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35. 용인 경기도박물관

경기도박물관(관장 이동국)의 주말 풍경이 여유롭다. 광복 80주년을 기념해 위창 오세창의 삶과 예술 그리고 독립운동을 조명하는 특별전 ‘오세창: 무궁화의 땅에서’를 관람하려는 사람들이 줄을 잇는다. 위창 오세창(1864~1953)은 누구인가. “위창은 개화 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 서화가이자 수장가, 언론인이자 예술인으로서 대한민국 근현대 문화의 주춧돌을 놓은 분입니다. 전통이 뿌리째 흔들리던 시대, 꺾이지 않는 손으로 그 맥을 붙들어 ‘문화보국’의 가치를 지켜냈지요.”

■ 위창, 문화보국의 기초를 건설한 사람
전시를 기획한 박물관 관계자의 설명이 솔깃하다. “1919년 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운동의 중심에 섰던 그는 우리 문화의 자주성을 지키기 위해 애쓴 선구자이기도 합니다. 그가 모아 전한 수많은 글과 그림은 오늘날 ‘K컬처’의 근간이 됐습니다.”
제1부 ‘개화와 독립–역매亦梅·위창葦滄의 시대’를 살펴보며 그의 아버지가 개화사상가 오경석(1831~1879)이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자료는 격변기를 뚜벅뚜벅 걸어간 부자의 모습을 그려준다. 제2부 ‘형태로 새긴 의미–금문金文 탐구와 전각 예술’과 제3부 ‘수장의 길–문화 독립을 향하여’에서 이름만 들었던 고서화와 금석 자료를 만나는 기쁨이 크다. 제4부 ‘붓끝으로 시대를 견디다–오세창의 글씨와 동시대 예술’에서 전서와 예서를 넘나든 위창의 서예작품을 감상하며 그의 우뚝한 생애를 더듬어본다.
내년 봄까지 열린다고 하지만 역시 일찍 관람하는 것이 좋다. 위창이 수집해 엮은 ‘근묵’과 ‘근역서휘’, ‘근역화휘’는 그가 얼마나 우리 문화를 사랑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물이다. 강감찬을 비롯해 신사임당, 한석봉, 정약용, 김정희 등 빼어난 인물들의 글과 글씨 90여점을 만나는 행복한 시간을 가져보자.

■ 경기, 사람들이 모여든 곳
토기가 가득하다. 흙빛이 이처럼 아름다운지 미처 몰랐다. 수십만년 전 경기지역에 살았던 사람들이 남긴 흔적이 풍성하다. 한탄강과 임진강, 한강과 그 지류인 연천 전곡리, 남양주 호평동 유적에서 확인된 옛사람들의 숨결이 느껴진다. 선사의 시작을 알리는 ‘경기 땅에 사람이 등장하다’부터 ‘마한을 넘어 백제를 세우다’와 ‘통일국가, 신라’로 이어진다. 고대사를 바꿔 쓰게 했던 주먹도끼를 떠올리며 아득한 선사시대로 떠나는 발걸음이 가볍다. 연천삼거리에서 발견된 겹아가리항아리는 청동기시대를 알려주는 대표적 유물이다. 화성 소근산성과 고양 멱절산성에서 한성백제의 유물인 세 발 달린 토기가 발굴됐다. 포천 자작리에서 발굴된 큰 독, 파주 육계토성에서 발굴된 삽날과 살포는 농업과 관련된 귀중한 유물이다. 유물을 살펴보다가 경기도가 오랫동안 백제의 영토였다는 사실을 문득 깨닫는다.

경기도박물관은 현재의 경기도 사람들에게 경기인의 이야기를 어떻게 들려줄까. ‘여기가 경기!’에는 경기도박물관에 오면 천년 경기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정수를 볼 수 있다는 다짐을 담아 유물을 배치했다. 고려시대를 ‘천하의 중심 고려’, ‘고려의 중심 경기 코리아의 시작’, ‘새로움이 시작된 곳’, ‘고려인의 삶’, ‘또 다른 출발’로 구성해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한편 조선시대는 ‘경기, 나라의 근본’, ‘천혜의 요새’, ‘개혁의 중심’, ‘경기에 모이다’로 내용을 꾸며 근대 이전의 경기를 생동감 있게 보여준다. ‘경기 사대부’들의 예술을 보여주는 ‘조선의 문화를 이끌다’, ‘예술로 꽃피우다’, ‘경기인을 만나다’라는 이야기도 배치해 재미를 더했다.
고려의 역사를 기록한 ‘고려사절요’를 마주하며 세종의 역사 의식을 엿본다. 새와 꽃무늬가 새겨진 청자로 만든 의자에 무슨 사연이 담겨 있을까. 창공을 나는 학을 새긴 청자에서 고려의 풍요와 멋을 발견한다. 고려인들의 불심이 깃든 ‘초조대장경 화엄경 제1권’은 국보로 대접받는 귀중한 유물이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단심가를 부르며 죽음의 길을 선택한 포은 ‘정몽주 초상’ 앞에서 잠시 숨을 고른다. 기개 있는 지식인을 보기 드문 시대여서 더욱 돋보이는 인물이다. ‘송언신에게 보내는 선조의 비밀 편지’를 보며 임금과 신하 사이에 지켜야 할 도리가 무엇인지 생각해 본다. 표암 강세황의 글씨와 1790년 그려진 김홍도의 작품 ‘강가의 한가로운 풍경’도 눈길을 끄는 전시물이다. 15세기 후반에 빚어진 ‘백자항아리’와 17세기 제작된 ‘백자용무늬항아리’의 은은한 미색과 둥글고 부드러운 선이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준다. 조선백자를 마주하면 왜 우리 민족이 흰색을 좋아했는지 조금 알 것 같다.

