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선거 사형·차이나 아웃!” 한국의 혐오집회, 12.3 비상계엄이 ‘기폭제’ [취재후]

1년 전, 윤석열 전 대통령은 비상계엄을 선포했습니다.
2024년,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계엄 선포.
윤 전 대통령이 내세운 이유 중 하나는 '부정선거 의혹'이었습니다.
민주주의 핵심인 선거를 관리하는 전산시스템이 이렇게 엉터리인데, 어떻게 국민들이 선거 결과를 신뢰할 수 있겠습니까? 선관위도 국정원의 보안 점검 과정에 입회하여 지켜보았지만, 자신들이 직접 데이터를 조작한 일이 없다는 변명만 되풀이할 뿐이었습니다.
- 윤석열 전 대통령, 지난해 12월 12일 대국민 담화문 中
'음모론'으로 여겨졌던 부정선거 의혹을 대통령이 직접 수면 위로 끌어올린 겁니다.
하지만, 윤 전 대통령 파면과 이후 내란 재판 등을 거치며 의혹의 실체는 근거가 없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계엄을 촉발했던 부정선거 의혹은, 이젠 모두 해소됐을까요?
■퇴근하는 선관위 직원 나올 때마다 "부정선거 사형" 고함치는 사람들
12.3 비상계엄 사태에서, 경기 과천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매우 상징적인 장소입니다.
당시 계엄군은 윤 전 대통령이 비상계엄 발표를 마친 지 2분 만에 선관위에 도착했습니다. 밤 10시 31분, 국회보다 더 이른 시각입니다.

지난달 27일, 취재진이 선관위 앞을 다시 찾았습니다.
평일 오후, 선관위 앞엔 한 무더기 사람들이 모여있었습니다. 오랫동안 시위를 이어온 듯, 곳곳엔 텐트가 펼쳐져 있었습니다.
선관위 앞에 있던 이들은 날이 채 어두워지기 전에 집회를 시작했습니다. 무슨 시위를 하는 것이냐고 묻자 이런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집회 참가자 A 씨
"부정선거로 좌빨 중에서도 간첩을 부정으로 대통령을 만들어서 나라가 지금 이렇게 미쳐있다. ... (선관위는) 외부망과 내부망이 연결돼 있어가지고 부정선거로 만드는 인간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나이가 80살이 넘었는데도 이 추위에 노태악 사형과 선관위 해체를 소리치는 거다"

텐트에 모여 함께 밥을 먹고 담소를 나누던 참가자들은 저녁 6시, 선관위 직원들 퇴근 시간이 되자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차량과 사람이 나올 때마다 확성기를 사용해 "부정선거 사형" "범죄 집단 해체하라"고 외쳤습니다. 노래를 부르고 꽹과리도 쳤습니다. 직원들이 탄 통근버스가 드나들 땐 목소리가 더 커졌습니다.

집회 지속 시간은 30분 정도. 이들은 선관위원장을 직접 언급하며 "노태악 부정선거 사형"이라는 구호를 외치기도 했습니다.
'부정선거 시위대'라고 알려진 이들은 이전에도 종종 선관위 앞에서 집회를 열었지만, 지난해 12.3 비상계엄을 분기점으로 차원이 달라졌습니다.
선관위 관계자
"계엄 이후로 부정선거를 믿는 사람들이 훨씬 많아졌고 집회 규모도 커졌습니다. 파면 선고쯤이던 지난 4월 무렵, 부정선거를 주장하는 단체에서 텐트를 설치했고, 지금까지 상시 운영되고 있죠. 가장 심했을 땐 6.3 대선을 앞두고 있던 4~5월 경이었습니다. 퇴근하는 직원들과 직접 부딪히는 일도 있었고, 노태악 선관위원장과 김용빈 전 선관위 사무총장의 차량 번호를 외워서 차량 운행을 방해하는 일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TV, 신문 안 봐!" 기성 언론엔 강한 적대감…유튜브 보고 '근거 없는' 부정선거 주장
그동안 부정선거 의혹은 '근거 없는 음모론'이라는 사실이 여러 번 확인됐습니다.
부정선거 관련 소송만 100건이 넘었지만, 단 한 건도 인정되지 않았습니다.
[연관 기사] 법원·수사기관·선관위 모두 “부정선거 없다” (2025.01.22 뉴스9)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8158574
윤석열 전 대통령이 주장한 부정선거 의혹 역시 탄핵 심판 과정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부정선거 의혹은 형사 절차로 진실을 밝힐 수 있는데 이미 법원 판결로 의혹이 해소됐고, 선관위가 수검표 제도와 투표함 보관 CCTV 공개 등 보안도 강화했다는 겁니다.
[연관 기사] 헌재, 부정선거 의혹 일축…‘3·15 부정선거’도 언급 (2025.04.07 뉴스9)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8221028

