‘상흔’ ‘현상’ ‘물방울’ ‘회귀’의 장으로 이뤄져 있다. 동선을 따라가다 보면 그의 등록상표와 같은 작품인 ‘물방울’이 탄생하게 된 역사·정서적 배경과 이후 물방울 회화의 인문적 변천 과정을 구체적으로 알게 된다. 미술사적으로 주목되는 건 총상의 상상력으로 집약되는 1부 ‘상흔’의 앵포르멜 연작들과 2부 1960년대 뉴욕 시기와 파리 시기 초창기 작업들. 깔아뭉갠 흔적이나 총알구멍을 연상케 하는 제사 연작이 전란의 비극적 상황을 추체험하게 한다.

6전시실에서 아래로 계단을 내려가면 7전시실 들머리에 뉴욕 시절 작업을 펼쳐놓은 공간이 나타난다. 전쟁의 상흔을 표상했던 음울한 색조와 형상이 사라지고 밝고 평면적인 화면 위에 둥근 덩어리들과 기의 흐름을 묘사한 듯한 도상들이 도열하듯 양쪽 벽에 내걸려 있다. 오른쪽 옆에 1968년 작업했던 플렉시글라스 설치 조형물이 보이는데, 이어진 유기적 형태의 파리 시절 초기 작업들과 연계되면서 1970년대 초반 등장하는 물방울의 전조가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생생하게 살펴볼 수 있다.
7전시실 중반부와 가장 깊은 쪽에서 ‘물방울’ 회화의 전개 과정이 펼쳐진다. 1971년 작가가 캔버스에 아크릴 물감으로 그린 ‘물방울’은 습작 성격으로 그린 가로세로 50㎝ 정도의 소품이다. 같은 해 노란색 바탕에 실제 실을 붙여 실험적으로 작업한 비슷한 크기의 다른 물방울 소품도 짝처럼 남아 내걸렸다. 작가는 생전에 공식적인 최초의 물방울 작품을 1972년 전시로 선보였던 ‘밤에 일어난 일’이라고 밝힌 바 있지만, 두 작품은 그보다 제작 시기가 앞선 물방울 그림이다. 미술관 쪽이 전시를 준비하면서 작가가 내보이지 않았던 두 소품을 파리 화실에서 유족 협조로 처음 발굴했다는 의미가 크다.


7전시실의 들머리를 지나면 그의 물방울 화폭들을 뒷모습만 보인 채 쌓아놓은 작품 공간이 펼쳐진다. 이 공간을 배경으로 작가가 물방울 그림을 그려나가는 작업 과정을 보여주는 동영상이 상영돼 발길을 멈춰 세우고 있다. 이어지는 가장 깊숙한 안쪽 공간에서 전시의 고갱이로 꼽히는 김창열의 1987년 역작 ‘SH87032’(서울미술관 소장)이 어둠 속에 빛난다. 우둘투둘한 한지 표면 위에 소슬하게 칠한 물방울 모양이 부처상이 손가락을 뻗어 자비의 염력을 보내는 수인처럼 와닿는다. 화폭의 물성과 붓질한 물방울 도상의 정신성이 고고하게 어울린 합일의 경지를 보여주는 수작이다.


전시는 이후 분리된 다른 7전시장 공간에서 1980년대 이후 본격화한 천자문 등의 고문서 이미지와 물방울의 만남, 2층 8전시실에서 ‘별책부록’이라고 미술관이 명명한, 작가의 사진과 서신, 영상, 미공개 자료, 소품 등의 아카이브 공간을 잇따라 내보여준다. 전란의 기억에서 출발해 미국과 프랑스에서 자본주의 소비문화와 전후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으면서 정련된 물방울 회화를 창안하고 이런 작업 흐름이 1990년대 이후 문자 텍스트와 본격적으로 만나 매너리즘으로 흐르는 양상까지 일목요연하게 잡아내 전시에 담았다.
1960년대 중반 뉴욕 시절의 구체적 작업 행적이 여전히 공백으로 남아있고, 지하 본전시 공간과 2층 공간이 단절돼 말미 전시를 못본 채 나가버리는 상황이 일어난다는 미술관 동선의 구조적 한계는 맹점으로 지적된다. 그럼에도 이번 회고전은 물방울 작가로만 여겨졌던 김창열을 연약한 인간의 몸과 정신을 역사적으로 성찰한 휴머니스트 예술가로 각인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고 할 만하다.


8전시장에는 2003년 뉴욕 지인의 딸에게 손수 작은 마포화폭을 붙여 그려 보낸 물방울 연하장이 내걸려 있다. 연하장 속 그림 옆에 김창열은 인생에서 느낀 깨달음을 또박또박 자필로 적어놓았다. ‘두 아기 데리고 쩔쩔 매고 때로는 짜증도 내고 - 그것이 행복이니라’.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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