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브필의 기적…함부르크의 부활

2025. 12. 4.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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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Story
獨 랜드마크 '엘브필하모니'의 매력
함부르크 엘브필하모니 Thies Raetzke

달빛 속에 꽃들도 이미 잠들었단다/ 줄기 위로 꽃이 머리를 숙이는구나/ 나무에 핀 꽃이 떨고 있어/ 마치 꿈을 꾸듯 뒤척이면서 말이야/ 자러 가렴, 자러 가렴, 내 소중한 아이야! - 브람스 ‘잠의 요정’(모래 요정) 가사 중

독일 함부르크 스펙슈트라세 60번지. 1943년 연합군의 폭격으로 파괴된 이곳은 ‘골목길 구역’(gängeviertel)이라고 불리는 도시 빈민 노동자들의 공동주택이 있던 자리다. 요하네스 브람스는 이 비좁은 목조 건물의 단칸방에서 태어났다. 아기 브람스가 떠올라서였을까. 브람스가 슈만 부부의 아이들을 위해 작곡한 ‘잠의 요정’이 들리는 듯했다.

브람스는 독일 제2의 도시, 함부르크를 대표하는 음악가다. 30대 후반이던 1869년까지 고향에 집을 갖고 있었다. 중세 무역상들의 한자동맹 중심 항구로 문전성시를 이루던 함부르크지만 브람스에겐 애증에 가까운 도시이기도 했다.

생전 아버지가 단원이었던 함부르크 필하모니 지휘자가 되는 것이 꿈이던 브람스였지만 두 차례나 실패했다. 그가 죽기 1년 전인 1894년 함부르크 필로부터 지휘자 제의가 왔을 때 61세의 브람스는 경멸에 가득 찬 회신을 보내 거절했다. 유럽 음악계 최고 스타이던 자신을 고향의 악단이 진작 알아주지 못한 것에 대한 서운함이었다.

그로부터 1세기가 지난 2017년 1월 11일. 함부르크 필하모니의 후예인 NDR 엘브필하모니 오케스트라는 엘브필하모니 콘서트홀에서 역사적인 첫 공연을 연다. 이때 연주된 곡 중에는 브람스 교향곡 2번 4악장이 포함돼 있었다. 그해 7월 7일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 참석한 각국 정상들은 이 콘서트홀에 앉아 베토벤 ‘합창’ 교향곡을 들었다. 당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베를린 필하모니홀이 아니라 함부르크 엘브필하모니를 택했다. 독일 대표 작곡가인 브람스의 상징성, 그리고 제2 도시 함부르크의 존재감을 드러내고자 한 것으로 해석된다. 

엘브필하모니 콘서트홀은 함부르크시가 1조2000억원을 투입해 장장 10년에 걸쳐 완공했다. 위치는 함부르크 하펜시티의 그라스브룩 반도. 도시의 명물 ‘카이슈파이허’로, 부두의 창고 등으로 쓰였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다. 세계적인 스위스 건축회사 헤르초그&드 뫼롱이 참여해 완성한 뒤 1년 만에 영국 타임지 선정 ‘세계 100대 명소’에 이름을 올렸다. 엘브필하모니 콘서트홀은 매년 300만 명을 불러 모으며 올해 2600만 번째 방문객을 맞이했다. 지상 37m 높이의 ‘엘브필 앞 광장’엔 매일 전 세계 사람들이 줄을 선다. 세계 어느 공연장 로비가 매년 이렇게 많은 사람을 불러 모을 수 있을까. 그 비밀을 현장에서 전한다.