■ 경기, 나라를 지탱하는 뿌리
대동법 시행에 모든 것을 걸었던 잠곡 김육의 초상화가 관람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우람한 소나무 아래 서 있는 이가 안민(安民)에 모든 것을 걸었던 정치가 김육이다. 명재상의 우뚝한 풍모가 소나무와 조화를 이룬다. 정조 시대의 대표 정치가 ‘심환지 초상’도 주목되는 유물이다. 머리털 한 올도 소중히 다룬 조선의 초상화를 오래 바라보면 그 시대와 그 사람의 인생이 그려진다. 옛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경기도박물관을 찾아 풍성하게 전시된 초상화만 관람해도 만족하지 않을까. 고려의 도읍 개성을 생각하면 우리의 현실이 분단국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절감하게 된다. “1천 년 동안 고려와 조선 두 왕조에서 개경과 한양이라는 도읍을 가졌던 경기는 나라를 지탱하는 뿌리였습니다.” 고려와 조선시대에 개경과 한양을 나무와 물에, 경기를 뿌리와 샘에 비유했다는 사실이 재미있다.
전시실 중앙 네모난 유리관 안에 놓여 있는 의자와 지팡이가 예사롭지 않다. 보기 드문 ‘사궤장(賜几杖)’이다. 나이 일흔이 넘은 1품 이상의 대신에게 왕이 팔걸이의자(几)와 지팡이(杖)를 내려줘 예우하는 법이 있었다. 이 유물의 주인이 백헌 이경석이다. 병자호란의 극복에 치욕을 감수하며 온몸과 정성을 다한 명재상이다. 1668년 70세가 넘은 이경석이 벼슬에서 물러나고자 청했을 때 국왕 현종이 하사한 유물이다. 그 과정을 그림으로 담은 ‘연회도첩’을 살펴본다. 당대 석학들이 지은 축하의 글과 이경석 본인의 마음을 읊은 시를 기록했다. 교서와 궤장을 싣고 온 행렬이 이경석의 집으로 들어가는 장면인 ‘지영궤장도’, 교서를 낭독하고 궤장을 전달하는 ‘선독교서도’, 의식이 끝난 뒤 연회를 거행하는 ‘내외선온도’다. 실감영상실에서 연회도첩을 토대로 구성한 친절한 전시는 ‘사궤장 제도’에 따라 이경석이 의자와 지팡이를 하사받는 장면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멋진 투구와 창이 보인다. 효종의 뜻에 따라 북벌을 준비한 이완 장군(1602~1674)의 특별한 유물과 마주한다. 이완은 어영대장과 훈련대장을 맡아 각종 군제개혁 사업을 주도하며 국방 강화에 주력한 인물로 유명하다. “장군이 생전에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투구와 창으로 경주 이씨 구당공파 정익공 종중에서 기증한 유물입니다.” 금으로 상감한 용과 연꽃과 당초무늬를 장식한 투구를 찬찬히 살펴본다. 창날에 뚫린 구멍은 아마 깃발을 달기 위한 것이리라. 황동으로 만든 띠를 둘러 장식한 창 자루도 주목된다. 이완을 의정부 우의정으로 임명하는 현종의 교지도 주목된다. 박물관에서 여성의 초상과 마주하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그런 면에서 채용신이 그린 ‘기계 유씨 47세 초상’은 관람객의 눈길을 절로 머물게 한다. 용인 이씨 문중으로부터 기증받은 이돈상의 초상화가 넉 점이나 있다. 이를 통해 초상화가 그려지는 과정을 알 수 있다.
용인시 기흥구 상갈동, 경기도박물관이 자리한 야트막한 산자락에 경기어린이박물관과 백남준아트센터도 자리 잡고 있다. 박물관과 미술관은 언제 찾아도 좋다. 겨울은 우리의 생각을 깊게 만드는 계절이다. 경기인의 뿌리를 알려주는 경기도박물관을 찾아 우리 생각의 깊이를 더하는 시간을 가져보자. 권산(한국병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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