하지만 사법부의 이러한 거듭된 판단은 시위대에겐 닿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부정선거를 외치는 이들, 주장의 근거가 무엇인지 묻자 이렇게 답했습니다.
#1
기자 : 정치 사회 이슈와 관련해 신문과 방송 뉴스를 보시나요?
집회 참가자 B 씨 : 아뇨 유튜브 채널로 팩트체크 하고 있습니다.
기자 : 뉴스나 신문은 안 보시나요?
집회 참가자 B 씨 : 신문을 팩트체크 해주는 채널을 봐요. 진짜 좀 심각해요 부정선거가.
#2
기자 : 부정선거 주장하시는데 무엇을 근거로 하시나요?
집회 참가자 C 씨 : 안 봐. 방송은 안 봐. 방송은 아예 끊은 지가 오래됐고. 81살인데도 밤새도록 유튜브 보고 나는 아예 미국 방송을 많이 봐. 유튜브.
KBS 취재진이라고 신분을 밝히자, 시위대는 강한 적대감을 나타내기도 했습니다.
이들이 한정된 정보만을 주고받는 사이 부정선거 음모론은 더 은밀하고 정교한 방식으로 재생산되고 있었습니다.
계엄 이후, 한국 사회에서 '분노'는 그렇게 또다시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명동 중국대사관·핫플 관광지 홍대서는…"중국 간첩 부정선거 확실"
서울 명동 중국대사관 인근과 홍대입구역. K-컬처의 영향으로, 수많은 외국인이 찾는 대표적 관광 명소입니다.
그런데 지난달 28일과 29일 저녁 무렵, 이곳에선 수백 명이 참가한 시위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외치는 구호엔 '부정선거'와 '계엄 옹호'가 있었고, 특정 국가를 향한 '혐오' 발언도 이어졌습니다.
#1
부정선거 감시하라!
사전투표 폐지하라!
국민주권 되찾아서 승리하리라!
부정선거 조사! 선거개입 조사!
#2
계엄까지 했는데! 아직도 눈 못 뜨네!
아직도 정신 못 차린! 매국노들 눈 떠라!
해킹 간첩의! 부정선거 의심해!
언론이 다 먹혔대도! 뇌 있으면 눈 떠라!
우편투표 폐지! 사전투표 폐지!
중국 간첩의! 부정선거 확실해
언론이 다 먹혔대도! 뇌 있으면 눈 떠라!
#3
화교혜택 폐지! 불법이민 거부!
무비자 반대! 차이나 아웃!
중국납치 조사! 중국마약 조사!

지난해 12월 무안공항 제주항공 참사와 관련한 황당한 구호도 들렸습니다.
제주항공 참사가 '중국이 기획한 드론 격추 테러'라는 그야말로 뜬금없는 음모론인데, 이 때문에 "무안공항 참사를 특검하라"는 근거 없는 구호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온 국민을 충격과 슬픔에 빠트렸던 '참사'마저도 '혐오의 대상'으로 왜곡되고 있는 상황.
비슷한 시위는 이곳 말고도, 강남역과 논현역, 성수동, 마곡 등 서울 곳곳에서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극우 세력이 '패배 감정' 쏟아낼 '토템' 되어버린 선관위와 중국
우리 사회의 한 복판에 여전히 남아 있는 이러한 '분노'의 정서를 어떻게 봐야 할까요?
시위 영상을 함께 본 전상진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는 이들의 시위를 보고 소녀상을 모욕하던 극우 시위대가 떠오른다고 말했습니다.
"선관위가 부정선거 음모론자들에게는 일종의 토템이 된 것 같거든요. 부정적 의미에서 성지인 거잖아요. 수요 시위를 반대하는 자들이 소녀상 앞에 나와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모욕하고 조롱하던 것과 너무나 흡사합니다."

선관위 앞과 서울 시내에서 열리는 시위, 전 교수는 '집회의 두 얼굴'로 분석했습니다.
"부정적 의미의 성지인 선관위 앞에선 '부정을 저지르거나 음모를 꾸민 엘리트를 공격하겠다'는 모습을 보입니다. 시위대에게 선관위는 공격하고 없애야 할 대상이기 때문에 그곳에서 나름대로 의지와 결기를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요.
반면 서울 집회에선 좀 더 전략적인 사고를 하는 것 같아요. 인구 밀집 지역에서 집회가 열리니 자신들의 모습이 어떻게 비칠까 생각하는 거죠. 본인들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외국인을 공격 대상으로 삼는 전략적 판단을 한 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왜 음모론에 끌리는 걸까. 전 교수는 '감정'에 주목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부정선거 음모론은 사실 여부가 아니라, 감정적인 부분이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할 겁니다. 시위대는 실추된 자존감 혹은 자존심을 세우기 위한 나름의 노력 하고 있는 것이라고 봐요.
음모론에 끌리는 건 그것이 사실에 부합되기 때문이 아니라, 그럴듯하게 들리거나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여서거든요. 시위에 나오는 사람들은 '(내가 지지하는 정치 세력이) 두 번이나 탄핵을 당했다면 이건 뭔가 있는 거다'라며 분한 마음이 생기는 거죠.
뭔가 악당이 음모를 꾸미는 거라고 생각하면서 내가 가진 울분과 자격지심과 피해의식, 이런걸 다 그들(선관위, 중국)에게 투사하면 나는 쉽게 밤에 잠들 수 있게 되죠."

'공적 장소'인 집회에서 터져 나오는 혐오 표현에 대해선 최소한의 규제가 절실하다고 지적했습니다.
"사람들 개개인의 마음속에 품고 있는 생각까지 바꾸기는 어렵죠. 그러나 적어도 공적인 장소에서 거리낌 없이 반지성적, 혐오적 언행을 하면 안 됩니다. 예를 들어 TV 드라마가 방영되려면 적지 않은 규제들이 있잖아요. 그것처럼 공개적으로, 공적인 자리에서 이뤄지는 집회에도 그에 상응하는 규제가 필요하고 예의범절을 요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전 세계적으로 극우, 혐오 세력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시민들의 '상식'을 통해 억누르고 있던 부정적인 목소리들은 12.3 비상계엄을 통해 곳곳에서 분출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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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영 기자 (mymy@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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