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택을 찾아서] 빛바랜 기와에 깃든 농촌계몽운동의 역사… 군포 박씨 고택

최민서 2025. 12. 4.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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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씨 고택 전경. 최민서기자
26일 오후 군포시 둔대동 일원, 드넓은 반월호수를 지나 좁은 골목길 사이로 들어서다 보면 몇 그루의 나무를 끼고 있는 옛 가옥 박씨 고택이 자리잡고 있다. 수리산의 울창한 숲 아래 위치한 고택은 정갈하고도 아름다운 기품을 가지고 있었다. 반월호수와 수리산을 앞뒤로 한 전형적인 배산임수로 입구에 들어서면서부터 명당임을 알 수 있었다. 이어 가을의 냄새를 풍기며 울긋불긋 단풍물이 든 나무와 풀들은 고택의 분위기를 한층 더 장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박씨 고택 내부 모습. 최민서 기자
◇98년간의 역사를 담은 박씨 고택
현재 남아있는 고택은 상량묵서명에 의해 1927년에 건립되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1930년대 군포지역 농촌계몽을 이끌던 박용던이 살던 살림집으로 향토유적으로 분류되어 있다. 일제강점기에 수급되던 고급목재의 사용, 1920년대 후반 서울 가옥에서 주로 사용하던 규격화된 유리, 새로운 형식의 철물 등을 수용하여 당시 경기지방의 혼용된 양식을 찾아볼 수 있다. 농촌계몽 운동을 주도한 인물이 건립한 가옥으로 역사적인 뜻이 깊고, 지난 2019년 11월 27일 군포시 향토유적 1호로 지정되며 시대적·건축적 양상을 잘 나타내고 있다.
 
박씨 고택 전경. 최민서 기자

◇가옥의 배치와 건축적 특징
고택은 경기지역의 지역적 특징을 잘 보여준다. 먼저 배치형태는 ㄱ자형의 안채와 ㄴ자형의 사랑채가 튼ㅁ자형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전형적인 모습을 보인다. 또 담장이나 대문채를 건립하지 않고 사랑채 전면을 개방해 사랑마당을 드러내고 있는 점 또한 지역적 특징이라 볼 수 있다. 반대로 뒤란은 담당을 둘러 폐쇄적인 공간구성을 보이고 있고, 부엌 바깥쪽에 부엌마당을 형성한 점도 경기지역 주거건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특징이다.

안채 평면 또한 지역적인 모습을 보이는데 안방, 대청, 건넌방을 일렬로 배치한 후 안방 아래로 부엌을 두어 전체적으로 ㄱ자형의 평면을 취하고 있다. 또 부엌에 나뭇간이 따로 마련되어 있는 것도 경기지역 주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그러나 경기지역의 구조적인 특징인 평4량의 가구형식은 보이지 않고 있다. 일반적으로 평4량의 가구형식은 초가와 같은 민가에서 주로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일부 반가에서도 평4량의 가구형식으로 취하고 있는 사례가 있다. 다만 안방의 가구구조에는 반5량의 가구형식을 사용하고 있는데, 세부적으로 평4량의 구조에서 보이는 기법과 유사한 특징을 보이고 있다.
 
둔대동 박씨 고택에 대한 변형된 공간 및 철거된 벽작광 내외벽 추정 위치도. 사진:군포시청

◇상류계층의 주거 특징을 엿보다
한편 고택은 상류계층의 주거 특징을 동시에 잘 보여주고 있다. 규모의 측면에서 전체적으로 칸수가 많기도 하지만, 안채와 사랑채의 보방향 칸수가 1칸 반, 즉 퇴칸을 두었다는 점이다. 서민 주거인 경우에는 보방향을 1칸의 3량가로 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고택은 안채와 사랑채의 사랑방 영역뿐만 아니라 익사의 부속 공간까지 보방향의 칸수를 1칸 반으로 하고 있다. 특히 건넌방의 경우, 전면뿐만 아니라 측면까지 퇴칸을 두어 2칸 이상의 규모를 이루는데 흔하게 볼 수 있는 모습은 아니다.