 360도 무대·4765개 파이프 오르간, 최고의 건축이 만든 음악의 도시
 '세계 100대 명소' 엘브필하모니

함부르크 엘브필하모니 콘서트홀. Claudia Hoehne

유럽을 대표하는 음악 도시는 빈, 잘츠부르크, 프라하, 베를린,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오랜 시간 첫손에 꼽혔다. 이제 함부르크는 이들 도시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됐다. 불과 8년 만의 변화다. 함부르크에 매년 300만 명 이상이 찾아오게 한 ‘엘브필 효과’는 최고의 건축이 혁신적인 행정과 기업가의 도전, 그리고 시민들의 지지가 어우러졌을 때 어떻게 도시를 재건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누구나 오세요…37m 전망대 ‘엘브필 광장’

엘브필하모니를 건너편 부두에서 바라보면 늘씬한 배 모양이다. 파노라마 전망대까지는 카이슈파이허의 붉은 벽돌이 여전히 지탱하고 있고, 그 위 108m에 이르는 서쪽 꼭대기까지는 1100개의 은빛 유리판이 빛난다. 지붕은 특수 마감된 원판으로 덮였고, 사면에서 파도 모양의 독특한 곡선미를 자랑한다. 외형만으로도 기가 막힌다. 서쪽엔 콘서트홀, 동쪽엔 웨스틴호텔이 자리해 투숙객은 방에서 나와 불과 5분도 안 돼 콘서트홀로 이동할 수 있다. 레스토랑과 카페 등 편의 시설도 완비했다.

올해 말까지 엘브필하모니를 다녀간 사람은 2600만 명을 가뿐히 넘길 전망이다. 물론 연일 만석이 되는 공연을 본 청중은 한정적이다. 하지만 1조2000억원의 건축비는 전 세계에서 엘브필하모니를 보러 오는 관광객을 감안하면 그 이상의 경제 효과를 내고 있다. 도시 이미지와 부가가치 상승을 고려하면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수익을 올리고 있다. 예술은 늘 정치와 경제를 이긴다.

엘브필하모니 홈페이지에는 ‘모두를 위한 무한한 음악 경험’이라는 부제를 달고 “음악을 누구나 쉽게 접하고, 가까이 다가가고, 경험하게 하는 것은 우리 DNA에 새겨진 사명과도 같다. 이런 음악적 색채와 대비는 그 어떤 ‘편협한’ 예술 형식도 배척한다”고 쓰여 있다. 세계 정상급 오케스트라의 콘서트와 오페라, 피아노, 현악 4중주, 가곡은 물론 월드뮤직, 전자음악, 팝까지 끌어안는다.

엘브필하모니 콘서트홀(Grosser Saal) 입구와 인접한 ‘엘브필하모니광장’은 세계적인 관광 명소가 된 지 오래다. 파노라마 전망대인 엘브필하모니광장은 사람들이 공연을 보지 못하더라도 잠시 머물거나, 콘서트홀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궁금하게 만든다. 활기차고 따뜻한 공간이 됐다. 함부르크 최고의 항구 뷰를 자랑하는 이곳에서 저녁노을을 보고 있으면 꿈결 같다. 누구나 12층에서 16층까지 콘서트홀 로비의 은은한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는데, 이 열린 공간은 1층에서 유럽에서 가장 긴 82m의 곡선 에스컬레이터를 타는 순간부터 이미 흥분이 고조된다.

친환경 음향판 1만 개…4765개 파이프 장착한 오르간

석고·폐지·섬유를 조합한 친환경 음향판 '화이트 스킨'

콘서트홀 내부로 가보자. 엘브필하모니에는 3개의 공연장이 있다. 2100석의 객석을 가진 콘서트홀은 포도밭 스타일로 무대는 360도 청중에 둘러싸인다. 가장 멀리 있는 좌석이 30m를 넘지 않아 어느 자리에 앉든 무대가 바로 눈앞에 펼쳐진다. 나무를 쓰지 않은 독자적 형태의 음향판 약 1만 개를 하나하나 붙여 콘서트홀 내부 전체를 뒤덮었다. 일본의 세계적 전문가 도요타 야스히사가 석고와 폐지, 섬유를 조합해 친환경적으로 개발한 이 ‘화이트 스킨’은 획기적이었다. 깜짝 놀랄 만큼 두꺼운 객석 의자는 청중이 있으나 없으나 동일한 잔향 시간을 확보하도록 했다.

클라이스 오르겔바우가 제작한 파이프 오르간은 69개의 레지스터와 4765개의 파이프를 장착했다. 무대 뒤, 옆으로 나눠 세팅한 파이프와 무대 지붕에 매달린 반사경에도 4개의 레지스터가 추가로 원격 조정이 가능해 오르간의 울림이 사방에서 들려온다.

