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짐으로 기억된다…힐튼서울의 마지막 회고록
40년 모더니즘 건축과의 작별인사
이젠 쓰지 않는 객실 열쇠부터
손글씨로 쓴 응대 메뉴얼까지…
40여년 기록과 집기·소품 전시
크리스마스 자선열차도 복원
"샹들리에와 해체 구조물의 공존
소멸의 순간이 지닌 숭고한 장면"

“너는 사라진다. 그러므로 아름답다.” 폴란드의 한 시인이 쓴 구절이 떠올랐다. 서울 남산 자락 피크닉에서 열리고 있는 ‘힐튼서울 자서전’ 전시를 보면서다.
한 건축물의 40여 년 세월을 돌아본 이 전시엔 한국 현대건축의 역사와 개인의 기억들이 씨줄과 날줄처럼 엮여 있다.
건축의 수명은 얼마나 될까. 그것은 누가, 어떻게 정할까. 40여 년간 서울의 대표 모더니즘 건축물로 인정받은 힐튼서울은 1983년 태어났다. 남산과 서울역을 잇는 양동지구 중심에 자리 잡았다. 대한민국 1세대 건축가 김종성의 설계에 대우그룹과 힐튼인터내셔널의 협력이 더해진 프로젝트였다.
그땐 ‘SEOUL’이라는 도시가 세계에 막 알려질 채비를 할 때였고, 힐튼서울은 역사적 순간을 살아냈다. 1985년 국제통화기금(IMF)·세계은행 연차총회, 1986년 아시안게임, 1988년 서울올림픽 등의 주요 회의와 연회를 도맡았다. 남산을 감싸 안는 외관, 18m 높이의 중앙 아트리움은 물론 일폰테, 오랑제리, 시즌즈 등 레스토랑은 새로운 소비문화를 이끌었다. 힐튼서울의 마지막 영업일은 2022년 12월 31일.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한 영업 부진이 이유였다. 2년의 준비 기간을 거쳐 2025년 5월부터 기나긴 철거 작업에 들어갔다.
소멸하는 순간을 붙잡다

‘힐튼서울 자서전’은 이 소멸의 순간을 기록하고 기억한다. 단순히 공간을 이식하거나 건축의 과거 기록을 아카이브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영상, 설치, 사진 등 다양한 분야 작가가 힐튼서울의 해체 과정에서 나온 자재와 장면들을 재구성했다.
건물이 사라지는 과정에 천착한 작업은 정지현, 서지우, 테크캡슐의 작업이다. 정지현은 건물의 입면이 붕괴되는 과정을 사진으로 담았다. 서지우의 작업 ‘때 빼고 깜박이.1’ ‘때 빼고 깜박이.2’ ‘숨쉬는 파사드’는 힐튼서울의 주요 자재인 트래버틴(녹색 대리석), 브론즈, 오크 등을 철거 현장에서 수거해 조형 작품으로 탄생시켰다. 테크캡슐은 철거 현장을 밀착해 기록한 작업 ‘상실의 기준’과 힐튼서울 전체를 3차원(3D) 스캐닝해 디지털 차원으로 건물을 이행시킨 작업 ‘잠재 생동’을 선보였다.
사라지는 과정에 집중한 1층의 전시장은 2층에서 기억과 기록으로 이어진다. 건축 사진작가인 임정의와 최용준의 작업이 대표적이다. 1980년대 힐튼서울의 준공 과정과 완공 직후를 촬영한 임정의의 작품과 2022년 힐튼서울 영업 종료를 앞두고 건축 디테일과 세부 장면을 기록한 최용준의 작품이 나란히 배치됐다.
힐튼서울이 있기까지 김종성의 회고와 시공 과정에서 오간 편지, 설계 도면, 스케치, 서류 등이 그대로 아카이빙돼 있다. “종이로 풀칠하는 거, 그거 가지고는 안 되겠더라고. 수소문해서 한 1.4㎜짜리 두께의 오크 베니어를 미국에서 들여와 패널링을 만들었지….” 건축가가 품은 고뇌의 문장들은 전시의 생동감을 더한다.
이 자료들은 새로운 작품으로 재탄생했다. 노송희의 ‘되짓기’는 도면과 공문서, 사진 등의 종이 기록물을 통해 건축의 빈자리를 상상하며 응시하고, 백윤석의 ‘시대의 얼굴’은 건물 자체가 아니라 건물의 시대적 맥락과 변화를 추적한다. 그래픽과 회화 작업은 힐튼서울을 한 번이라도 가본 사람들의 향수를 자극한다. 그래픽캐뷰러리(곽민구 이슬아)는 철거 전 힐튼서울 1430호 객실에 3개월간 머무르며 객실과 로비, 사우나 등 호텔의 일상적 풍경을 화폭에 담아냈다.
다시, 호텔이라는 본질
흔히 건축 전시가 도면과 모형 위주의, 건축 관계자를 위한 전시로 진행된다면 이번 전시는 결이 다르다. 힐튼서울이 문을 열 당시부터 저장한 기록과 집기, 소품들을 함께 전시하기 때문이다. 호텔 방의 열쇠, 수전, 화장실, 간판부터 레스토랑 식기에 이르기까지 정겨움 그 자체다.
호텔리어가 준수해야 할 고객 응대 매뉴얼은 손글씨로 한글과 영문을 병기해, 마치 영어 교재를 읽는 듯 재미가 있다.
예를 들어 손님이 ‘음, 아주 상쾌할 것 같군(Mmmm, Sounds refreshing!)’ ‘괜찮겠어(Sounds Good)’라고 말하면 ‘아주 인기가 좋습니다(It’s very popular)’ ‘많은 고객이 좋아하십니다(Many guests like it)’”라고 응대할 것 등이 쓰여 있다.
전시의 말미에는 힐튼서울의 상징이던 크리스마스 자선열차도 복원돼 공개된다. 1995년부터 매년 말 그랜드 아트리움에 설치해 많은 이에게 즐거움을 안겨준 이 열차를 다시 만날 수 있다. 피크닉과 건축 큐레이팅 콜렉티브CAC, 한국건축아카이브KAA가 공동 기획한 이 전시는 사라진 건물을 소환해 기억 속에 다시 짓는 행위로 해석된다.
김희정 CAC 큐레이터는 “해체 현장에서 마주한 건축물의 마지막이 어떻게 새로운 미적 차원으로 전환되는지 보여주고 싶었다”며 “화려한 샹들리에와 노출된 구조물이 공존하는 장면은 소멸의 순간이 지닌 숭고한 긴장감을 드러낸다”고 설명했다. 전시는 내년 1월 4일까지.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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