고택에서 상류계층의 면모가 더욱 잘 드러난 부분은 사랑채의 돌출된 누마루다. 누마루는 낙선재나 운현궁으로 대표되는 서울 상류계층의 주거 요소로 알려져 있는데, 고택에서도 상류계층의 주거를 모방하여 사랑채 전면에 누마루를 마련했다. 또한 부재의 크기나 재질이 우수할뿐만 아니라 대청 가구구조에 뜬창방을 사용해 한층 수준 높은 장식성이 강한 구조형식을 취하는 점도 고택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요소이다.

일제강점기인 1927년에 건립된 고택은 전통적인 주거 특징 외에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 반영된 요소들도 함께 공존한다. 대표적인 것이 유리창 설치인데, 현재 고택에는 사랑채의 누마루와 안채 전면에 유리창이 설치되어 있다. 이런 특징은 일제강점기에 건립된 한옥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다만 1927년 창건 때 설치되었는지, 후대에 추가로 설치된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박씨 고택 특징과 역사. 최민서 기자

◇박영식 가계의 둔대동 정착
밀양 박씨는 경남 밀양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로 신라를 건국한 박혁거세를 기원으로 하는데,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많은 인구를 차지하는 성씨다. 밀양 박씨의 수많은 분파 중에서 밀성군파는 박척(朴陟)을 시조로 하는 분파이다. 고택의 소유주는 밀양박씨 밀성군파 중에서 부림(富林), 즉 과천을 중심으로 살았기에 부림 문중으로 불려왔다.

처음 둔대동으로 이주해 정착한 인물은 현 고택 소유주의 고조부인 박영식(朴英植)이다. 박영식은 과천 남태령 출신으로 반월면 일대는 물론 서울 부근의 말죽거리에서도 많은 토지를 소유한 것으로 전해진다. 1918년에 작성된 『토지조사부』와『임야조사부』에 따르면, 박영식이 둔대리에 소유한 토지만 해도 논 1만6천753평, 밭 1만8천 695평, 대지 2천358평, 임야 5만4천900평으로 모두 9만2천706평의 땅을 소유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박영식이 둔대리로 이주한 배경이나 시기는 알 수 없으나 1910년대에 이미 경제적 기반이 조성되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둔대교회 전경.최민서 기자

◇정착에 이은 계몽운동
과천 남태령에서 둔대리로 이주한 박영식은 반월면 최고의 지주로 성장했고, 경제적 기반을 토대로 후손들에게 근대식 교육을 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기독교인이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서울의 정동감리교회와 친분이 있어 교회 관련자들이 고택에 방문해 머물기도 했다고 한다.

같은 감리교계통의 학교였던 배재학당 출신 박용덕(朴容德, 1989-1969)의 개인교사로 모셔왔는데, 박용덕의 나이가 불과 4~5세 밖에 안 되어 황삼봉을 '젖선생'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황삼봉이 박용덕을 가르치기 위해 둔대동으로 내려온 것은 1901년~1902년 사이로 추정되며, 이때 황삼봉은 박영식의 집에 머물벼 개인교사의 일 뿐만 아니라 둔대리에 학교를 세워 마을 주민들에게 교육 사업을 펼쳤던 것으로 보이나, 황삼봉의 구체적 활동상황이나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다.

둔대교회는 박용덕의 부인인 김금준(金金俊, 1896-1995)의 증언에 따라 1903년 이른 봄에 현재 교회에 있는 둔대로 354번지에 세웠다고 하고, 당시에 건립된 교회는 박영식이 산에서 소나무를 베어 지은 토담형식의 건물이라 한다. 둔대교회(둔대리교회)는 「기독교조선감리회요람(1931~1932)」에 반월면 둔대리 354번지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1936년 4월16일자의 「조선총독부관보」에 따르면, 둔대리 352번지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최민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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