가변형 객석을 갖춘 리사이틀홀은 역시 도요타가 디자인한 목재 패널이 아늑한 어쿠스틱을 구현한다. 독주, 실내악 및 재즈 콘서트 위주의 다목적 공간으로 550명이 앉을 수 있다. 카이 스튜디오는 음악 교육을 전담한다. 170석 규모의 ‘카이 스튜디오1’은 공연장으로도 쓰인다.

웨스틴호텔에서 나오면 전망대 층에서 엘브필하모니 콘서트홀로 바로 입장할 수 있는데, 곡선형 계단을 걸어 올라가면 통창으로 항구가 보인다. 음악보다 분위기에 먼저 취하는 마법이 이곳에선 현실이다.

 엘브필 총감독 "연주자들도 매번 감탄…건축예술에 걸맞은 무대로
 보답하겠다"…'유럽 공연계 거물' 크리스토프 리벤 조이터

독일 함부르크의 명소가 된 엘브필하모니를 이끄는 인물 크리스토프 리벤 조이터(61·사진) 총감독을 지난 10월 사무동에서 만났다.

조이터는 유럽 공연계의 거물로 꼽힌다. 오스트리아 출신인 그는 1991년 빈 콘체르트하우스 총디렉터를 맡았고, 1996년부터는 빈 현대음악제를 이끌었다. 2007년부터 엘브필하모니로 옮겨와 모든 건설 과정을 관리하며 2029년까지 임기가 연장될 만큼 인정받았다. 엘브필하모니와 라이스할레, 두 공연장의 연간 1200회 공연을 기획하고 함부르크 국제음악제를 개최해 유럽 어느 도시의 음악 축제에도 뒤지지 않는 성과를 냈다. 올해 축제는 객석 점유율 98%를 기록했다. 엘브필하모니는 현재 함부르크의 역사적 공연장 라이스할레도 함께 운영한다.

그의 임기는 2029년까지 연장됐다. 한국의 공공 예술단체 임원 임기가 2~3년인 것과 대조적이다. “대중이나 음악가들과 매일 소통하고 고민하는 자리인 만큼 최소 5년에서 10년은 지나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본다. 모든 게 빠르게 변하는 시대에 종신 계약에 대해선 부정적이지만 장기적 관점을 가질 수 있는 최소 시간은 필요하다.”

엘브필하모니는 원래 시가 아니라 개인이 시작했다. 새 항만구역이 생기며 컨테이너선들이 더 이상 옛날 창고가 필요하지 않게 된 2000년 초반. 건축가이자 부동산 개발업자인 알렉산더 제라르와 부인 야나 마르코가 스위스의 세계적 건축회사를 찾아가 ‘어떻게 창고를 극장으로 개조할 수 있는지’ 의뢰했다. 이미 함부르크에 아름다운 라이스할레라는 아름다운 극장이 있었지만 좀 더 큰 규모의 홀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게 발단이었다. 극장 자체만으로는 적자를 피할 수 없어 호텔과 식당, 주거 공간을 시와 함께 조성하기로 했다.

“최고의 건축물이다. 안과 밖 모두 건축학적 미가 강조된다. 연주자들은 홀에 입장하기 전 분장실에서 이미 감탄한다. 함부르크의 명당에 자리하고 있는데, 우리는 건축물이 주는 기대감을 충족시키는 연주와 프로그램으로 보답하려고 한다.”

엘브필하모니는 유료 티켓 수입 50%, 후원과 기부 25%, 정부 지원 25%로 운영된다. 개관 후 전보다 청중이 세 배 늘었다. 그는 “혼자만의 시간이 많아진 현대인에게 함께 모여 흥미진진한 경험을 하는 일은 더 소중해졌고, 다음 세대에 음악이라는 유산을 남겨주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라고 했다.

피아니스트 조성진은 이곳에서 정기적으로 연주회를 연다. 임윤찬은 내년 12월 이곳에서 첫 연주회를 선보인다.

함부르크=유혁준 음악칼럼니스트·클라라하우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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